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 죽서루와 천은사 원시림이 들려주는 이야기 속으로
삼척 죽서루와 천은사 원시림이 들려주는 이야기 속으로
남한산성 왕은 백성을 버려도 요새는 남아 이 땅을 지킨다
‘유난히도 더운 여름’ 이라는 말은 매년 나오는 말이라 하지만, 역시 올해도 ‘이번 여름’은 가장 덥다.
연일 30도가 넘는 더위에 지쳐갈 때쯤, 머릿속에는 바다, 숲, 바람… 이들에 대한 열망이 떠나질 않게 된다.
더위를 피해서라면 어디든지 갈 수 있겠다싶을 때, 강원도 삼척은 말만 들어도 왠지 시원한 산 속 바람이 부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동안 산골 중에서도 산골로만 여겨졌던 강원도 삼척은 아직 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닿지 않아 천혜의 자연환경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보석 같은 여행지이다.
태백산맥의 험산준령과 맑고 푸른 동해바다를 모두 아우르고 있을 뿐 아니라 너와집, 굴피집 등의 민속유물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다.
말 그대로 “산 좋고 물 좋은” 곳이니, 발길 닿는 곳곳마다 절경이다.
그러니 삼척 땅의 역사유적을 더듬는 답사 길은 때 묻지 않은 자연 속으로의 여행이라 할 수 있다.
푸른 동해바다와 향긋한 솔 숲, 그 속에 숨어있던 깊은 산골마을의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들으러 삼척으로 떠나보자.
삼척의 문화유적을 찾아가는 길이라면 으레 삼척시의 서편을 흐르는 오십천(五十川)이 내려다보이는
절벽에 자리 잡고 있는 죽서루(보물 제213호)를 맨 먼저 둘러보게 된다.
삼척의 대표적인 문화재일 뿐만 아니라 관동 제1경으로 꼽힐 정도로 정취가 그윽한 죽서루는 그 규모와 역사에서도 관동팔경 가운데 으뜸이다.
죽서루는 아름다운 외관과 그곳에 서서 보이는 탁월한 조망 덕분에 사시사철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특히 봄날에는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꽃이 만발하여 누각 주변이 온통 화사한 꽃밭을 이룬다.
죽서루는 창건자와 연대는 미상이나, <동안거사집>에 의하면 1266년(고려 원종 7년)에 이승휴가 안집사
진자후와 같이 서루에 올라 시를 지었다는 것을 근거로 1266년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수차례에 걸쳐서 중건을 거듭했다고 하니, 면면히 이어 온 역사가 자그마치 900여 년에 이른다.
정면 7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누각인 죽서루의 특징은 1층과 2층에 세워진 기둥의 수와 길이가 서로 다르다는 점이다.
애초부터 기둥이 세워질 자리에 솟은 자연석을 굳이 깨뜨리거나 다듬지 않은 채 초석으로 삼았기 때문인데,
자연과의 조화미를 중요시했던 조선 건축의 전통을 엿볼 수 있다.
2층의 누마루는 벽체나 창호 하나 없이 시원스레 트였다.
덕분에 누마루가 더욱 넓어 보일 뿐만 아니라, 난간에 걸터앉으면 사방의 풍광이 거침없이 시야에 들어온다.
천변(川邊)인데도 해안절벽 위에 올라앉은 어느 누정 못지않게 조망이 활달하다.
죽서루에서 자동차로 20~30분 거리의 두타산 기슭에는 이승휴가 은거했던 천은사 (天恩寺)가 있다.
높고 험준한 두타산의 동쪽자락에 자리 잡은 천은사는 신라 경덕왕 17년(738)에 두타의 세 신선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처음에는 백련대라는 작은 암자였으나, 고려 충렬왕 때에 이승휴가 절을 중수하고 이름은 간장암으로 바꿨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서산대사에 의해 흑악사로 바뀌었다가 다시 1899년에 미로면 활기리에 준경묘(태조 이성계의 5대조인 이양무 장군의 묘)를 만들면서
이곳을 원찰(願刹)로 삼고 천은사로 고쳐 불렀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에 모든 건물이 소실되어 명맥만 유지해오다가 지난 1984년부터 건물들이 하나 둘씩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런 내력 때문에 오늘날의 천은사에서는 사실, 고찰다운 면모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그런데도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것은 아담한 계곡과 울창한 숲에 둘러싸인 절주변의 풍광이 수려하기 때문이다.
또한 고려시대 문신 이승휴가 오랫동안 은둔하며 『제왕운기』를 저술한 곳으로서의 역사적인 의의가 있어 옛 선조의 우리 민족에 대한 자긍심을 되새겨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