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산재 기암절벽 아래 신비로운 절터 합천 영암사지
모산재 기암절벽 아래 신비로운 절터 합천 영암사지
삼국시대부터 고려 때까지 융성한 불교는 많은 문화유산을 남겼다.
하지만 숭유 억불의 기치를 내건 조선이 들어서면서 많은 절집이 사라지는 비운을 겪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절집이 있는 반면, 한 시대를 풍미한 절집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절터도 있다.
합천 영암사지(사적 131호)는 우리나라에서 내로라하는 절터다.
영암사지의 든든한 배경이 되는 모산재는 기우제를 지내던 정상의 무지개 터에 사계절 물이 고여 신령스러운 바위산이란 뜻으로 영암산, 묘하게 생겼다고 묘산이라 부른다.
이름에 산이나 봉이 아니라 고개를 뜻하는 ‘재’가 붙어 특이하다.
석축 아래에서 보면 모산재와 영암사지가 잘 어울린다.
영암사지는 신비롭고 비밀이 가득한 절터다. 절집의 창건 내용은 전혀 없고, 내력에 대한 기록만 일부 남았다.
영암사적연국사자광지탑비에는 고려 현종 때(1014년) 적연선사가 지금의 가회면인 가수현에서 83세로 입적했다는 내용이 나오고
강원 양양의 선림원지에서 출토된 홍각선사비 조각에 ‘영암사’라는 이름도 보인다.
금오산 자락에 세워진 선봉사 대각국사비에는 천태종 5대 사찰로 원주 거돈사, 진주 지곡사, 해주 신광사, 여주 고달사, 가수현 영암사가 기록되었다.
문헌에 남은 기록은 조선 고종 때(1872년) 제작된 삼가현지도에 ‘영암사고지’란 글자와 탑이 표시된 것이 유일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같이 유명한 지리지에도 영암사의 흔적이 없어 이곳을 찾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영암사지를 차례로 둘러보자. 모산재 기암절벽을 품은 영암사지의 풍경은 커다란 석축이 한몫을 한다.
1984년부터 다섯 차례 발굴 조사를 거쳐 금당 터와 서금당 터, 중문 터, 회랑 터 등이 발견되었다.
회랑 터는 경주 불국사나 황룡사지, 익산 미륵사지처럼 왕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절집이었음을 알려주는 단서다.
석축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독특한 돌이 박혔는데, 불국사 석축이나 석굴암에 있는 쐐기돌처럼 석축이 무너지지 않게 한다.
금당 터의 석축도 특이하다. ‘ㅜ’형으로 가운데가 튀어나오게 석축을 쌓고, 이 부분에 쌍사자 석등이 앉아 있다.
또 튀어나온 석축 사이로 금당에 오르는 돌계단을 양옆에 놓았는데, 돌을 휘게 깎은 뒤 디딤돌 형태로 만들기 위해 다시 깎았다.
돌을 떡 주무르듯 한 선현의 지혜와 공력이 돋보인다.
석축 위에 금당 기단을 쌓고 목재로 건물을 지었겠지만, 지금은 돌로 만든 기단과 주춧돌이 남았을 뿐이다.
기단에 다양하고 아름다운 문양을 새겼는데, 금당을 돌아보며 하나씩 찾는 재미가 쏠쏠하다.
자르지 않은 식빵처럼 생긴 ‘안상’ 문양, 앞면과 좌우 양면에 각각 다른 사자 문양이 있다.
언뜻 보면 위엄 있는 모습이지만, 어떤 사자는 삽살개를 닮아 귀엽다.
금당으로 오르는 계단 난간에는 사람 머리가 달린 상상의 새(가릉빈가)가 새겨졌다.
영암사지를 대표하는 유물은 석축에 당당하게 선 쌍사자 석등(보물 353호)이다.
우리나라에 남은 쌍사자 석등은 모두 5기다.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 국립광주박물관에 있는 광양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 합천 영암사지 쌍사자 석등이 통일신라 작품으로 손꼽힌다.
영암사지 쌍사자 석등은 꼬리가 아름다운 사자 2마리가 마주 보며 화사석을 받치고 있다.
작지만 다부진 사자 형상 사이로 영암사지 삼층석탑(보물 480호)이 보인다.
사자상 위아래로 아름다운 연꽃이 조각되었고, 불을 밝히는 화사석에 사천왕상이
석등을 받치는 팔각 지대석에 동물 문양이 새겨졌으니 석등의 문양을 하나씩 살펴보자.
금당 터 뒤쪽에는 서금당 터가 있다.
건물터 좌우로 영암사의 사격(寺格)을 높인 승려의 탑비인 듯한 귀부 2기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