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 선바위와 남이포 역적이 된 남이장군이야기
영양 선바위와 남이포 역적이 된 남이장군이야기
쉼표가 있는 농촌 숲 속 여행 지리산의 너그러움에 물드는 하동 여행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지 중의 오지, 바로 영양이다.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굽이굽이 국도를 타고 한참을 들어가야 하는 영양은 여행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꿈꾸었을 법한 아름답고 청정한 고장이다.
일월산자락의 성스러운 분위기와 밤이 되면 쏟아져 내리는 무수한 별빛이 오염되지 않은 영양의 모습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산촌마을의 외롭고 맑은 분위기는 하루 밤 묵어가고 싶은 간절함을 꿈꾸게 만들어준다.
이 아름다운 영양에 조선시대 풍운의 꿈을 안고 스러져간 남이장군에 대한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남이장군의 설화가 얽힌 영양을 여행하며 교과서여행지로서 영양의 매력을 만끽해 보도록 하자.
조선 세조 13년, 이시애의 난이 발발되었다.
이시애는 원래 함길도 길주의 지방토착 세력으로 세조 치하에 토호들의 세력이 약화되자 강한 반발심을 품게 되어 난을 일으킨 인물이다.
이시애는 난을 일으키기 전 함길도 전역에 흉흉한 소문을 퍼트려 민심을 어지럽혔고, 민심이 흉흉해지자 함길도 절도사 강효문을 죽이며 난을 일으켰다.
초반에 이시애의 난은 굉장한 반응을 불러일으키며, 순식간에 수많은 고을 수령들이 피살되었고 왕을 신뢰하지 않았던 백성들은 이시애의 휘하에 속속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세조는 이 난을 잠재우기 위해 의외의 인물을 중용했는데, 그 인물이 스물여섯의 조카 구성군과 남이장군이었다.
구성군과 남이장군은 이시애의 난을 멋지게 해결해 조정의 중요 인물로 전면에 설수 있게 되었고, 세조는 이들의 공을 치하하는데 그치지 않고 실제 인사를 단행하기에 이른다.
큰 공을 세운 스물여섯의 구성군을 영의정에, 역시 젊은 남이장군을 병조판서에 임명한 것이다.
조정대신들은 강하게 반발했으나 세조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다.
당시 한명회나 신숙주와 같은 구공신들은 이미 너무나 강한 권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시애의
난을 계기로 공을 세운 젊은 신진들의 힘을 함께 키워주기 위한 세조의 생각이 반영된 결과였던 것이다.
세조가 이와 같은 개혁을 단행한 이유는 악화된 세조의 건강 때문이었다.
세조의 뒤를 이을 예종이 권력의 균형을 갖춘 세력을 이끌기를 원했던 것이다.
세조는 이와 같은 개혁을 단행하고 얼마 있지 않아 숨을 거두었다.
세조가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했던 구성군과 남이장군 중 구성군은 신중하고 사려 깊은 성격으로 조정신료들의 지지를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남이장군은 나서기를 좋아하고 겸손하지 못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구공신들을 무시하고 뻣뻣하게 구는 남이장군을 조정신료들이 곱게 봐주기 만무했다.
남이장군을 총애하던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하자마자 남이장군에 대한 신료들의 상소가 빗발쳐,
예종은 즉위한 당일 바로 남이장군을 좌천시켰다.
이에 남이는 자신을 좌천시킨 조정 신료들에게 불만을 품게 되고 역시 자신처럼 세조 시절 총애를 받았던 유자광을 찾아가 그의 심정에 대해 토로하게 되었다.
그러나 유자광은 남이를 만나고 난 뒤 바로 대궐로 들어가 남이 장군이 역심을 품었다고 고변을 했다.
유자광은 남이의 역심을 고변하는 자리에서 남이가 쓴 시를 바꿔치기 하여 ‘나이 스물에 나라를 얻지 못하면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하리요.
‘라는 시구절로 예종의 마음을 흔들었다고 한다. 남이 장군은 결국 역적의 혐의를 받아 처형당했다.
실록에 기록된 대로 그가 정말로 역심을 품어 반란을 꾀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백성들은 젊은 나이에 큰 칼을 휘두르며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민심을 잠재웠던 훌륭한 장수 남이의 죽음을 안타깝게 생각했다고 한다.
억울하게 죽은 영혼은 무당이 신으로 모시는 경우가 많아, 남이장군을 몸주로 모시는 무당들이 남이장군의 죽음 이후에 많이 생겨났다고 한다.
백성들 사이에도 남이장군의 용맹함에 대한 이야기들이 전설처럼 전해지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영양의 선바위와 남이포에도 억울하게 죽은 남이장군의 전설이 서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