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산 둔율올갱이마을 와일드푸드 체험과 시원한 물놀이를 한번에

괴산 둔율올갱이마을 와일드푸드 체험과 시원한 물놀이를 한번에

괴산 둔율올갱이마을 와일드푸드 체험과 시원한 물놀이를 한번에

먼 추억 연착륙하다 합천영상테마파크

천편일률의 맛집 소개 바람이 한 차례 지나가고, 일류 셰프들의 현란한 요리 대결과 소박한 집밥 열풍이 여전한 가운데

이제는 들에서 직접 먹거리를 수확하고 채집해서 먹는 이른바 와일드푸드 바람이 솔솔 불고 있다.

신토불이, 웰빙, 유기농에 이어 먹거리 트렌드의 끝판왕이 아닌가 싶다.

손톱만 한 올갱이 하나로 10여 년간 마을축제를 일구며 방문객들에게 시원한 체험과 푸근한 추억을 선사하는 괴산 둔율올갱이마을에서 와일드푸드를 체험한다.

그 이름부터 오지의 느낌 충만한 곳 괴산! 하지만 서울에서 2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괴산은 조령, 그러니까 새재를 넘어 영남으로 들어가는 충청도의 마지막 관문이다. ‘둔율’이라는 이 마을의 이름은 유서가 깊다.

삼국시대 한강 유역을 차지하기 위한 교두보이자 근거지였던 괴산-충주 지역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그래서 이 지역은 수시로 그 주인이 바뀌었는데, 삼국통일 후에 이곳에 밤나무를 집중적으로 심었고 그 모습이

마치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듯하다 하여 마을 이름을 ‘둔율’이라고 했다. 삼국통일 때 유래한 마을 이름이 천년을 넘게 이어져오는 것이다.

오늘 체험 가족의 미션은 올갱이마을에서 와일드푸드 체험하기! 가족은 SBS-TV <정글의 법칙>의 출연자들처럼 우선 주변의 먹거리 채집과 수확에 나선다.

7월의 올갱이마을 수확 품종은 옥수수.

먼저 다녀간 가족들에 의해 옥수수밭은 이미 2/3가 수확된 상태였지만, 다행히 밭 끝자락에 늦깎이 체험족을 위한 옥수수가 남아 있다.

수확의 기쁨과 미션 성공을 위하여 뙤약볕을 마다 않고 옥수수밭으로 들어간다.

옥수수 수확의 핵심 포인트는 터프함이다. 옥수수는 한해살이 식물이니 옥수수 줄기가 다칠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다.

크고 실한 옥수수를 골라 비틀고 잡아당겨서 따기만 하면 된다. 여덟 살, 네 살짜리 꼬마 자매도 10분 만에 수확 봉지를 가득 채운다.

뙤약볕을 무릅쓰고 밭에 들어갈 수 있었던 이유다. 하지만 억센 옥수수 잎에 피부가 쓸려 다칠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수확 체험은 계절 체험이다. 옥수수 따기는 7월 체험이고, 6월에는 감자 캐기, 8월에는 고추 따기를 할 수 있다.

가을에는 대추 따기와 벼 베기 체험이 준비되어 있다. 세심한 사람들에 한해 인삼체험도 할 수 있다.

옥수수 수확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이제 이 마을의 테마이자 자랑인 올갱이를 잡으러 마을 앞 달천으로 나간다.

달천은 남한강의 지류로 1급수를 자랑한다. 괴산 사람들은 괴강이라 부른다.

‘올갱이, 그까짓 거 뭐 대충 강바닥에 있는 것 주워오면 되지 않겠어?’ 어림없는 소리다. 올갱이 잡기가 그리 만만치 않다.

큼지막한 수경 밑으로 강바닥을 샅샅이 훑어보지만 올갱이님 뵙기가 쉽지 않다.

‘아니, 올갱이마을이라면서?’ 마음속에서 마을 이름에 대한 불신이 스멀스멀 피어오르지만, 올갱이가 잡히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올갱이는 야행성이기 때문에 밤에는 바위 위에 올라와 있는 올갱이를 쓸어 담을 수 있지만, 낮에는 돌 밑이나 강바닥 속에 들어가 있어 잡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저녁밥상에서 구수한 올갱이국과 쫄깃한 올갱이전을 맛보려면 올갱이를 잡아야 한다.

‘꼭 잡고야 말리라!’ 두 눈을 부릅뜨고 수경 아래로 다시 시선을 고정한다. 몇 개의 돌을 들췄을까? 심봤다!

드디어 돌바닥에 붙어 있는 올갱이 하나를 잡았다. 귀하신 몸, 낮 올갱이 되시겠다.

올갱이 담는 바구니가 가벼워 민망하지만, 너무 실망하지는 마시라. 그런 당신을 위해 어젯밤 마을 분들이 올갱이를 미리 섭외해 냉장고에 잘 모셔 두었다.

