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과에 예술혼을 불어넣다 한과명장 김규흔

한과에 예술혼을

한과에 예술혼을 불어넣다 한과명장 김규흔

한과에 예술혼을 불어넣다 한과명장 김규흔

조안면 다산유적지와 다산생태공

한과는 우리의 전통 과자다. 손님을 대접하는 다과상이나 주안상은 물론, 생일과 혼례, 제사 등 의례 상차림에 빠지지 않은 음식이다.

찹쌀가루에 콩물과 술을 넣은 반죽을 삶아서 얇게 밀어 말렸다가 기름에 튀긴 다음 쌀 고물을 묻힌 유과

밀가루에 참기름과 꿀을 넣어 만드는 약과, 과일이나 식물의 뿌리 혹은 열매에 꿀을 넣고 조린 정과

녹말이나 송홧가루 등을 꿀로 반죽해 다식판에 찍어낸 다식 등 종류가 다양하다.

해방 이후 경제가 급성장하고 양과자가 보편화되면서 한과는 명절이나 제사 때 필요한 음식으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한과 만들기를 숙명으로 여기고, 한과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인생의 과제로 여기는 이가 있다.

국가 지정 전통 한과 제조 기능 명인이자, 대한민국 한과명장 1호(약과 분야) 김규흔 씨다. 김규흔 명장에게 한과는 아련한 추억이 담긴 음식이다.

60가구 정도가 모여 사는 영덕의 바닷가에서 보낸 어린 시절, 과자는 언감생심이었다.

한과도 제사 때나 명절에 겨우 맛볼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다. 바삭하게 씹히는데다 달콤한 조청 맛이 입안에서 살살 녹았다.

먹거리가 풍성하지 않은 때 먹은 한과는 평생 잊지 못하는 기억이다.

성인이 되어 제약 회사, 섬유 회사를 다닐 때만 해도 한과와 인연을 맺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세 들어 살던 집 아주머니 소개로 지금의 아내를 만났는데, 처가가 한과 공장을 했다.

그 공장에서 일한 것이 한과에 인생을 거는 계기가 되었다.

2년 남짓 한과 공장에서 일하다가, 스물일곱 살 때 월계동 시장 골목에 조그만 한과 공장을 차렸다. 호기롭게 시작했으나 일은 순조롭지 않았다.

당시 한과는 주로 남대문시장, 동대문시장, 경동시장 등에서 도매로 거래되었다.

거래처가 없는 상황에서 동네 시장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판매하는 양은 얼마 되지 않았다.

성실과 실력을 무기로 거래처를 뚫으려 해도 제작원가부터 경쟁이 되지 않았다.

다른 공장은 밀가루 100포와 엿 100통을 도매가로 구입할 때, 김규흔 명장은 밀가루 5포와 엿 1~2통을 소매가로 사서 한과를 만들었다.

장사도 안 되고 재료비도 비싸서 이중고에 시달렸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 없었다.

유년 시절 먹은 한과의 달콤함을 기억하기에 ‘세 살 입맛이 평생 간다’고 믿었다.

맛있는 한과를 만들고 싶은 열망이 컸다. 포기하지 않고 거래처를 찾아다니는 한편,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새로운 한과 개발에 힘썼다.

한과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제품을 개발하는 일은 난감했다. 제대로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어 발로 뛰며 배웠다.

맛있다는 한과를 먹어보고, 잘 만든다는 공장에서 비법을 배우려고 노력했다.

당시 약과의 모양은 천편일률적이었다. ‘남과 같이 해서는 남 이상 될 수 없다’는 신념으로 옛날 방식을 계승하면서 새로운 한과를 개발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연꽃 모양과 마름모꼴 약과를 만들었다. 시장에서 반응이 좋았다. 다른 업체가 모방하면 다시 새로운 모양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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