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왕은 백성을 버려도 요새는 남아 이 땅을 지킨다
남한산성 왕은 백성을 버려도 요새는 남아 이 땅을 지킨다
문득, 내가 살고 있는 도시가 궁금해질 때가 있다. 생각해보면, 여행을 떠날 때는 늘 다른 나라, 다른 도시로 갔다.
평생 살아 온 이 도시가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역사가 있었는지도 잘 모르면서.
서울의 역사가 궁금해진 날, 동남쪽 방향으로 떠나보자.
그 곳에는 삼국시대부터 한강이 흐르는 이 땅을 지켜주었던 4대 요새 중 하나인 남한산성이 있다.
굳건한 돌담처럼 늘 백성을 지켜 주리라 믿었던 이 성에는 임금이 백성을 버린 치욕스러운 역사가 남아있다.
서울의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남한산성에 올라 성벽길을 천천히 따라 걸으며 이 땅의 긴 역사, 그 많은 이야기들을 하나씩 되새겨보자.
남한산성은 인조 대에 완성되긴 했지만 이미 삼국시대부터 요충지로 여겨진 곳이다.
안쪽은 평평하고 얕은 반면 바깥쪽은 높고 험해서 외부에서 공격하기가 쉽지 않았고, 야간습격도 어려운 지형덕분이었다.
그러니 한양 근처에서는 가장 안전한 피신처라 할 수 있었다.
왕이 임시로 지낼 수 있는 행궁까지 있어 마치 작은 수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조선 인조 14년(1637) 병자호란 때, 청나라의 10만 대군에 밀린 조정은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조선 왕실은 남한산성의 군사적 요충지로서 유리한 지형을 이용하여 치열하게 청에 맞서 싸우기보다는
그냥 산성 안에서 버티다가 40여일 만에 항복한다.(삼전도의 굴욕,1650)
인조는 삼전도에서 청과 굴욕적인 화친을 맺었고, 화친의 조건으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포함한
주전파 군신들을 비롯해 50만 명의 부녀자가 볼모로 잡혀가 훗날 그 일부만이 되돌아왔다.
9km에 이르는 성채의 정상에는 왕실수호의 의지를 담은 수어장대(守御將臺)를 세우고
성안에는 행궁과 관청은 물론 연무관(演武館)과 각종 무기고를 설치하고, 비상시 용수로 사용할 3개의 연못까지 파놓았다.
그 밖에 성안에는 1천 여호에 달하는 도읍을 형성해 산성의 일상적인 관리를 하며 서울 동부지역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런 면모는 일제가 성안의 기구를 광주와 하남으로 분리해 이주시키기까지 3백년 가깝게 이어져 왔다.
따라서 남한산성은 북쪽의 개성(開城)과 서쪽의 강화성(江華城), 남쪽의 수원성(水原城)과 더불어
서울 동쪽을 담당한 요새로, 전형적인 조선시대 산성 중 가장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6.25 전란 등으로 다소 훼손되기도 했지만, 제5공화국 시절 박정희 전 대통령이 두 차례 찾은 것이 계기가 되어
일찍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거의 완벽한 모습을 되찾고 있다.
성벽에 올라서면 가파른 산 아래로 치욕적인 화친을 맺은 송파구 삼전동 일대와 유유히 흐르는 탄천이 손바닥처럼 내려다보이고
멀리 굽이쳐 흐르는 한강을 따라 남산과 63빌딩 사이로 한강하구가 아득하게 이어지며 서울 전역이 한눈에 들어온다.
지하철 8호선 남한산성역에서 성안까지 마을버스가 이어져 접근이 편리할 뿐만 아니라
성책을 따라 걷는 길이 부담 없이 완만해 한나절 나들이 길로 더할 나위 없다.
해발 400m에 이르는 산성마을은 사방이 성책으로 둘러싸인 분지 형태를 이루고 있지만
산 아래와 비교해 기온차가 3~4도까지 내려가기도 해, 선들선들 스치는 바람결이 한결 상쾌하다.
복정역 사거리에서 남한산성역 삼거리를 거쳐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길은 성안을 관통해 광주~ 하남 간 산업도로와 이어져 승용차로는 멋진 나들이코스를 엮어내고
마을버스로 올라 수어장대를 거쳐 송파구 오금동과 강동구 천호동으로 내려서는 산행길은 1시간대로 크게 무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