먼 추억 연착륙하다 합천영상테마파크

먼 추억 연착륙하다 합천영상테마파크

먼 추억 연착륙하다 합천영상테마파크

통도사 서운암 천년고찰과 자연을 품은 야생화

ㄱ·ㄴ·ㄷ·ㄹ 순으로 된 전화번호 수첩을 펼쳐 번호를 찾고 다이얼을 돌려서 걸었던 전화.

상영시각보다 일찍 가서 줄을 서야만 구할 수 있었던 영화표. 조금은 답답해 보일지 모르는 과거지만, 정겨움과 인간미가 가득했다.

이제는 종이통장도 필수가 아닌 선택인 시대. 광고에서는 작은 기기를 보여주면서 편리하고 혁신적이란다.

작지만 기능도 다양해 일명 만능이다. 하지만,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 사용하기엔 너무 앞선 기술로 채워져 애물단지가 되기도 한다. 광고가 끝나고 70~80년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가 시작된다.

“저 때가 좋았지…”

추억을 찾아 떠나는 여행, 고향이 떠오른다. 하지만 고향도 세월이 지날수록 추억의 장소는 점점 줄어들어 아쉬움이 남는다.

아쉬움을 달래주기 좋은 곳이 합천에 있다. 고향도 아니고 그곳에 추억이 있는 것도 아닌데

대안으로 합천을 권한 이유는 누구나 반가울 옛 기억 하나쯤은 ‘합천영상테마파크’에서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꼭 추억을 회상하러 가는 것이 아니어도 좋다. 그 시절을 모르는 사람에겐 과거로 떠나는 여행이 될 수 있고

영화와 드라마에서 보던 배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으니 또 다른 재미가 있다. 특히 할아버지에서 손자까지 여러 세대가 함께 가면 나눌 이야기가 많을 것이다.

합천댐에서 내려온 물이 황강으로 흐른다. 물길을 5㎞정도 따라가면 강과 산 사이에 자리한 합천영상테마파크가 나온다.

대규모 촬영지는 공통적으로 빌딩 같은 높은 시설물이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조성된다.

이곳 테마파크도 주위 풍경과 세트장 사이에 방해요소가 없다. 합천의 수려한 경관과 촬영지의 색다른 분위기에 집중하기 좋은 조건이다.

합천영상테마파크가 문을 열 수 있게 된 계기는 천만 이상 관객을 동원한 ‘태극기 휘날리며’ 이다.

그 인기가 이곳 촬영지까지 이어졌고, 이에 합천군은 촬영지를 영상테마파크로 조성해 문을 열었다.

간이역처럼 꾸며진 입구에서 표를 구매. 과거행 열차 탑승권을 사는 기분이다.

테마파크에서 처음 눈에 띄는 것이 마침 노면 전차다.

1898년부터 1969년까지 운행된 대중교통수단으로, 부산과 서울에만 있었으며 서울에서는 용산, 노량진, 청량리, 서대문 등 사대문 내부를 두루 순환하는 코스로 운행됐다.

다사다난 했던 그 시절의 이야기를 다룬 영상물에 빠지지 않는 단골이다.

자동차 교통량이 증가하면서 자연스레 과거의 유물이 된 전차를 볼 수 있으니 박물관 같은 느낌마저 든다.

광복 전과 후의 시가지 풍경이 펼쳐진다. 반세기 전에는 이런 곳이 사람들로 시끌벅적한 동네였으리라.

사람과 건물이 참 이질적이다. 입장객은 1950년대로 타임머신을 타고 온 영화 속 주인공처럼 보인달까.

서울역의 원래 모습이 재현됐다.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가 촬영될 때에는 경성역이 되기도 한다.

이 역은 일제 강점기에 만주역과 연결되는 한반도의 철도교통의 중심으로 기능했고, 근대에는 서울에 부푼 꿈을 안고 상경한 젊은이들의 관문이었다. 촬영지에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배경이다.

이처럼 촬영지는 조선총독부, 경교장 등 각 시대의 대표적인 건물과 역사적 사건과 연관이 깊은 건물을 모아 놨다.

둘러보면서 자연스럽게 역사를 훑고 지나가는 셈이다. 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분위기를 짧은 구간 내에 정밀하면서 꼼꼼하게 구성해 자세히 살펴보는 재미가 있다.

세트장 이곳저곳에서 다양한 포즈를 지으며 사진을 찍지만, 유독 한 촬영지에서는 V자로 손가락을 펴기가 어렵다.

마음도 무겁다. 트럭이 엎어져 있고, 자전거는 검게 그을려 찌그러진 바퀴를 위태롭게 달고 있다.

포탄이 떨어진 듯한 건물, 벽에는 총알이 박힌 듯한 구멍이 군데군데 뚫렸고 창문은 성한 것이 없다. 전쟁터를 재현한 세트장의 모습이다.

한해살이풀들만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이곳은 절망, 상처, 슬픔의 공간이다. 배우는 전쟁 속의 한 인물로 연기했을 것이다.

이입된 그 감정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전쟁터 촬영세트장을 지나 이제 출구가 나오겠지 하는 순간, 다른 시대의 세트장이 나온다. 약 7만 평에 걸쳐 형성된 촬영지는 쉽게 끝을 볼 수 없을 만큼 넓다.

