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대의 왕실 사찰로 떠나는 시간 여행 양주 회암사지

조선 최대의 왕실 사찰로 떠나는 시간 여행 양주 회암사지

조선 최대의 왕실 사찰로 떠나는 시간 여행 양주 회암사지

조선 최대의 왕실 사찰로 떠나는 시간 여행 양주 회암사지

조선 불교의 흥망성쇠 현장으로 양주 회암사지

한때 번성했으나 어느새 절집도 스님도 사라지고, 세월이 흘러 주춧돌과 유물만으로 존재를 증명하는 옛 절터.

폐사지를 떠올리면 어쩐지 쓸쓸하고 아련하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폐사지를 찾아가는 여행은 시간을 거슬러 전혀 다른 세상과 그곳에 산 사람, 그들의 꿈을 만나는 독특한 경험이다.

과거의 어느 한때로 걸어 들어가, 퍼즐 조각 맞추듯 역사의 장면을 재구성해보자.

경기 북부의 유서 깊은 고장 양주에는 고려 중기에 지어져 조선 중기에 폐사된 것으로 추측되는 회암사지가 있다.

창건 연대도, 언제 어떻게 폐사되었는지도 정확히 알려진 바 없지만 관련 기록과 건축양식, 출토 유물로 미루어 조선 최대의 왕실 사찰이었으리라 짐작한다.

조선은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은 국가이다 보니 유생들의 반발이 거셌지만, 회암사는 왕실의 후원을 받으며 오랫동안 위세를 떨쳤다.

특히 태조 이성계는 스승으로 모시던 무학대사를 회암사 주지로 보내고 자주 찾았으며, 왕위에서 물러난 뒤 이곳에 머무르며 수행하기도 했다고 알려진다.

회암사 창건 시기를 고려 중기로 보는 근거는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이다.

조선 성종 때 간행된 지리지 《동국여지승람》 권2에는 고려 명종 4년(1174) 금나라 사신이 회암사에 다녀갔다고 나온다.

한편 이색의 《목은집》에 실린 <천보산회암사수조기>에는 회암사의 건물 구조와 배치 상황이 자세히 묘사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회암사는 건물이 260여 채에 달하는 사찰이었다.

넓은 절터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대와 박물관에서 절의 규모와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속속들이 볼 수 있다.

회암사지박물관 1층에는 <천보산회암사수조기>를 바탕으로 복원한 회암사 모형이 있다.

이 모형과 재미있는 영상으로 회암사의 역사와 가치를 알기 쉽게 보여준다.

사찰 건축양식을 따르면서도 정치적인 공간을 결합한 건물 배치는 회암사를 왕실 사찰로 보는 증거 중 하나다.

남북으로 층층이 단이 있고 남쪽에 회랑을 둔 점은 고려 시대 궁궐 건축양식과 같다.

또 남북 축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이 되도록 건물을 배치하되, 가장 북쪽의 정청과 동방장, 서방장은 궁궐의 편전과 침전 형식을 적용했다.

보광전을 포함한 주요 건물 앞에는 의식과 경연 공간인 월대가 조성되었는데, 이는 경복궁 근정전이나 창덕궁 인정전 같은 궁궐의 중심 건물에서 볼 수 있는 양식이다.

발굴된 유물 중에도 이런 추측을 뒷받침하는 것이 많다.

보광전 주변에서 출토된 청동금탁에는 태조 3년(1394) 조선 국왕과 왕현비, 세자 등 왕실 인물이 회암사 불사를 후원한다는 명문이 새겨졌다.

또 궁궐 지붕에 올리던 토수나 잡상 같은 장식 기와, 불교와 무관한 용이나 봉황이 새겨진 기와

궁궐이나 왕실 원찰 일부 건물에 사용된 청기와, 왕실용 백자 등이 회암사와 조선 왕실의 관련성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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