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네 옛집의 품격
우리네 옛집의 품격
만석지기, 청송 심부자댁
청송(靑松)이다. 고장의 이름이 푸른 소나무다. 그 의미만으로 울림이 있다.
청송 사람들은 이를 ‘동쪽에 있는 불로장생의 신선 세계’라고도 받아들인다. 청송에 들어서면 그 말이 이해가 간다.
주왕산 아래 생명력이 넘치는 자연이다. 파천면 덕천리에 다다를 때 즈음에는 머물러 살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이 생겨난다. 파천면은 우리나라의 열 번째 슬로시티다.
자연과 역사를 존중하며 느리게 살아가는 마을이다. 여러 씨족이 집성촌을 이루어 살지만 덕천리의 청송 심씨 집안이 가장 잘 알려졌다.
파천이 슬로시티가 된 가장 큰 원동력 역시 청송 심씨 집안의 송소고택과 무관하지 않다. 송소고택은 청송 심씨 집안의 심호택이 지었다.
1880년경 호박골에서 조상의 본거지인 덕천리로 이전하면서다. 그의 호를 따 송소고택이라 부른다.
그는 조선 영조 때 만석지기였던 심처대의 7대손이다. 청송 심씨는 무려 9대에 걸쳐 만석의 부를 누렸던 집안으로 경주 최부자와 함께 영남의 양대 부호였다.
청송에서 대구를 가려면 심부자의 땅을 밟지 않고는 갈 수가 없을 정도였다.
또 조선왕조 500년 동안 세종대왕의 비인 소헌왕후를 비롯해 4명의 왕비와 4명의 부마(임금의 사위), 13명의 정승을 배출했다.
13년에 걸쳐 지은 99칸 송소고택이 그 위세를 짐작케 한다.
99칸 대부호의 집
신흥천을 지나 고택에 다다르자 먼저 솟을대문이 맞이한다. 좌우에 정면 7칸, 측면 1칸의 행랑채를 가진 대문간채다.
솟을대문에는 홍살을 설치했고, 위에는 ‘송소세장(松韶世莊)’이란 현판이 걸렸다. 이 또한 송소고택의 부(富)를 부연한다.
그 아래를 지나 고택으로 들어선다. 경내에는 10채의 건물이 자리한다. 대문채, 안채, 큰사랑채와 작은사랑채, 사당, 별채 등이 다.
하지만 제일 먼저 마주하는 건 집이 아니라 ‘ㄱ’자형의 헛담이다.
내외담이라고도 부르는데, 사랑채에 기거하는 남자들과 안채를 오가는 여자들 사이를 가른다.
조선 유교사회의 전통을 엿보게 한다. 헛담 주변으로는 아담한 정원을 꾸몄다. 화초들이 어울려 정감 있다.
마당에 선 향나무 고목도 고택의 풍모를 더한다. 헛담 뒤편에는 큰사랑채와 작은사랑채가 ‘ㅡ’자로 길게 자리한다.
큰사랑채는 집안의 가장 큰 어른이 머물던 공간이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위엄이 느껴진다.
누마루방에서는 바깥 정원의 풍경이 일품이다. 그 옆은 대청마루다. 대문간채 너머로 안산의 풍경이 시원스럽다.
대청 건너에는 책방이 있다. 사랑방은 정면 2칸에 측면이 1칸 반이다. 미닫이 창살문을 들여 반 칸의 작은 방(반침)을 뒀다.
작은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중문을 포함해 사랑 2칸과 대청 1칸 등으로 이뤄졌다.
여자들의 공간인 안채는 큰사랑채와 작은사랑채 사이 중문으로 들어간다. 전형적인 ‘ㅁ’자 구조로 전면에 사랑채가 있고 후면에 안채다.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특히 대청마루의 세살문 위에 빗살무늬 횡창을 달아 시선을 끈다. 마당에는 화단과 우물이 옛 정취를 느끼게 한다.
동쪽에는 3칸짜리 큰 부엌이 있는데, 그 너머 후원에 따로 방앗간까지 두었을 정도로 부유했다.
서쪽 담장의 솟을삼문을 지나면 별채로 이어진다. 가묘가 아니라 정자를 둔 게 독특하다.
송소고택은 단순히 유서 깊은 고택에 그치지 않는다. 2002년부터 일찌감치 고택 체험 시설로 개방해 일반인의 숙박이 가능하다.
큰사랑과 작은사랑, 안사랑과 행랑채 등 14개의 방을 개방한다. 큰사랑채의 누마루방이나 별채 등이 인기가 좋다.
화장실과 샤워실은 신발을 신고 나가야 하지만 수세식으로 꾸며 깔끔하다. 해마다 열리는 고택음악회도 빼놓을 수 없다.
한옥 처마 아래 울리는 소리가 은은하다. 다채로운 체험 프로그램이 있지만, 실은 별도의 체험을 하지 않아도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