약 70~80년대의 서울의 모습이 나온다. 88올림픽이 열리기 전의 서울이라면 적당할 것 같다.

통도사 서운암 천년고찰과 자연을 품은 야생화

통도사 서운암 천년고찰과 자연을 품은 야생화

통도사 서운암 천년고찰과 자연을 품은 야생화

우리네 옛집의 품격

통도사는 국지대찰이자 우리나라 3보 사찰 중 하나인 불보종찰로 꼽히는 명찰로, 서운암은 이러한 유서깊은 사찰의 한 암자이다.

서운암 주변 5만 여평 야산에는 무려 100여 종의 야생화가 지천으로 피어 있는 ‘야생화 군락지’ 이다.

서운암은 이를 시민의 자연학습장으로 활용 중이며, 매년 들꽃축제(제16회째), 문학인축제(제7회째), 천연염색축제(제6회째) 등 다채로운 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통도사는 19개에 달하는 암자가 있으며, 모두 차량으로 접근이 가능하다.

암자의 규모가 큰 편이라 모든 암자를 둘러보기 보다는 암자를 선별해 몇 차례로 나눠 둘러보는 것이 좋다.

통도사는 국지대찰이자 우리나라 3보 사찰 중 하나인 불보종찰로 꼽히는 명찰로, 서운암은 이러한 유서깊은 사찰의 한 암자이다.

통도사의 말사인 서운암은 전통 약된장, 천연염색, 도자삼천불과 장경각 등이 유명하며, 특히 서운암 쪽염은 통도사를

중심으로 계승되어 온 한국의 대표적인 전통 천연염색 방법으로 1990년대 중반 이후 문화강좌를 통해 대중화에 기여했다.

근래에는 잊혀져 가는 야생화를 알리기 위하여 서운암 주변 5만 여평 야산에 100여 종의 야생화 수 만 송이를 심어 ‘야생화 군락지’를 조성하여

시민의 자연학습장으로 활용 중이다. 또한 매년 들꽃축제(제16회째), 문학인축제(제7회째), 천연염색축제(제6회째) 등 다채로운 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금낭화 (Dicentra spectabilis)

금낭화는 풀 전체가 흰 빛이 도는 녹색이며, 잎이 모란잎과 닮았다. 꽃은 담홍색으로 핀다.

황매화 (Kerria japonica)

황매화는 높이 2m 내외로 무더기로 자란다. 꽃은 황색으로 잎과 같이 피고 가지 끝에 달린다.

홍매화 (Prunus glandulosa)

양성꽃으로 꽃이 잎과 같이 피며 적색으로 만첩이며, 열매는 적색 핵과로 6~8월에 성숙한다.

흰매화 (Prunus mume)

만첩흰매실화라고도 하며 나무의 높이 약 5m이다. 꽃은 겹꽃으로서 흰색으로 핀다.

수련 (Nymphaea tetragona)

수중식물로 땅속줄기에서 많은 잎자루가 자라서 물 위에서 잎을 편다. 꽃은 긴 꽃자루 끝에 1개씩 달린다.

능소화 (Campsis grandiflora)

능소화는 낙엽성 덩굴식물로 가지 길이가 10m에 달하며, 꽃은 지름이 6~8cm로 황홍색이다.

통도사는 국지대찰이자 우리나라 3보 사찰 중 하나인 불보종찰로 꼽히는 명찰로, 신라 27대 선덕여왕 15년(646년)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통도사는 사찰 그자체로서 역사적 가치를 가질 뿐 아니라 우리나라 사찰 중 가장 많은 44종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국보 제290호인 통도사 대웅전 및 금강계단을 비롯한 813점의 문화재가 보관되고 있으며,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유물 또한 통도사내

성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어 우리민족의 역사적, 문화적 향토 발자취를 탐구하기 위한 불교문화 탐방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우리네 옛집의 품격

우리네 옛집의 품격

우리네 옛집의 품격

충주 미륵대원지 옛길에서 만나는 아주 오래된 절터

만석지기, 청송 심부자댁

청송(靑松)이다. 고장의 이름이 푸른 소나무다. 그 의미만으로 울림이 있다.

청송 사람들은 이를 ‘동쪽에 있는 불로장생의 신선 세계’라고도 받아들인다. 청송에 들어서면 그 말이 이해가 간다.

주왕산 아래 생명력이 넘치는 자연이다. 파천면 덕천리에 다다를 때 즈음에는 머물러 살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이 생겨난다. 파천면은 우리나라의 열 번째 슬로시티다.

자연과 역사를 존중하며 느리게 살아가는 마을이다. 여러 씨족이 집성촌을 이루어 살지만 덕천리의 청송 심씨 집안이 가장 잘 알려졌다.

파천이 슬로시티가 된 가장 큰 원동력 역시 청송 심씨 집안의 송소고택과 무관하지 않다. 송소고택은 청송 심씨 집안의 심호택이 지었다.

