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영주 무섬마을 물 속에 안긴 선비의 섬
경북 영주 무섬마을 물 속에 안긴 선비의 섬
처음에는 ‘물섬마을’이라 불렸다고 전해진다.
발음상의 이유 때문인지 ‘ㄹ’이 빠지고 무섬마을이 되었다.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에 폭 안긴 자태가 영락없는 물속의 섬이다.
양반도 평민도 모두 함께 공부했다는 조용한 선비의 마을, 무섬마을로 들어서보자.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동해로 향하다 방향을 틀어 중앙고속도로 내려서면 충북 제천과 단양을 지나 경상도 땅에 들어선다.
곧 경북 영주를 필두로 양반의 고장이 시작된다.
영주와 이웃한 봉화 닭실마을과 안동 하회마을은 전국구 양반마을 아니던가. 이웃한 영주에는 그보다 덜 알려졌지만 그래서 더 고즈넉한 양반마을이 있다.
‘양반마을’보다는 ‘선비마을’이 더 잘 어울리는 공간, 삼면이 물줄기에 안긴 무섬마을이다.
양반과 평민 함께 공부하던 육지 속 섬마을
무섬마을을 보면 세 번 놀란다.
우선 마을을 품은 산과 물줄기에 놀라고 그 안에 들어선 고택들에 놀란다.
마지막으로 이 마을이 품은 개방·개혁 정신에 놀란다.
자연환경, 즉 비주얼(Visual)은 물론 멋진 몸매와 정신까지 갖춘 무섬마을에서 안빈낙도의 삶을 꾸려가던 선조들을 만나보자.
중앙고속도로에서 영주IC로 나와 영주시내 초입에서 문수면 와현리 방향으로 향한다.
수도리 전통마을 표지판이 나오면 이를 따라가면 된다. 무섬마을에 들어서려면 수도교를 건너야 한다.
마을 뒤편에 자리한 무섬교도 육지속 섬마을과 바깥세상을 이어주는 통로다.
이들 다리가 놓이기 전, 마을과 바깥을 잇던 것은 외나무다리였다. 마을 주민들은 “외나무다리로 꽃가마 타고 시집왔다 죽으면 그 다리로 상여가 나갔다”고 했다.
무섬마을로 들고 나는 시작과 끝을 보아온 외나무다리는 여전히 무섬마을의 안과 밖을 잇는다.
무섬마을을 감싸 안은 물줄기는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이다.
아예 물 위에 떠 있는 섬은 아니지만 보기에는 ‘물속의 섬’ 같다.
삼면은 내성천 줄기에 안겨있고 뒤로는 태백산 끝자락과 이어진다.
강원도 영월의 청령포를 떠올리면 모양은 비슷하다. 단종의 한(恨)이 건너지 못할 만큼 깊은 물과 도무지 빠져나갈 수 없을 절벽으로 막혔다는 점만 뺀다면.
한문으로도 똑같다. 물수(水)에 섬도(島)를 써서 수도리다.
무섬마을은 경북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에 자리한다. 뭍과 이어진 마을 뒷산은 태백산 줄기, 강 건너에는 소백산 줄기가 스며든다.
태백산에서 이어지는 내성천과 소백산에서 흐르는 서천이 이곳에서 몸을 섞어 ‘물도리동’이라고도 불렸다.
앞산(남산)에 올라 무섬마을을 살펴보면 물줄기에 물줄기가 더해지고 산과 물이 태극모양으로 돌아나간다.
음양의 조화가 좋아 자식이 잘되고 의식이 풍족하다고 해석된다.
또 무섬마을을 두고 물위에 활짝 핀 연꽃 모양의 땅,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고도 한다. 이런 지형에서는 학자들이 많이 배출된다고.
수도교를 건너자마자 좌회전하면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해우당 고택 행랑채에 관광안내소가 있으니 꼭 들르자. 지도도 챙기고 선성 김씨 종손 김광호 선생의 이야기도 들어보자. 무섬마을의 역사는 길지 않다.
“1666년, 현종7년에 반남 박씨가 강 건너 마을에서 이곳으로 분가하러 들어왔어요. 그때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거죠.
그의 증손녀 사위 선성 김씨가 이곳에 정착하면서 두 성(姓)씨 가 모여 사는 집성촌이 되었어요.
해방 전만해도 100여 가구가 넘는 큰 마을이었는데 80여년 전쯤 갑술년 수해라고 큰 홍수가 나서 절반은 손실됐지요.
지금 남은 고택은 43채에요. 사람이 사는 집은 26채 뿐이고요. 독거노인이 많다는 뜻이죠.
평균연령은 78세, 우리 마을에서 60대는 2명 뿐이에요. 청년들이죠. 90은 넘어야 노인대접을 받아요.”
40여 채의 고택 중 30여 채가 조선 후기의 사대부 가옥이다.
반남 박씨 입향시조가 지은 만죽재, 선성 김씨 입향시조가 지은 해우당 등을 포함해 9채가 지방문화재이다.
일제강점기, 김화진 선생이 세운 아도서숙도 빼놓을 수 없다.
아도서숙은 1933년 일제에 강제로 폐숙될 때까지 주민들에게 한글과 농업기술을 교육했던 독립운동의 본거지였다. 고증을 거쳐 복원을 준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