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부여군 동장군이 넘지 못하는 돌담
충남 부여군 동장군이 넘지 못하는 돌담
서울 근교 여행, 가까운 곳에서 바다를 즐기는 제부도 드라이브
충남 부여군 외산면 반교마을, 반교천과 아미산 사이 배산임수의 작은 산촌에 도착했다.
1687년 나주 정씨가 정착하면서 형성된 이 마을은 옛날에 배나무가 많아서 배나무골, 돌이 많아서 도팍골이라고도 불렸으며
널판을 다리로 쓰는 마을이라 해서 ‘판교’라고 불리다가 ‘반교’로 변한 지명이 자리 잡았다고 한다.
이 마을에 온 이유는 문화재로 등록된 돌담길을 걷기 위해서다.
국내의 문화재로 등록된 돌담길 대부분은 경상도와 전라도에 분포해 있다. 충청도에서는 돌담길 문화재가 반교마을 하나뿐이다.
충청도의 외동돌담을 만나는데 그냥 갈 수 없는 법. 지도를 꺼내 주변지리를 신중히 살펴봤다. 반교마을을 보다가 부여를 살펴봐야 했고, 부여를 보다가 차령산맥을 살펴봐야만 했다.
먼저 부여군은 서북이 높고 남동이 낮다. 낮은 땅에는 강이 흐르기 마련.
부여군의 남쪽은 이른바 금강의 축복받은 지역이라 불리며 전라북도와 경계를 이룬다. 반면에 부여군의 서북쪽은 늘씬한 산하가 미소를 짓고 있는 곳이라 불린다.
차령산맥이 낳은 예쁜 자식 아미산의 늘씬한 자태가 마을 너머로 확인된다.
나주 정씨가 이곳에 정착했을 당시에도 산하의 ‘미소’가 보였을까. 보였다면, 척박한 땅을 일군 선조에게 그 미소는 조금 원망스럽지 않았을까.
돌담이 있는 마을
돌담이 있는 마을을 가게 되면 경사 높은 산사면 또는 깊은 골짜기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바람이 부는 날이면 그 강도가 더욱 세기도 하다. 마을에 들어서자 산자락을 타고 내려온, 산자락을 도는 골바람이 거칠다.
때문에 돌담의 주 용도는 방풍이다. 집과 돌담 사이의 간격이 좁고 그 높이도 지붕처마에 닿을 정도로 높은 편이다.
경사진 땅에 집을 짓기 전 돌을 깔아 수평을 잡은 모습도 더러 눈에 띈다.
척박한 땅에서 돌을 골라내 여러 용도로 쓴 개척민의 수고가 느껴진다. 김장철이 한참 지났는데, 밭에는 미처 걷어 들이지 않은 배추가 흰눈에 반쯤 잠겼다.
그런데도 잎이 빳빳, 꼿꼿하다. 반교마을 단단한 돌의 풍모가 배추에도 배어있는 것일까.
돌만으로 쌓은 것도 있고 돌과 흙을 같이 쓴 담도 눈에 띈다. 한번 허물어진 적이 있는지 부분적으로 시멘트가 발라진 돌담도 있다.
박물관에 전시된 신석기, 구석기의 유물의 경우 보는 이로 하여금 머리로는 이해되지만 가슴을 때리는 무언가가 느껴지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는 현장감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었는데,
이런 돌담길에서는 살아있는 삶의 흔적이랄까. 자연과 사람이 한데 어우러진 산촌의 돌담에서 아득하면서도 생생한 전시를 보는 듯하다.
반교리 돌담은 현재도 꾸준한 관리를 받는다. 마을 주민이 돌담길 보존회를 구성했으며 요즘도 직접 돌담을 쌓는다.
문화재로 지정된 것도 관리하는 이유지만 돌담을 보러오는 여행객들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전직 문화재청장이자 마을청년회장인 유흥준 씨가 이곳에 머물면서 반교마을은 유명세를 탔다.
5도2촌 생활을 권장하는 그가 일주일에 2일은 머문다는 휴휴당으로 가봤다. 작은 싸립문에 자물쇠가 걸렸고 장대 2개로 입구를 막아놓았다.
그의 손이 닿은 공간에 호기심이 들지만 외출했음을 알리는 장대 2개를 넘으면 안될 일이다.
언젠가 다시 반교마을을 찾아왔을 때에는 문이 열려 있기를 희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