1880년경 호박골에서 조상의 본거지인 덕천리로 이전하면서다. 그의 호를 따 송소고택이라 부른다.

그는 조선 영조 때 만석지기였던 심처대의 7대손이다. 청송 심씨는 무려 9대에 걸쳐 만석의 부를 누렸던 집안으로 경주 최부자와 함께 영남의 양대 부호였다.

청송에서 대구를 가려면 심부자의 땅을 밟지 않고는 갈 수가 없을 정도였다.

또 조선왕조 500년 동안 세종대왕의 비인 소헌왕후를 비롯해 4명의 왕비와 4명의 부마(임금의 사위), 13명의 정승을 배출했다.

13년에 걸쳐 지은 99칸 송소고택이 그 위세를 짐작케 한다.

99칸 대부호의 집

신흥천을 지나 고택에 다다르자 먼저 솟을대문이 맞이한다. 좌우에 정면 7칸, 측면 1칸의 행랑채를 가진 대문간채다.

솟을대문에는 홍살을 설치했고, 위에는 ‘송소세장(松韶世莊)’이란 현판이 걸렸다. 이 또한 송소고택의 부(富)를 부연한다.

그 아래를 지나 고택으로 들어선다. 경내에는 10채의 건물이 자리한다. 대문채, 안채, 큰사랑채와 작은사랑채, 사당, 별채 등이 다.

하지만 제일 먼저 마주하는 건 집이 아니라 ‘ㄱ’자형의 헛담이다.

내외담이라고도 부르는데, 사랑채에 기거하는 남자들과 안채를 오가는 여자들 사이를 가른다.

조선 유교사회의 전통을 엿보게 한다. 헛담 주변으로는 아담한 정원을 꾸몄다. 화초들이 어울려 정감 있다.

마당에 선 향나무 고목도 고택의 풍모를 더한다. 헛담 뒤편에는 큰사랑채와 작은사랑채가 ‘ㅡ’자로 길게 자리한다.

큰사랑채는 집안의 가장 큰 어른이 머물던 공간이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위엄이 느껴진다.

누마루방에서는 바깥 정원의 풍경이 일품이다. 그 옆은 대청마루다. 대문간채 너머로 안산의 풍경이 시원스럽다.

대청 건너에는 책방이 있다. 사랑방은 정면 2칸에 측면이 1칸 반이다. 미닫이 창살문을 들여 반 칸의 작은 방(반침)을 뒀다.

작은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중문을 포함해 사랑 2칸과 대청 1칸 등으로 이뤄졌다.

여자들의 공간인 안채는 큰사랑채와 작은사랑채 사이 중문으로 들어간다. 전형적인 ‘ㅁ’자 구조로 전면에 사랑채가 있고 후면에 안채다.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특히 대청마루의 세살문 위에 빗살무늬 횡창을 달아 시선을 끈다. 마당에는 화단과 우물이 옛 정취를 느끼게 한다.

동쪽에는 3칸짜리 큰 부엌이 있는데, 그 너머 후원에 따로 방앗간까지 두었을 정도로 부유했다.

서쪽 담장의 솟을삼문을 지나면 별채로 이어진다. 가묘가 아니라 정자를 둔 게 독특하다.

송소고택은 단순히 유서 깊은 고택에 그치지 않는다. 2002년부터 일찌감치 고택 체험 시설로 개방해 일반인의 숙박이 가능하다.

큰사랑과 작은사랑, 안사랑과 행랑채 등 14개의 방을 개방한다. 큰사랑채의 누마루방이나 별채 등이 인기가 좋다.

화장실과 샤워실은 신발을 신고 나가야 하지만 수세식으로 꾸며 깔끔하다. 해마다 열리는 고택음악회도 빼놓을 수 없다.

한옥 처마 아래 울리는 소리가 은은하다. 다채로운 체험 프로그램이 있지만, 실은 별도의 체험을 하지 않아도 충분하다.

충주 미륵대원지 옛길에서 만나는 아주 오래된 절터

충주 미륵대원지 옛길에서 만나는 아주 오래된 절터

충주 미륵대원지 옛길에서 만나는 아주 오래된 절터

낭만 가득 재미 가득 한옥에서의 하룻밤 경북 청송 송소고택

하늘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옛길이다. 하늘재가 열리면서 수많은 사람과 문물이 넘나들었고, 길 위에는 사찰 터와 원터 등 오래된 역사의 흔적이 숱하게 남았다.

하늘재 입구의 충주 미륵대원지라 불리는 사찰 터도 그 중 하나다.

충주 미륵대원지는 드라마 <무신>의 첫 회에 등장한 배경지다.

<무신>은 고려시대 무신정권을 종식시키는 김준이라는 인물을 통해 급변하는 고려의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드라마다.

충주 미륵대원지는 노비 신분에서 고려의 최고권력자에 오른 김준의 파란만장한 인생의 시작점이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은 고려 왕건에게 신라의 모든 것을 넘겨주었다.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몸서리치며 반대했지만, 결국 모든 것을 체념하고 금강산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마의태자가 망국의 설움을 달래며 넘었던 길이 하늘재이고, 신라를 등지고 북녘 땅을 바라보는 미륵불을 세운 곳이 바로 충주 미륵대원지다.

