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의 숨겨진 근대문화유산 군산 어청도등대
군산의 숨겨진 근대문화유산 군산 어청도등대
군산의 고군산군도를 이루는 63개의 섬 중 서해의 가장 외곽에 위치한 섬이 어청도다.
이 섬에는 100년이 넘도록 바다를 마주보며 항해하는 선박을 위해 한 줄기 희망의 빛을 쏘아내는 등대가 서 있다.
어청도등대다. 1912년 3월 1일에 첫 점등을 한 근대문화유산이다.
어청도등대를 만나는 여정은 쉽지 않다.
군산연안여객터미널에서 배를 타고 2시간 30분, 선착장에서 2km 산길을 걸어 30분을 더 가야 한다.
가는 길이 멀고 힘들지만 어청도등대와 조우하는 순간 힘든 기억은 봄 눈 녹듯 사라진다.
깎아지른 절벽 위의 하얀 등대가 푸른 바다와 어우러진 풍경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어청도등대는 100여년 전에 만들어졌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본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원형의 등탑은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들어 안정감이 느껴진다.
입구에는 삼각형 지붕을 얹은 문을 달았고, 등탑 윗부분에는 전통 한옥의 서까래를 모티브로 장식했다.
제일 윗부분 등롱은 주홍색 청동으로 마무리 해 조형미가 돋보인다.
등대를 둘러싼 나지막한 돌담과 해송이 더해져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숲속의 집을 보는 것 같다.
등대의 하얀색과 하늘의 파란색, 바다의 짙은 녹색이 조화를 이뤄 보는 이로 하여금 “이렇게 예쁜 등대는 처음”이라는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해가 지고 나면 등대는 홀로 빛이 난다.
바다 위를 운항하는 선박을 위해 12초에 한번씩 밝은 빛을 바다로 쏘아낸다.
숨 한번 들이쉴 때마다 불빛이 반짝이고, 불빛은 멀리 26마일(약 42km) 해상까지 신호를 보낸다.
태풍이 불고 비바람이 몰아쳐도 어청도등대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100년이 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서해의 외딴 섬 어청도에 인천 팔미도등대에 이어 두 번째로 등대가 들어선 이유는 무엇일까.
어선의 안전을 위한 것은 아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대륙진출을 하기 위한 목적에서 세웠다.
만주와 조선의 지배권을 두고 러시아와 일본이 벌인 러일전쟁(1904~1905)에서 승리한 일본은 러시아의 조차지인 랴오둥(遼東)반도의 다롄(大連)을 차지한다.
이를 기반으로 만주로 진출하기 위해 오사카와 다롄을 연결하는 정기항로가 개성되는데, 어청도를 중간 기착지로 이용하게 된다.
군산항과 서해안 남북항로를 통항하는 모든 선박들이 이용하는 중요한 길목이기 때문이다.
어청도등대 뿐만 아니라 어청도의 바다도 일본과 관계가 깊다.
1885년 경에 일본인 잠수부들이 찾아와 전복, 해삼 등을 채취하기 시작하였고,
1898년 일본인 어부 20가구가 인천에서 어청도로 이주해 터전을 잡았다고 한다.
이후 일본인들의 서해 어업 전진기지가 되었으며, 일본 어민들의 자녀 교육을 위해 어청도 심상보통학교도 세워졌다.
어청도등대를 감상하고 난 뒤에는 섬을 한 바퀴 돈다.
산등성이를 따라 조성된 둘레길을 군산의 숨겨진 걸으면 어청도와 주변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보령시의 외연도·녹도가 걷는 내내 길동무가 되고, 재선충으로 인해 고사목이 된 소나무도 이국적인 느낌을 준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영어 알파벳 C자 모양으로 들어선 포구다. 지금은 한적한 포구지만, 1960~1970년대에는 서해안 고래잡이의 전초기지였다.
포구는 고래잡이 포경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동해에 사는 고래가 봄에 새끼를 낳기 위해 어청도 근해로 이동해 오면 장생포의 포경선도 고래를 따라 이동해 왔기 때문이다.
서해안에서 잡힌 작은 고래는 배에서 해체하고 큰고래는 어청도로 운반해 부두에서 해체 작업을 했다고 한다.
어청도 주봉인 당산(198m) 정상에 오르면 고려시대부터 있었다는 봉수대가 남아 있다.
봉수대는 서해를 통해 침입하는 왜구를 포착하기 위한 통신시설이다.
낮에는 연기를 올리고, 밤에는 횃불을 피워 소식을 전했다.
<조선보물고적자료>에는 “청도리 봉수대는 어청도의 당산인 서방산 상에 있으며, 높이 7척 2간으로 원추상으로 석축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자연석으로 된 낮은 기단 위에 2층의 원추형 모습을 지닌 봉수대는 돌로 만든 7층 계단을 걸어 올라가면 1층 회랑에 이를 수 있다.
어청도 봉수대는 17세기 중반인 조선 숙종 3년(1677)에 폐지되었다.
봉수대 앞에는 봉수군의 임시 거처로 추정되는 정방형의 집터가 남아 있다는데,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마을 중앙에는 치동묘가 있다. 중국 제나라 사람인 전횡을 모시는 사당이다.
전횡은 어청도란 이름을 지은 사람이라고 전해진다.
마을에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기원전 202년 중국의 한나라 유방이 초나라 항우를 물리치고 천하를 통일했다.
패한 항우가 자결하자 전횡은 두 명의 형제와 군사 500명을 거느린 채 돛단배를 타고 탈출해 3개월 만에 어청도를 발견하였다고 한다.
전횡은 안개가 낀 바다에 갑자기 푸른 산 하나가 우뚝 나타났다고 해서 섬을 푸른 섬이라 하여 어청도(於淸島)로 지었다고 한다.
전횡의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과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전횡은 백제시대 이래 어청도의 안위와 주민들의 풍어를 비는 제사의 토속신앙 대상이 되었다.
치동묘는 2m 높이의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고. 대문에는 태극 문양이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