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산 화양동의 청풍명월
괴산 화양동의 청풍명월
물과 산, 바위의 조화가 아름다운 화양계곡 운영담
충청북도가 “청풍명월(淸風明月)의 고장”이라면, 그 한복판에 위치한 괴산(槐山)은 “산고수청(山高水淸)의 고을” 이다.
즉 백두대간의 허리를 떠받치는 준봉들이 경상도와 경계를 이루며 웅장하게 솟아있고
그 산자락과 골짜기를 굽이쳐 흐르는 계류는 거울처럼 맑은데 특히 괴산군 청천면의 화양동 계곡은 산고수 청한 괴산을 대표할 만한 절경이다.
넓고 깨끗한 너럭바위와 맑은 계류, 우뚝하게 솟은 기암절벽과 울창 한 숲이 한 폭의 진경산수처럼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우암 송시열, 그가 감탄한 화양구곡
일찍이 이중환도 『택리지』에서 “금강산 남쪽에 서는 으뜸가는 산수” 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이곳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조선 중기의 대정치가이자 학자였던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1607∼1689)이 은거한 뒤부터였다.
화양동 계곡에서도 특히 경치가 빼어난 아홉 군데를 통틀어 화양구곡(華陽九曲)이라고 하는데 경천벽
운영담, 읍궁암, 금사담, 첨성대, 능운대, 와룡암, 학소대, 파곶이 그 곳이다.
그리고 그 이름을 지은 이는 우암의 제자였던 권상하(1641~1721)다. 그 중 2곡인 운영담은 맑은 물에 구름의 그림자가
비친다는 뜻으로 주자(朱子)의 “천광운영(天光雲影)”이라는 시구에서 따왔고 3곡 읍궁암은 효종의 제삿날에 우암이 엎드려 통곡했던 바위라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우암이 책을 읽고 정진했던 금사담
물 속에 금빛 모래가 깔려 있는 4곡 금사담은 화양구곡의 여러 절경 중에서도 가장 풍광이 아름답다.
더욱이 물가의 우뚝한 바위 위에는 우암이
책을 읽고 정진하는 독서재(讀書齋)였던 암서재(巖棲齋)가 옛 모습대로 올라앉아 있어 우암의 자취를 더듬는 이들에겐 더없이 반갑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이 아담한 기와집은 효종 6년(1655)에 처음 세워진 이래로 수차례 중수를 거듭했다고 한다.
건물 뒤쪽에는 괴석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고, 앞쪽으로는 시야가 훤히 열려 있어 화양동계곡의 아름다운 풍광을 한눈에 감상할 수가 있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누마루에 앉아서 화양동의 수려한 풍광을 바라보노라면 300여년 전 우암의 포부와 풍류가 오롯이 느껴지는 듯하다.
역사 속, 우여곡절을 겪은 화양서원
우암이 죽은 뒤 이곳 화양동에는 그를 배향한 화양서원이 세워졌는데 한동안 조선에서 가장 위세가 당당했다.
당시 노론계의 우두머리였던 우암 송시열의 은거지에 세워진 서원인데다 인근에 명나라 신종(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군을 보내준 임금)과
의종(명나라의 마지막 임금)의 위패가 봉안된 만동묘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만동묘라는 묘명은 화양동의 5곡인
첨성대의 암벽에 새겨 진 선조의 친필 “만절필동(萬折必東)- 황하는 아무리 곡절이 많아도 반드시 동쪽으로 흘러간다)” 에서 따왔다.
이 말은 주로 충신의 절개는 결코 꺾을 수 없음을 상징할 때 쓰는 말로, 곧 명나라에 대한 조선의 “신하 된 도리” 는 결코
그만둘 수 없다는 의미이다. 병자호란을 겪은 지가 얼마 안된 당시에는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과 복수심이
크게 고조되어 있던 터라, 만동묘를 등에 업은 화양서원의 처사는 무조건 옳다며 모두들 머리를 조아리게 되었다.
‘화양묵패’라는 그늘진 역사가 담겨있는 화양서원
그러자 나날이 방자해진 화양서원의 유생들은 이른바 “화양묵패(華陽墨牌)”를 발행해 관리와 백성을 불문하고 갖은 수탈과 횡포를 일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