충주 미륵대원지는 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에 창건되었고, 대몽항쟁기 때 충주산성 등 충주 인근에서 몽고군과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 점으로 미루어 이때 불탄 것으로 여겨진다.

우연이었을까? 드라마 <무신>의 배경은 고려시대 무인정권시대부터 대몽항쟁이 펼쳐지는 시기와 일치한다.

더구나 드라마 <무신>의 첫 회 촬영지가 바로 충주 미륵대원지다.

<무신>의 주인공 김준은 노비 출신으로서 최충헌-최우-최항-최의에 이르는 60년간의 최씨 무신정권을

무너뜨리고 최고의 지위인 문하시중에 올랐다.

그야말로 드라마틱하고 영화 같은 삶을 살다간 인물이다.

고려시대 거란군과의 전쟁에 무리하게 동원된 승려들이 난을 일으키자, 무신정권은 승려들의 대대적인 숙청으로 화답했다.

갓난아이 때 축령사에 맡겨진 김준은 무상이라는 법명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축령사로 설정된 충주 미륵대원지는 승려들에 대한 탄압이 자행되는 공간으로 등장한다.

무신정권의 친위군이 승려들과 백성들을 잔인하게 공격하는 가운데 김준도 결국 붙잡혀 개경으로 압송된다.

충주 미륵대원지는 단 한 번 촬영이지만 스님들이 봉술과 수박 등 무술을 연마하는 장면, 김준과 월아의 애틋한 감정이 살아나는 장면 등이 촬영되었고

우뚝 솟은 석조여래입상 등 절터의 독특한 전경이 뚜렷한 인상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드라마 <무신>은 고려의 무신정권을 배경으로 30년에 걸친 대몽항쟁뿐 아니라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팔만대장경에 대한 이야기도 다룬다고 하니 격변하는 고려의 역사를 살짝 음미해볼 만하다.

충주 미륵대원지에 이르면 가장 먼저 쓰러져 있는 당간지주와 거대한 귀부가 눈에 들어온다.

멀리 우뚝 솟은 석가여래입상과 함께 팔각석등, 오층석탑이 일렬로 나란히 서 있다.

오층석탑 옆에는 사각의 독특한 석등이 하나 남아 있다.

충주 미륵대원지는 오래전 고개를 넘나들던 민초들이 간절한 염원을 빌던 곳이었고, 고개를 넘기 전 지친 발길을 쉬어가던 휴식처였지만

전란으로 폐허가 되고 문경새재 길이 열리면서 사람들에게 서서히 잊혀갔다. 그리고 800여 년이란 긴 세월 동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세상의 빛을 다시 보게 된 것은 한국전쟁 이후 현 미륵세계사가 들어서고 1977년 발굴 조사를 시작하면서부터다.

특히 발굴 조사를 통해 <미륵당>, <미륵당초>가 새겨진 기와편이 출토되었는데,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미륵대원으로 여겨진다고 한다.

충주 미륵대원지는 사적 제317호로 지정되었다.

낭만 가득 재미 가득 한옥에서의 하룻밤 경북 청송 송소고택

낭만 가득 재미 가득 한옥에서의 하룻밤 경북 청송 송소고택

낭만 가득 재미 가득 한옥에서의 하룻밤 경북 청송 송소고택

사람이 하나가 되다 충주의 산과 호수 하늘과 땅

이 겨울, 하루 이틀 정도 한옥체험을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달빛이 비치는 환한 창호지 너머로는 먼 마을의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오고 문에는 배롱나무 그림자가 희미하게 어린다.

따뜻한 아랫목에 누워 두툼한 이불을 나눠 덮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겨울밤이 훈훈해진다.

경북 청송군 파천면 덕천마을에 자리한 송소고택에 가면 이런 낭만적인 겨울밤을 보낼 수 있다.

심심산골 덕천마을 한가운데에 자리한 송소고택은 조선 영조 때 만석지기였던 심처대의 7대손 송소 심호택이 1880년경 13년에 걸쳐 지은 99칸짜리 집이다.

아들을 넷 두었던 선생은 인근에 또다시 30칸짜리 집 3채를 7년에 걸쳐 지었지만, 한국전쟁 때 2채가 불타버리고 지금은 송소고택과 둘째 아들의 집이었던 송정고택만이 남아 있다.

청송 심씨는 조선 왕조 500년 동안 세종대왕의 비인 소헌왕후를 비롯해 왕비 4명, 부마 4명, 정승 13명을 탄생시킨 명문대가다.

송소고택은 김좌진 장군과 함께 활약했던 이범석 장군,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 독립운동가 조병옥 박사 등 역사 속의 많은 인물들이 하룻밤 묵어간 곳이기도 하다.

2010년에는 대한민국 관광의 최고상인 ‘2011 한국 관광의 별’로 선정됐고, 연간 4~5만 명이 다녀가는 명소로 자리 잡았다.

