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시기의 삶과 문화를 보여주는 부산 임시수도기념관
한국전쟁 시기의 삶과 문화를 보여주는 부산 임시수도기념관
부산광역시 서구 임시수도기념로
부산 하면 해운대와 광안리, 부산국제영화제를 떠올린다면 부산에 안 가봤거나 부산을 잘 모르는 사람일 것이다.
부산의 속살을 살펴보면 예상외로 매력 있는 여행지가 넘쳐난다.
광복에서 민족의 비극인 한국전쟁, 전후 어렵던 우리의 삶을 볼 수 있는 장소도 그중 하나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고향을 등지고 부산으로 내려온 건 피란민뿐만 아니다.
수도도 옮겨져 부산이 임시 수도(1950~1953년)가 되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부산에 있던 경남도지사 관사를 대통령 관저로 사용하며 집무를 수행하고, 국빈을 맞았다.
지금은 이곳이 임시수도기념관으로 꾸며져 전시에 대통령이 사용하던 유품과 각종 사진 자료를 전시한다.
임시수도기념관은 임시 수도 시기의 대통령 관저와 전시관으로 꾸며졌다.
부산 경무대라 불리는 대통령 관저는 1926년에 경남도지사 관사로 지어진 건물이다.
붉은 벽돌로 된 외관에 네모반듯한 창이 여러 개 있고, 잘 손질된 정원수를 보면 일본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실내는 이승만 대통령이 관저로 사용하던 때의 구조와 분위기 그대로다.
1층은 대통령이 정부 각료들과 회의하고 외교 업무를 보던 응접실, 대통령 내외가 사용하던 자개장과 반닫이 등 가구가 놓인 내실,
책을 읽고 나라의 미래를 구상하던 서재, 거실, 식당과 부엌 등으로 꾸며졌다.
‘증언의 방’에서는 한국전쟁 때 특공대 요원으로 첩보 수집과 인민군 생포 임무를 수행한 이정숙 할머니의 증언을 들을 수 있다.
2층은 이승만 대통령이 전방 부대와 훈련소를 시찰하면서 입은 방한복, 프란체스카 여사가 입은 코트 등 부부의 유품과 관련 자료를 전시한다.
대통령 관저 뒤편에 자리한 전시관은 1987년 부산고등검찰청의 검사장 관사로 지어진 건물이다.
검찰청사가 이전하면서 2002년 임시수도기념관 전시관이 되었다.
서울과 부산을 오가던 열차 모형, 아들을 전쟁터에 보낸 아버지의 위문편지, 부산에 자리 잡은 피란민이 생활하던 판잣집,
일거리를 찾아 나선 피란민, 피란 학교의 모습 등 당시 피란민의 삶과 한국 경제의 실상을 보여준다.
중구 대청산 자락의 중앙공원은 한국전쟁 때 피란민이 모여 산 판자촌이 있던 곳이다.
중앙공원에는 1876년 부산항이 개항한 뒤 1945년 8월 15일 광복될 때까지 일본의 침략에 항거한 부산의 독립운동 역사를 알 수 있는 부산광복기념관이 들어섰다.
규모가 작고 전시물도 많지 않지만
부산의 3·1운동, 동래장터 독립만세운동, 구포장터 독립만세운동 등에 대한 기록물이 주제별로 구성되었다.
이외에도 애국 계몽 운동, 사회 문화 운동, 학생들의 독립운동 등 광복이 될 때까지 독립운동사 전반에 대해 이해를 돕는 자료가 있다.
위패 봉안실에는 순국선열과 애국지사 431명(2015년 5월 현재)의 위패를 봉안해 그들의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을 기린다.
감천문화마을도 한국전쟁과 인연이 깊다.
부산은 전국에서 몰려든 피란민으로 가득 찼고, 집 한 칸 없는 피란민은 산기슭에 작은 집을 지어 몸을 누였다.
감천문화마을도 이때 생겼다.
1950년 태극도 교주 조철제가 피란한 신도들과 옥녀봉 아래 집단 거주지를 형성한 것이 감천문화마을이다.
산비탈을 개간하면서 슬래브 지붕을 얹은 계단식 주택을 지었고, 앞집이 뒷집의 조망을 가로막지 않으며, 모든 골목이 이어져 소통할 수 있도록 했다.
시간이 흘렀어도 달동네의 모습은 그대로 유지했고, 지붕은 파란색과 분홍색 등으로 알록달록하게 칠해 색감이 풍부해졌다.
여기에 마을의 특색을 살리기 위해 지역 예술인과 마을 주민이 ‘마을 미술 프로젝트’를 진행,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달동네를 만들었다.
미로 같은 골목은 불편함보다 옛 추억과 재미를 주는 길이 되었고, 낡고 허름한 집은 박물관에 진열된 골동품처럼 다가왔다.
구석구석 멋진 미술 작품이 더해져서 감천문화마을은 지붕 없는 거대한 미술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