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불교의 흥망성쇠 현장으로 양주 회암사지
조선 불교의 흥망성쇠 현장으로 양주 회암사지
한 나라가 망하고 새로운 나라가 생기는, 200년이라는 시간의 한 가운데 있던 절이 있다. 절은 부처님의 힘을 필요로 하는 인간을 도와 권력을 휘둘렀고,
그 힘에 반하는 세력에 의해 불에 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새롭게 세워졌던 그 나라조차 없어진 지금, 이제 절은 빈 터로만 남아 인간의 탐욕이 얼마나 부질없는지를 말없이 보여준다.
회암사는 천보산을 주산으로 삼고 야트막한 안산너머로 불곡산과 삼각산을 조산으로 삼고 있다.
안산 아래로 골재공장과 비닐하우스가 있어서 몰풍정하지만, 맨 처음 터를 잡았을 때의 산천은 변함이 없다. 아늑하고 편안하면서도 기상이 넘친다.
회암사가 정확히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으나, <동국여지승람>에 보면, 고려 명종 4년 (1174년) 금나라의 사신이 회암사에
왕래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12세기쯤 창건된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당시는 작은 규모였을 것이고, 1328년 인도승려 지공대사와 그의 제자 나옹선사에 의해 대사찰로 중창되었다.
고려 말에 목은 이색이 쓴<천보산회암사수조기>를 보면 총 262칸에 전각들로 이루어진 가람은 동방에 제일이며,
법당에는 15척(4.5m)의 불상 7구와 10척(3m)의 관음상이 봉안되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조선 중기에 회암사가 불탄 뒤로 버려졌고, 지금은 흩어진 돌무더기와 주춧돌뿐, 발굴 조사 작업이 한창인 역사현장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나옹의 제자인 무학대사를 회암사에 머무르게 하여 불사가 있을 때마다 대신을 보내 찬례토록 하였으며,
왕 위에서 물러난 뒤에는 친히 회암사에 머물면서 수도생활을 했다.
그 뒤로도 회암사는 조선 왕실과 지속적인 인연을 맺어오다가 명종 때 보우대사가 머물면서 다시 번창하게 된다.
하지만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의 후원으로 기세를 올리던 보우는 문정왕후가 죽은 뒤로
제주도로 유배되어 살해되었고, 문정왕후와 보우에 대한 유생들의 반감이 회암사를 폐사시켰다.
명종실록에는 유생들이 회암사를 불 지르려 한다는 기록이, 선조실록에는 회암사 옛터에 불탄 종이 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렇게 명종과 선조 사이, 전국 제일의 수선도량(修禪道場)이었던 회암사는 그 운명을 다하였다.
회암사는 조선 유교와 불교의 극명한 대결 현장이었던 셈이다.
폐사지 맨 앞쪽에 있는 사각기둥 당간 지주를 쓸어보다가,
폐사지 가장 안쪽에 있는 우람한 부도탑을 살펴본 뒤 무학대사(1327-1405)의 부도가 있는 산중턱을 올라갈 수도 있다.
그런데 먼저 천보산 산자락을 살펴보고 폐사지를 멀리서 바라보면, 폐사지 좌우로 팔걸이 같은 언덕이 길게 뻗어내려 있음을 볼 수 있다. 소위 좌청룡 우백호다.
좌청룡에 끝자락에는 무덤 한 기가 얹혀 있는데, 무덤의 후손들은 그곳이 명당이라고 본 듯하다.
회암사지에서 천보산 정상 쪽으로 700m쯤 올라가면 또 하나의 회암사가 나온다.
1828년에 경기지방 승려들이 신축한 것이다. 이 절 옆에는 회암사를 중창했던 지공과 나옹의 부도가 있고, 이성계를 도왔던 무학대사의 부도가 있다.
천보산 자락이 흘러내린 혈처(혈이 맺히는 곳)에 무학대사의 부도가 있다.
좌청룡 우백호가 있고, 명당수가 바로 앞으로 흘러가고 있는 무학대사의 부도 뒤쪽으로 지공과 나옹의 부도도 있다.
나옹선사가 회암사를 262칸의 대찰로 중창했을 때, 전국 각지 신자들이 회암사로 몰려들었다.
고려 왕실은 나옹선사의 영향력이 너무 커질 것을 우려하여 나옹선사를 경상도의 외진 절로 옮겨가도록 했다.
하지만 나옹선사는 남한강을 따라 경상도로 내려가다가 병을 얻어 여주 신륵사에 머물다가 입적했다.
하여, 신륵사에 나옹선사의 부도와 이색이 쓴 부도비가 있는데, 회암사의 제자들은 나옹선사를 기리기 위해 회암사에 또 하나의 부도를 세운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