송소고택은 전형적인 조선시대 부잣집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다. 대문을 밀면 120년이 넘는 오랜 세월을 말해주듯 삐거덕 소리를 내며 열린다.

솟을대문을 여닫을 때마다 요란한 소리가 나도록 한 것은 찾아오는 손님이 많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다.

홍살을 올린 솟을대문은 당시의 부를 말해주는데, 전하는 얘기에 따르면 심 부자의 재력은 9대 2만 석에 이르렀다고 한다.

개화기에 전답을 정리해 화폐로 바꾸니 고을 돈이란 돈은 전부 모였고, 이것을 청송으로 옮기는 행렬의 길이만 10리나 뻗쳤다고 전해진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먼저 눈에 띄는 건 ㄱ자형 헛담이다.

헛담은 안채에 드나드는 여자들이 사랑채에 기거하는 남자들 눈에 띄지 않게 하기 위해 지은 간이 담장으로 일명 내외담이라고도 한다.

헛담을 지나면 사랑채가 나온다. 집안 어른이 기거하던 큰 사랑채와 후계자인 큰아들이 기거했던 작은 사랑채로 나뉘어 있다.

큰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을 얹었는데 못을 쓰지 않고 만들었다고 한다.

여자들의 공간인 안채는 사랑채 뒤편에 살포시 ‘숨어’ 있다. 안채는 전형적인 ‘ㅁ’자형을 이룬다.

문간을 들어서면 동쪽으로 방과 부엌이 이어져 있고 서쪽으로는 두지, 고방 등이 연결되어 있다. 안채의 대청마루에는 세살문 위에 정교한 빗살무늬의 교창을 달았다.

송소고택에서 가장 특징적인 구조물은 사랑채와 안채 사이 담장에 뚫린 구멍이다.

사랑채에서 보면 6개이지만 안채에서 보면 3개뿐이다. 사랑채 손님이 몇 명이나 왔는지 안채에서 엿보는 용도로 쓰였다고 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안채에서는 사랑채가 보이지만 사랑채에서는 안채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

안채 구멍 1개에 사랑채 구멍 2개가 45도 각도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양반가의 엄격함을 엿볼 수 있다.

송소고택은 아이들도 좋아한다. 부드러운 흙이 깔린 널찍한 마당과 정원은 잡기놀이와 비석치기 등 놀이를 즐기기에 좋고 숨바꼭질을 하기도 좋다.

꽃담과 굴뚝, 아궁이, 문고리 등 집 안 구석구석마다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소소하고 신기한 볼거리들로 가득 차 있다.

제기차기, 새총 쏘기, 투호 등 우리 전통놀이도 체험해볼 수 있다.

송소고택에 하루쯤 묵어보는 것은 각별한 체험이다. 120여 년 전의 대청마루와 기둥, 문살이 그대로 남아 있다.

최근 들어 새로 만들어진 한옥체험관과는 느낌이 다르다. 송소고택은 모든 재료가 옛날 자연 그대로다.

기단은 돌을 사용했고, 기둥과 서까래, 대청 바닥 등은 나무로 만들었다. 벽은 볏짚과 흙을 섞은 흙벽이다. 모든 창에는 한지를 발랐다.

밤이면 은은한 문살 사이로 달빛이 새어든다. 소쩍새 소리와 송소고택 앞을 흐르는 개울물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운다. 아침도 좋다.

송소고택에서는 되도록 일찍 일어날 것을 권한다. 새벽안개가 자욱하게 내려앉은 별채 기와의 선이 예쁘다.

송소고택 뒤편에는 후원이 있다. 조그만 대숲과 흙담을 따라가는 산책도 즐겁다. 후원에서는 송소고택의 전경이 보인다.

사람이 하나가 되다 충주의 산과 호수 하늘과 땅

사람이 하나가 되다 충주의 산과 호수 하늘과 땅

사람이 하나가 되다 충주의 산과 호수 하늘과 땅

합천 해인사 여행 천년의 시간을 거슬러 오르다

충북 충주는 내륙의 분지다. 사방을 준수한 산들이 둘러치고 있다. 그 중 외지인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이른바 ‘천·지·인 삼등산’이다.

각각 천등산(807m)과 지등산(535m) 인등산(667m)의 머리글자를 따 부르는 이름이다.

한데 북에서 남으로 이어가는 산줄기의 순서는 천-지-인이 아니라 천-인-지다.

충주 북쪽에서부터 순서대로 보면 천등산이 가장 위에 있고, 인등산, 지등산이 이어져 있다.

풍수설을 믿는 이들은 이를 하늘 아래 사람이 땅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다는 뜻이라고 풀이한다.

세 산은 높이에 견줘 산세가 험한 편이다. 골짜기도 깊다. 그 탓에 예부터 나라에 변고가 생길 때마다 피난처로 곧잘 이용됐다.

‘삼등산을 모두 넘으면 한 가지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은 이런 이유에서 생겼을 것이다.

