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 낙산사 화마 이겨낸 해수관음의 성지
양양 낙산사 화마 이겨낸 해수관음의 성지
꽃만큼 곱고 아름다운 사람들의 이야기 방림별곡 평창사랑
신선이 노닐고 구름이 쉬어가는 곳, 강원도. 지난겨울 막바지에 너무 많은 눈구름이 쉬어갔다.
끝없이 내리는 눈은 자연재해가 되어 강원도에 큰 피해를 입혔다. 지난 2005년, 강풍을 타고 넘어온 산불이 낙산사를 덮쳤다.
아이러니하게도 4월 5일 식목일이었다. 산불로 인해 낙산사는 전소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원통보전이 불타고, 보물로 지정된 조선시대 동종이 녹아내리는 모습을 보며 차마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불심으로 다시 일어난 낙산사는 해수관음의 성지로서 면모가 여전하다.
통일신라 위기 때 나타난 관음보살
낙산사 창건 전, 당나라 유학을 중단하고 신라로 돌아온 의상대사는 걱정이 많았다.
그는 당나라의 침입을 예감하고 있었고, 삼국통일에 반감을 품은 귀족의 반란 징후가 곳곳에 나타났으며, 문무왕은 불안해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내부적 단합이 중요하던 그때, 의상대사는 강원도 양양에 관음보살이 머물고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된다.
관음보살은 중생의 괴로움을 구제하는 보살이기에 의상대사는 바로 양양으로 향했다.
홍련암 아래 관음굴에서 21일 동안 기도한 그는 마침내 관음보살을 만날 수 있었다.
관음보살은 대나무가 쌍으로 돋아날 것이니, 그곳에 불전을 짓는 것이 마땅하리라고 전했다.
대나무가 돋아난 곳에 의상대사는 원통보전을 세웠다. 낙산사 전각 중 원통보전과 홍련암을 대표적 전각으로 꼽는 이유다.
낙산사 복원에는 국가유산청과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전문가가 참여했다. 원통보전의 복원에는 양양에서 자란 소나무를 사용했다.
조선 초기 다포식 양식인 원통보전은 팔작지붕에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중앙 법당다운 안정감과 장엄한 기운을 지녔다.
원통보전에 다가설수록 색감은 생생해지고 단청의 화려함은 섬세해지는데,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모를 정도다.
서까래만 봐도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가늠할 수 있다.
원통보전 가까이 건칠관음보살좌상(보물 제1362호), 칠층석탑(보물 제499호), 담장(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4호) 등 문화재가 모여 있다.
건칠관음보살좌상은 원통보전 내부에 있다.
고려 후반 전통 양식을 띤 이 불상은 조선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지금까지도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중요한 문화재이다.
온화한 표정, 가냘픈 손가락, 섬세한 옷 주름 등 섬세한 묘사가 돋보인다.
원통보전 정면으로 칠층석탑이 있다. 이 탑은 창건 당시 3층이던 것을 세조 13년(1467)에 이르러 7층으로 높였다.
부분적으로 손상됐으나 탑 꼭대기에 있는 쇠붙이까지 원형 그대로 남아 있으며, 기단부에서 투박한 겹연꽃 무늬를 볼 수 있다.
원통보전 담장은 조선시대 세조가 낙산사를 중창할 때 쌓은 것으로 전해진다. 기와와 흙을 차례로 쌓고 곳곳에 원형 단면의 화강암을 넣었다.
조선시대 사찰의 대표적인 담장으로 평가받는다.
담장 주위엔 창건 설화에 등장하는 대나무가 자란다.
홍예문에서 원통보전으로 이어지는 동선은 오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여느 고찰의 분위기와 사뭇 다르다.
마치 세조가 다녀간 뒤 중수 직후의 모습이 지금 같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선명함과 생생함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원통보전에서 해수관음상으로 향하면 낙산사의 또 다른 매력이 기다린다. 해수관음상에서 의상대를 지나 홍련암에 이르는 구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