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이 머물다 돌아간 곳 이성계를 찾아 떠나는 의정부 여행

용이 머물다 돌아간 곳 이성계를 찾아 떠나는 의정부 여행

용이 머물다 돌아간 곳 이성계를 찾아 떠나는 의정부 여행

용이 머물다 돌아간 곳 이성계를 찾아 떠나는 의정부 여행

난 이천에서 독일온천을 즐긴다 이천 테르메덴

의정부시 행복로 광장에 있는 이성계상은 의정부역에서 나온 방문객들을 제일 처음 맞이하는 의정부의 상징이다.

의정부시와 이성계의 인연은 왕자의 난 이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왕자의 난으로 졸지에 아들들을 잃고 왕위마저 빼앗긴 태조는 자신의 고향인 함흥 지방으로 가버린다.

이때 태조를 모시러 간 함흥차사들이 그대로 ‘함흥차사’가 되어버려 ‘함흥차사’라는 고사성어가 생겨나기도 했다(태조가 함흥차사들을 죽였다는 전설은 사실이 아니다).

우여곡절 끝에 함흥에서 돌아온 태조는 한양으로 가기 전 바로 이곳 의정부 호원동 인근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태조를 맞이하기 위해 정승들이 의정부로 왔고, 이들이 이곳에서 국정을 논의하였기에 이곳의 이름이 의정부가 되었다는 것이다.

의정부란 의정부시의 명칭이자 조선시대 정승들이 국정을 논의하던 일종의 국무회의 같은 것이었다.

이성계상이 있는 행복로는 의정부의 명동이라 불릴 만큼 번화한 거리이다.

곳곳에 휴식시설이 있어 가족끼리 나들이를 나오는 곳이기도 하다.

‘이성계를 찾아 떠나는 의정부 여행’의 두 번째 목적지는 회룡사(回龍寺)다.

서울과 의정부시에 걸쳐 있는 도봉산 자락 회룡사가 처음 문을 연 것은 신라 신문왕 무렵.

창건 당시의 이름은 법성사였으나 이성계와 인연을 맺으면서 회룡사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고려 말에 회룡사를 중창한 무학대사가 아직 장군의 신분이었던 이성계와 함께 머물며 불공을 드렸는데,

훗날 이성계가 왕이 되어 다시 찾으면서 ‘용이 돌아온 절’이라는 의미로 회룡사라 했다는 것이다.

고종 때 지어진 <회룡사 중창기>에는 조금 다른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에 따르면 개국공신 정도전의 탄압을 받아 이곳 토굴에서 은신하던 무학대사가 함흥에서 돌아온 태조를 만나 며칠을 지냈는데, 이 사건을 기념해서 회룡사를 지었다는 것이다.

어떤 것이 사실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이곳이 태조 이성계와 인연이 깊은 곳임은 틀림없는 듯하다.

지하철 1호선 회룡역에서 회룡사로 올라가는 입구에 있는 수백 년 된 회화나무도 이곳의 역사를 증언한다.

회화나무를 지나 회룡사로 오르는 길은 요즘 찾는 사람이 많은 북한산 둘레길이기도 하다.

길 옆으로 이어진 시원한 계곡이 오르막길에 힘을 보태준다.

계곡을 따라 도착한 회룡사는 아담한 절집이다.

이곳에서 놓쳐서는 안 될 유물은 큰 규모를 자랑하는 석조와 아담한 오층석탑, 그리고 대웅전 안에 있는 회룡사 신중도 등이다.

석조란 생활에 필요한 물을 저장해 사용하는 수조다.

회룡사 석조는 길이 224cm, 폭 153cm, 깊이 67cm로 현재 남아 있는 석조 중 최대 규모란다.

크기도 크기지만 표면이 매끄럽고 모양이 아름다워서 조선시대 석조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인정받고 있다.

회룡사 오층석탑은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15세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석조에 비해 아담한 크기다.

회룡사를 창건한 신라 의상대사의 사리가 봉안되어 있다는 전설이 전해오기도 한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