세 산은 간격이 넓다. 따라서 종주산행을 하는 이들은 드물고, 각각의 산을 따로 오르는 게 일반적이다.

우리나라엔 산이 많다. 하지만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산은 그리 많지 않다. 강원도 태백산, 인천 강화의 마니산 등 손에 꼽을 정도다.

천등산도 예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산이었다. 다만 태백산이나 마니산 등에 견줘 덜 알려졌을 뿐이다.

천등산 입구에서 느릅재 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천제단이 나온다. 원래 있던 위치에서 옮겨 보다 크고 웅장하게 조성했다.

먼저 천등산에 대한 오해부터 풀고 가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천등산과 박달재가 가까울 것이라 생각한다.

옛 가요 ‘울고 넘는 박달재’때문이다. 반야월이 가사를 쓴 노래는 ‘천등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로 시작된다.

가사대로라면 누구나 박달재가 있는 곳이 천등산이라 생각하기 마련이다. 한데 박달재는 충북 제천, 천등산은 충주에 속해 있다.

거리도 9㎞ 정도나 떨어져 있다.

그러니 노래 가사에 생략된 단어들을 포함시켜 보다 정확히 가사를 쓰자면 ‘천등산 지나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라고 해야 옳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박달재가 있는 산은 시랑산(691m)이다.

모실 시(侍)에 사내 랑(郞)을 쓴다. 말 그대로 낭군을 모신다는 뜻이니 박달 도령과 금봉 처녀의 사랑이야기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천등산은 높이 807m의 제법 험한 산이다. 충주시 산척면 송강리에 위치하고 있다.

산행 기점은 다릿재다. 충주 삼척면과 제천 백운면이 경계를 이루고 있는 고개다.

다릿재 높이가 해발 374m이니 433m 정도 고도를 높이면 천등산 정상에 닿는 셈이다.

다릿재 가는 길은 충주와 제천을 잇는 4차선 도로가 조성되기 전까지만 해도 유일하게 두 도시를 잇던 간선도로였다.

그러다 10여 년 전에 새 도로가 뚫렸고, 이 때 다릿재 터널이 생기면서 지금은 잊혀진 도로가 되고 말았다.

다릿재 가는 길은 더없이 호젓하다. 사람들의 시선에서 살짝 비켜선 덕이다.

충주구치소에서 구불구불 산자락을 휘감아 돌며 5㎞ 정도 이어진다.

다릿재에서 시작되는 천등산 등산로의 전체 길이는 1.8㎞ 정도다.

들머리에서 소봉까지 0.9㎞, 소봉에서 천등산 정상까지 0.9㎞의 단순한 구조다. 바삐 걸으면 2시간 30분, 쉬엄쉬엄 걸어도 3시간이면 다녀올 수 있다.

합천 해인사 여행 천년의 시간을 거슬러 오르다

합천 해인사 여행 천년의 시간을 거슬러 오르다

합천 해인사 여행 천년의 시간을 거슬러 오르다

안동 경상북도 산림과학박물관 숲과 인간의 미래를 담다

우리의 마음속을 어지럽히는 온갖 삼라만상의 번뇌들이 멈추고, 비로소 우주의 참모습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때 우리는 그것을 ‘해인’이라고 부른다.

해인사는 번뇌 속에 가려진 우주의 참 진리, 맑고 청아한 아름다움의 결정체인 인간의 깨달음을 의미하는 유서 깊은 천년고찰이다.

우리에게는 팔만대장경으로 잘 알려져 있는 해인사를 창건한 사람은 신라 의상대사의 법손인 순응, 이정 두 분의 스님이다.

이 두 스님이 신라 제 40대 왕이신 애장왕의 도움으로 해인사를 창건하였으니 그 역사가 천년을 넘는다.

고색창연한 사찰인 만큼 유명한 문화재와 전해오는 이야기들이 많은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몽골군의 침략을 부처님의 힘으로

물리치기 위해 제작한 팔만대장경이 바로 해인사에 있는 장경판전에 보관되어있다.

해인사 고려대장경판전은 현재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록되어있으며, 국보 52호로 지정되어 그 보전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국보 52호 장경판전과 국보 32호 팔만대장경이 살아 숨 쉬는 경남 합천 해인사로 발걸음을 옮겨보자.

해인사 창건설화

중국 양무제 때의 일이다.

유명한 스님이었던 지공화상께서 돌아가실 때 제자들에게 [동국답산기]라는 책을 건내 주며

스님이 돌아가신 후 신라의 스님 두 분이 오셔서 이 책을 찾을 것이니 그 때 드리라는 유언을 남겼다.

과연 얼마 후 신라에서 순응과 이정이라는 두 스님이 찾아왔고

제자들은 지공화상의 유언을 말씀드린 후에 [동국답산기]를 전했다.

순응과 이정스님은 너무나 감격하여 지공화상스님의 탑묘를 찾아가 일주일 밤낮으로 기도를 드렸는데

순응과 이정스님 앞으로 지공화상스님이 나타나 신라 가야산 서쪽에 불법이 크게 일어날 곳이 있으니 그 곳에 사찰을 세우라는 명을 내리고 탑묘 속으로 다시 사라졌다.

