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원도심에서 즐기는 흥미진진 스토리텔링 투어

강화 원도심에서

강화 원도심에서 즐기는 흥미진진 스토리텔링 투어

강화 원도심에서 즐기는 흥미진진 스토리텔링 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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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에 있던 고려의 궁궐은 왜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까? 강화도령은 어떻게 조선의 왕이 되었을까?

병인양요를 일으킨 프랑스는 왜 규장각을 약탈했을까? 왜 영국 선교사는 한옥으로 성당을 지었을까?

강화도에는 왜 그렇게 많은 직물공장이 있었을까? 강화도를 여행하다 보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궁금증이 이어진다.

강화 읍내에서 매일 진행하는 원도심 스토리워크에 참여하면 이 모든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다.

각 시대별 주요 사건의 배경이 된 강화도에서 역사의 핵심적인 장면을 만나보자.

강화도는 선사시대부터 근현대까지 강화 원도심에서 시대별 굵직한 사건이 벌어진 역사의 현장이다.

고려 고종 19년(1232년)에는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도읍을 강화도로 옮겨 원종 11년(1270년)까지 지내기도 했다.

천연의 요새인 강화도가 38년간 고려의 도성이 된 셈이다.

고려의 궁궐이 있던 터 주변에 철종이 살던 집 용흥궁과 성공회에서 세운 한옥 성당이 있다.

강화도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던 심도직물의 굴뚝과 이화직물 담장도 남아 있다.

반경 500m 안에 주요 볼거리가 모두 모여 있어 걸어서 둘러볼 수 있다.

이곳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여행하는 방법은 ‘강화 스토리워크(원도심 도보해설)’에 참가하는 것이다.

고려의 옛 도성에서 걸어서 즐기는 스토리텔링 투어다

강화도 역사에 해박한 전문 해설사가 동행해 각 여행지의 역사와 잊혀진 이야기를 자세하게 들려준다.

강화 스토리워크 코스는 용흥궁에서 시작된다. 이어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3.1운동기념비, 고려궁지, 노동사목 표지석, 이화직물 담장길,

김상용순절비, 심도직물 굴뚝을 차례로 둘러본다. 시간은 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철종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강화 소창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등 미처 몰랐던 것 혹은 잘못 알았던 것들을 투어가 진행되는 동안 제대로 알게 된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표현처럼 그냥 스치고 지났을 유적들이 의미 있게 다가온다.

용흥궁은 조선 제25대 왕 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살았던 집이다. 많은 이들이 철종이 강화도에서 태어나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는 태어나 14살까지 한양에서 살았다. 강화에서 산 세월은 5년에 불과하니 강화도령이라기 보다는 한양도령이라는 게 맞다.

강화에는 용흥궁 외에도 철종과 관련된 장소가 여러 곳이 있다.

철종의 외갓집이 선원면에 남아있는데 철종은 읍내에서 남산을 넘어 외가에 가곤 했다.

가는 길에 들렀다는 남산 기슭의 청하동 약수터, 찬우물 약수터도 있다.

청하동 약수터에서 강화도 처녀 봉이와 처음 만나 사랑에 빠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철종의 가슴 아픈 이야기를 뒤로하고

몇 걸음만 걸으면 바로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이 모습을 드러낸다.

성당이지만 마치 사찰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실제 성공회는 이 건물을 지으면서 조선 사람들이 친근하게 다가올 수 있도록 토착화에 신경 썼다.

궁궐을 짓던 도편수가 건축을 주도했으며 거의 모든 재료를 국내에서 조달했다.

일주문처럼 느껴지는 외삼문을 통과하면 내삼문과 사찰의 범종 같이 생긴 종, 우람하게 자란 보리수나무가 보인다.

보리수나무와 마주보는 곳에 유교의 상징인 회화나무가 있었는데 태풍 볼라벤에 쓰러져 없어졌다.

1900년에 축성한 본 당 건물 역시 친근하다. 양반댁이나 사찰에 걸린 주련(기둥이나 벽에 세로로 써 붙이는 문구)이 기둥에 붙어 있다.

건물 중앙에는 한자로 ‘천주성전’이라 적힌 현판이 걸려있다. 내부는 바실리카 양식으로 꾸몄다.

당시 국내에서 생산하지 않았던 유리는 수입했고, 민트색의 아치형 문은 영국에서 가져왔다.

동서양이 조화로운 성당 건물은 안팎으로 사진 찍기 좋은 포인트가 많아 여행자들에게 인기다.

1896년에 설립된 강화초등학교를 지나 언덕길을 오르면 바로 고려궁지다.

대몽항쟁을 위해 개성에서 강화로 도성을 옮긴 후 궁궐을 짓고 내성, 중성, 외성까지 쌓아 대항하였으나

몽골과 화친하고 개성으로 환도하면서 몽골의 요구로 궁궐과 성곽을 모두 파괴해야 했다.

허물어졌던 궁궐터에 조선시대 왕이 행차 시에 머무는 행궁을 지었다. 유수부 동헌, 이방청, 외규장각, 장명전, 만녕전 등을 건립했다.

이 또한 병자호란과 병인양요 때 대부분 소실됐다. 지금은 동헌과 이방청, 외규장각(2003년 복원)만이 남아 있다.

유수부는 옛 도읍지에 설치된 관서로 개성, 전주, 강화, 광주, 수원 등에 설치된 지방관청이다.

특히 좁은 해협을 끼고 있는 천연의 요새인 강화유수부는 한양을 방어하기 위한 성격이 강했다.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인조가 강화로 피난하였고, 병자호란 때에는 세자빈과 왕자들이 강화로 몸을 피했다.

유수는 지금으로 치면 도지사에 해당하는 직책이었는데 한양에서 비변사 회의가 열릴 때 강화유수가 참석 못하면 회의를 열지 못할 정도로 중요한 자리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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