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양아산 충무공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도시

온양아산 충무공의

온양아산 충무공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도시

온양아산 충무공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도시

서천 희리산해송자연휴양림 캠핑장 솔숲에서 休

수도권에서 이어지는 전철이 온양을 통과하게 되면서 온양역 주변이 수도권에서 당일치기로 떠날 수 있는 여행지로 주목받고 있다.

특히 온양역에서 온양의 이름난 관광지 현충사까지 도보여행으로 즐길 수 있는 코스 및 신정호수 주변 산책길도

만들어지면서 온양은 겨울철 웰빙 여행지로 손색없는 훌륭한 여행지로 탈바꿈하고 있다.

온양역에서 내리면 가장 먼저 시티투어버스 탑승장과 안내부스를 만날 수 있는데, 대중교통으로 온양을 여행하는 분들에게 희소식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세리 성당

공세리 성당을 부르는 말은 많다. 국가에서 보존하고 있는 오래된 나무를 가진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

120년 전통을 가진 세련된 고딕양식의 전통적인 성당, [미남이시네요], [사랑과 야망], [태극기 휘날리며]

[수녀 아가다] 등 수 많은 영화와 드라마를 촬영했던 촬영지, 그리고 내포 지방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순교하신 32분의 순교자들을 모신 성당 등이 그것.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성당인 만큼 성당 속에 숨어있는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성지박물관 안에는 공세리 성당을 처음 만든 프랑스 신부 드비즈의 유품과 내포지방 순교의 역사가 생생하게 증언되어있으니

신앙을 가진 관광객이라면 공세리 성당 안에 있는 십자가의 길을 걸어보고 성지박물관을 방문해보자. 성지박물관 내부 촬영은 금지되어있다.

공세리 성당으로 들어서는 입구에 아주 오래된 돌 성벽이 눈에 띈다.

지금은 아주 일부분만 남아 풀이 무성하게 놓여있는 이 터는 과거 조선시대 조세로 내었던 곡식을 저장하던 공진창이 있던 자리이다.

처음에는 공세 곶창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19세기에 조창제도가 폐지되어 곡식창고는 빈터로 남게 되었다가 프랑스 드비즈 신부에 의해 성당으로 개조되었다.

공세리 성당 근처에 남아있는 돌 성벽은 당시 창고지 주변에 세운 성벽이다.

일부러 시간 내 들를 수 있는 장소는 아니지만, 지나가다가 오래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성벽이 보인다면 공세 공곶이 터임을 기억해보자.

현충사는 이순신 장군께서 혼인하여 사셨던 옛집을 중심으로 이순신장군의 사당이 있는 곳이다.

옛집 앞으로는 우리가 위인전에서 자주 읽었던 어린 이순신이 무예를 연마하던 활터가 자리 잡고 있다.

이순신 장군은 이곳 활터에서 밤낮으로 무예를 연마하여 그의 나이 서른두 살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이곳에서는 국궁체험을 할 수 있긴 하나, 국궁은 시위를 당기는 아귀힘이 많이 필요로 하는 운동이기 때문에 어린이들은 체험하기 힘들다.

현충사 영역 안에는 이순신 장군의 옛 집터뿐만 아니라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도 있다.

기념관 내부에는 충무공 이순신에 대한 모든 것들이 자세하게 전시되어있는데 국보 및 보물급 유물들이 다수 전시되어있어 눈길을

이순신 장군에 친척들에게 그리는 정을 모아 보낸 서간첩(국보 제76호)과 남해를 호령했던 충무공 장검(보물 제326호)은 단연 눈에 띄는 유물이다.

영상관에서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해전이었던 노량해전을 입체영상으로 감상할 수 있다.

국내에서 가장 훌륭한 민속박물관 중 한군데로 꼽히는 곳이다.

아동문학서적 ‘계몽사’를 만들고 경복 안동에 길원여고를 세우신 김원대 선생이 건립한 박물관으로, 체계적이고 수준 높은 민속자료들이 알차게 전시되어있다.

국립박물관이 아니기에 국보 및 보물급 문화재들은 수를 헤아리기 힘들지만, 소박하며 아름다운 삶을 살았던 조상들의 삶의 향기를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야외 전시공간도 아이들에게 배움을 제공해주기에 풍부한 알찬 전시물들이 배치되어있으니, 꼭 관람해보자.

매표 후 해설을 들으시려면 뮤지엄 까페에서 안내를 받으면 된다.

온양 민속박물관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전시품 중 하나는 옥미투리. 볏짚의 둘째, 셋째 마디만을 가지고 짠 고운 여인의 미투리이다.

곱고 섬세한 모양새가 서민들이 신는 짚신의 느낌에서 한 단계 더 고급스럽게 느껴진다.

비록 짚으로 만들었지만 양가댁 규수들이 신던 가죽 꽃신처럼 날렵하고 아름다운 모양새인 것으로 보아, 우리네 백성이 얼마나 아름다움을 추구한 민족이었는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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