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을 사로잡은 한국 민요 경기아리랑
지구촌을 사로잡은 한국 민요 경기아리랑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민요 중 하나가 아리랑이다.
아리랑에는 강원도아리랑, 정선아리랑, 밀양아리랑, 진도아리랑 등이 있다.
아리랑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리랑(我離郎)’이나 신라의 ‘알영비(閼英妃)’, 밀양의 ‘아랑(阿娘)’이라는 인물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지만, 정확한 문헌을 찾을 수 없어 딱히 한 가지로 응축되지 못하는 실정이다.
경기아리랑의 본류인 ‘구조아리랑’은 두 줄 시로 구성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 가사 한 줄이 3∼5음보로 짧고 간결하기 때문에 암기하기 쉽고, 따라 부르기도 좋다.
아리랑을 부를 때는 민족의 역사성이나 개인적인 애환과 설움이 반영되기 쉽다.
아리랑에는 민족 공동체적 정서가 담겨 있기도 하지만, 개인적인 애환을 표현할 때도 널리 불린다.
경기 지방의 향토적 색채와 서울 지역의 창법이 혼재한 경기아리랑(혹은 서울아리랑)은 다른 아리랑과 구별하기 위해 ‘본조아리랑’이라 부르기도 한다.
경기아리랑은 세마치장단이라서 다른 아리랑에 비해 유창하고 명랑한 느낌을 준다.
경기아리랑이 대중화되기 전 서울 지역에서는 구조아리랑이 불렸다.
이것은 경복궁 중건 때 불리던 아리랑이다.
대원군이 궁궐 건축을 위해 백성들에게 원납전을 거둬들이자, 가혹한 조세의 부담에 힘겨운 백성들은 아리랑을 불렀다.
구조아리랑은 정선아리랑에 그 기원을 둔다.
궁궐 중건에 사용되는 목재가 정선에서 한강으로 옮겨질 때 뗏목을 타고 온 인부들이 정선아리랑을 불렀고, 이후 서울 사람들은 정선아리랑을 서울식으로 변주해 부르기 시작했다.
경기아리랑은 1926년 나운규 감독이 제작한 영화 <아리랑>을 통해 본격적으로 확산됐다.
영화 속의 아리랑 가락은 식민지 시대를 사는 우리 민족이 울분을 토로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해줬다.
영화 마지막에 흐르는 주제가 아리랑 역시 한민족의 정서가 담겨 있어 영화는 큰 흥행을 거뒀고, 전 국민이 아리랑을 애창했다.
나운규 감독은 그동안 구전되던 아리랑을 처음으로 녹음해 아리랑의 체계를 정립했다.
외국인에게 잘 알려진 아리랑도 당시의 곡조다. 아리랑은 1930년대 이후 급속도로 대중가요화의 길을 걷는다.
전통적인 아리랑에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이 가미되어 경기아리랑은 대중적인 신아리랑(혹은 신민요 아리랑)으로 잇따라 변천되었다.
아리랑이 전통 민요에서 신민요로, 다시 대중가요로 재탄생하며 널리 애창된 이유로는 아리랑에 담긴 민족적 정서, 가사와 곡조가 주는 단순성을 들 수 있다.
우리 민족은 슬플 때나 기쁠 때 아리랑을 부르며 함께 공감했다.
이제는 지구촌 주민들도 아리랑하면 한국을 떠올리곤 한다.
경기도 과천에 있는 경기소리전수관에서는 경기도무형문화재 31호로 지정된 경기소리를 널리 보급하기 위해 국악 강좌를 개설했다.
예부터 과천에는 국악의 명인이 많았다. 그중 일제강점기에 ‘대동가극단’을 창단해 전국 순회공연을 펼친 임종원이 있다.
임종원의 증손녀 임정란 명인은 경기소리 보유자다.
임정란 명인이 관장으로 있는 경기소리전수관은 국악 강좌를 통해 경기소리의 정통성을 되살리는 데 힘쓰고 있다.
경기민요 강좌는 초급부터 중급, 직장인은 물론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과 어린이들이 엄마와 함께하는 국악 배우기 과정까지 다양하다.
경기소리 이수자가 진행하는 수업은 우리 소리를 제대로 배우려는 열기로 활기차다.
강사가 장구를 치면서 먼저 소리를 들려준다. 칠판에는 아리랑의 가사와 추임새가 꼼꼼하게 적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