아직 기억한다 산골 탄광마을의 흔적을
아직 기억한다 산골 탄광마을의 흔적을
이번 태백 여행의 주인공은 불이다. 석탄과 탄광 그리고 광부의 흔적을 따라갈 예정이다.
‘검은 황금’으로 불리던 석탄을 빼고 태백의 역사를 이야기하기란 곤란하다.
1981년, 장성읍과 황지읍이 태백시로 승격된 것 역시 탄광 덕분이다.
탄광마을의 최전성기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태백이 품은 공간은 그대로이지만 넘치던 사람들 떠나버린 탄광마을은 쓸쓸하다.
홀로 남겨진 탄광마을의 쓸쓸함을 오롯이 품은 철암역과 광부들의 생활터전이던 상장동 남부벽화마을을 중심으로 태백체험공원과 태백석탄박물관까지 살필 예정이다.
본격적인 태백 탐험 시작 전 색다른 여행을 위해 한 가지 팁을 추가한다.
2013년 4월부터 서울에서 출발해 제천~태백~영주를 순환하는 중부내륙순환열차(O-train)가 운행을 시작했다.
중부내륙순환열차 패스권(어른 2일권 6만6100원, 3일권 7만7500원, 기간내 무제한 이용가능)을 구매하면 철암과 분천을 왕복하는 백두대간협곡열차(V-train)까지 이용할 수 있다.
중부내륙순환열차 승차권(서울~제천 1만8900원, 서울~영월 2만2100원, 서울~태백 2만7700원, 서울~분천 3만2100원
서울~단양 4만2900원)을 구매할 경우에는 백두대간협곡열차 승차권(편도 8400원)을 따로 준비해야 한다.
이곳 태백이 한창일 때, 탄들이 오고가며 보았을 풍광과 비슷하지 않을까.
태백에서 석탄이 발견된 것은 1920년경. 장해룡이라는 사람이 금천골 먹돌배기의 개울가에서 처음 발견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곳은 석탄이 발견되기 전에도 땅이 검었고 비가 오면 계곡물도 검게 물들어 예부터 ‘거무내’라고 불렸다.
석탄을 알아본 일본인들은 태백에 탄광을 만들었다. 일제강점기였다.
광복의 기쁨을 채 누리기도 전 발발한 6·25전쟁으로 광산산업은 발전할 틈이 없었다.
탄광산업이 부흥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 이후 경제개발 5개년 등의 산업발전과 맞물리면서 부터였다.
태백뿐 아니라 정선·삼척·영월·보령·문경·화순 등의 탄광도시가 태어났다.
탄광산업이 활성화되자 ‘한 밑천’을 꿈꾸는 이들이 전국에서 작은 산골 마을로 몰려들었다.
화전민들이 흩어져 살던 태백은 무려 13만 명이 넘는 거대한 탄광도시가 되었다. 그 주역은 탄광노동자, 광부와 그의 가족들이었다.
광부들은 함백·태백·연화·백병산 등을 파헤치며 불을 품은 검은 돌을 캐내 사람들에게 온기를 전했다.
“당시 대졸 초임 월급이 5만원 안팎이었는데, 탄광노동자들 월급은 20만원 정도였어요. 전국에서 일하겠다고 몰려들었죠. 대졸자들도 많았어요.
이 산골에 칼라TV며 전화기가 집집마다 있었답니다. 개도 만 원 짜리를 물고 다닌다는 풍문은 괜한 말이 아니었지요.
돈도 사람도 넘쳐났습니다. 그만큼 유흥문화도 발전했지요. 고된 노동, 알 수 없는 내일에 대한 불안함을 술이나 유흥으로 풀려고 했으니까요.”
태백 토박이 신동일 문화해설사의 설명이다. 그의 아버지는 광부였다. 돈이며 사람이 넘쳐나던 탄광도시 이면의 슬픔도 빼놓을 수 없다.
탄을 캐던 막장에서는 사고가 끊이지 않았고 이는 광부들의 생명과 직결되었다.
태백 시내 연화산 자락에 세워진 산업전사위령탑이 그들을 기린다. 목숨을 걸고 탄을 캐던 광부들의 일터를 ‘막장’이라 한다.
물질적 풍요와 생사를 건 노동을 오가며 위태롭게 반짝이던 태백의 호황은 1990년대 들어 사그라지기 시작한다.
정부의 석탄합리화정책으로 대부분의 탄광이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일터를 잃은 광부들 역시 태백을 떠났다.
한때 13만 명이 넘는 인구를 자랑하던 탄광도시에 남은 이들은 5만 명 안팎. 강파른 언덕배기에 다닥다닥 붙은 사택들이 시끌벅적하던 한때를 증명할 뿐이다.
주인 잃은 빈집은 폐광마을의 쓸쓸함, 그 자체다. 물론 여전히 이름을 유지하며 채탄작업을 지속하는 탄광도 있다. 한보탄광, 대덕탄광 등 손에 꼽을 정도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