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발효 젓갈 맛보러 오세요 강경발효 젓갈축제
맛있는 발효 젓갈 맛보러 오세요 강경발효 젓갈축제
한때 평양, 대구와 함께 ‘조선 3대 시장’을 차지했던 강경은 지금도 매년 가을이면 ‘발효젓갈축제’로 당시의 부흥을 기억해내곤 한다.
큰 시장이 있었다는 건 그만큼 물자와 사람들의 왕래도 많았다는 뜻. 덕분에 강경은 살아있는 ‘역사박물관’이기도 하다.
2013년 올해로 17회를 맞는 ‘강경 발효젓갈축제장’에서 각종 젓갈 구경 뿐 아니라 강경의 역사도 둘러보았다.
황포돛배 띄운 금강변의 무심한 억새꽃이 사람들을 반긴다.
오는 10월20일까지 강경 포구와 인근 젓갈시장, 옥녀봉 자락에서 ‘강경발효 젓갈축제’가 펼쳐진다.
수백년 동안 이어진 전통 비법으로 숙성·발효시킨 젓갈은 어떤 맛일까?
축제 첫날부터 궁금증을 품고 모여든 이들이 적지 않다.
축제장을 보고 있으니 마치 100여 년전 강경포구의 전성기 때로 돌아온 것 같다.
성어기 철이면 하루에도 백여 척이 넘는 고깃배가 드나들었다는 강경의 역사가 절로 그려진다.
강경 포구를 알기 위해서는 그가 안긴 금강 줄기를 먼저 살펴야 한다.
천리에 달하는 금강은 전북 장수의 신무산에서 발원해 공주와 부여를 지나 강경을 파고든다.
금강줄기는 강경에 이르러서야 충남과 전북을 가르며 서해와 몸을 섞는다.
금강 하류에 자리한 강경은 서해에서 가장 깊숙이 내륙으로 몸을 뻗고 있다.
민물과 짠물이 넘나드는 강경의 위치는 ‘강경 포구’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서해안 최대의 수산항이자 충청도와 전라도를 나누고 잇는 교통의 요지였던 것.
물길로 그리고 육로로 사람들은 몰려들었고 그들을 따라 물자도 몰려들었다.
바닷물이 내륙으로 들어서는 통로였으니 수산물 집산지로도 제격이었다.
그만큼 문물의 발달도 빨랐다. 1920년대 전기 수도시설을 갖추고 있었다고 하니 한때 이곳은 한반도에서 정말 빠른 ‘근현대화’를 이룬 고장이었으리라.
지금까지 강경 읍내 곳곳에 남아있는 오래된 건물들은 당시 최신식 건물이지 않았을까.
은행과 극장도 일찌감치 들어섰고 대전과 부여, 공주, 군산까지 강경 상권에 속했단다.
강경 읍내에 남아있는 구 한일은행강경지점(제324호), 구 강경노동조합(제323호), 강경북옥감리교회(제42호), 구 남일당한약방(제10호)
강경중앙초교강당(제60호), 구 강경공립상업고등학교관사(제322호) 등이 자리를 지키며 이를 증명한다.
하지만 너무나 쓸쓸한 모습으로 자리한 그들을 보고 강경의 옛 영화를 기억해내기란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강경의 빛나는 시절은 1914년 장항선 철도가 놓이고 6·25전쟁을 치르면서 끝이 난다.
대도시였던 만큼 전쟁의 피해가 컸고 육로 교통의 발달로 강경 포구의 자리는 약해졌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강경은 예전의 명성과 전혀 무관하게 조용하고 작은 마을이 되었다.
전성기 때의 ‘강경’을 기억할 수 있는 ‘강경발효 젓갈축제’가 아쉬움을 달랠 뿐이다.
당시의 영화를 기억하는 이들, 그리고 대를 이어 강경에 터를 잡은 토박이들이 힘을 모은 덕분이다.
“여기 포구에 고깃배가 엄청나게 드나들 때, 그때 말이에요. 해산물이 너무 넘쳐나는 거예요.
이것들을 가만 두면 다 상해 버리잖아. 그래서 소금에 절인 거예요. 그러면 두고두고 오래 먹을 수 있으니까.
여기 주변에 젓갈시장이 몰려 있잖아요? 이 근방이 옛날 강경 포구 자리예요. 지금은 많이 변했지만, 저기 저 아파트 앞까지 물길이 닿았다고.”
강경의 역사를 살펴봤으니 본격적인 축제 구경에 나서보자. 강경 젓갈 중에서도 첫손에 꼽히는 것은 바로 새우젓.
유월에 담은 ‘육젓’, 오월에 담은 ‘오젓’, 그리고 지난 가을 담은 ‘추젓’까지. 새우젓은 크게 3종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