순응과 이정스님은 감사의 뜻으로 다시 한 번 불공을 드리고 신라로 돌아왔다.중국 양무제 때의 일이다.

유명한 스님이었던 지공화상께서 돌아가실 때 제자들에게 [동국답산기]라는 책을 건내 주며

스님이 돌아가신 후 신라의 스님 두 분이 오셔서 이 책을 찾을 것이니 그 때 드리라는 유언을 남겼다.

과연 얼마 후 신라에서 순응과 이정이라는 두 스님이 찾아왔고, 제자들은 지공화상의 유언을 말씀드린 후에 [동국답산기]를 전했다.

순응과 이정스님은 너무나 감격하여 지공화상스님의 탑묘를 찾아가 일주일 밤낮으로 기도를 드렸는데, 순응과 이정스님 앞으로

지공화상스님이 나타나 신라 가야산 서쪽에 불법이 크게 일어날 곳이 있으니 그 곳에 사찰을 세우라는 명을 내리고 탑묘 속으로 다시 사라졌다.

순응과 이정스님은 감사의 뜻으로 다시 한 번 불공을 드리고 신라로 돌아왔다.

두 스님은 가야산 자락 아래 맑은 물이 흐르고 산세가 빼어난 곳에 자리를 깔고 선정에 들었는데 이마에서 밝은 빛이 새어나와 하늘로 뻗어 올라갔다고 한다.

당시 신라의 왕이었던 애장왕은 왕후가 몹시 아파 백방으로 약을 구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가야산 자락 아래에서 두 스님을 만나게 되고 두 스님의 처방에 따랐더니 왕후의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이에 애장왕은 크게 기뻐하며 친히 두 스님이 계신 곳에 큰 사찰을 창건하니, 그곳이 바로 지금의 합천 해인사라고 전해지고 있다.

해인사를 지나면 해인사 창건 당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신라 40대 애장왕이 식수하였다고 전해지는 나무가 지금까지 남아있다.

1945년을 마지막으로 생을 마감한 고사목이지만, 고사목의 존재를 통해 우리는 해인사가 얼마나 오래된 역사를 가진 사찰인지 짐작해볼 수 있다.

안동 경상북도 산림과학박물관 숲과 인간의 미래를 담다

안동 경상북도 산림과학박물관 숲과 인간의 미래를 담다

안동 경상북도 산림과학박물관 숲과 인간의 미래를 담다

단풍이 아름다운 춘천

나무가 없는 대한민국의 산하를 상상할 수 있을까?

경상북도 산림과학박물관은 우리의 삶과 밀착되어 있는 산림자원의 이모저모를 알아보고 숲을 가꾸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이다.

박물관 뒤편으로 이어져 있는 소득식물생태숲의 호젓한 숲길과 전망대, 습지산책로도 꼭 둘러보자.

미리 정보를 찾아서 가는 여행자가 아니라면 경상북도 산림과학박물관을 무심히 지나치기 쉽다.

안동시에서 도산서원으로 가는 국도변에 자리 잡은 이곳은 산림과학박물관이라는 다소 딱딱한 이름과는 달리 산림자원과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를 체계적으로 담고 있는 테마 박물관이다. 경상북도산림자원개발원이 운영하는

산림과학박물관과 영지산 자락을 따라 아름다운 산책로가 조성된 소득식물생태숲이 여행자를 맞고 있다.

먼저 자연과 나무 그리고 인간을 상징하는 조형물과 숲의 생태를 보여주는 영상물, 옛 제재소 풍경을 재현한 전시물로 이루어진

로비를 둘러본 후 본격적인 박물관 여행에 나선다. 4개 전시실과 다양한 테마 공간으로 이루어져 마치 숲을 산책하듯 천천히 걸으며 돌아볼 수 있다.

제1전시실은 생물의 진화 과정과 숲의 변화, 산림자원 활용의 대표적인 예들을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이다.

아이들의 호기심과 흥미를 유도하기 위해 공룡과 원시인 조형물, 다양한 입체 그래픽과 애니메이션을 활용하고 있다.

산림의 공익적 기능과 자원 활용의 역사를 살펴보며 아이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다.

제2전시실로 들어서면 우리나라의 숲이 더욱 가까이 다가선다.

백두대간의 중심을 이루는 경상북도의 산림이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 자세히 알 수 있어 더욱 의미 있는 공간이다.

산림 훼손으로 헐벗은 산의 모습과 복구 노력 등이 연대별로 정리되어 있다.

사진을 통해 과거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을 비교할 수 있어 변화 과정이 더욱 실감나게 다가온다.

풍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디오라마와 《산림경제》를 비롯한 조선시대의 산림 관련 문헌들도 눈길을 끈다.

엄마 아빠와 함께 나무블럭을 가지고 놀 수 있는 공간이 전시실 끝에 있어 잠시 쉬어 가기 좋다.

제3전시실로 오르는 길에 ‘나무이야기’라는 이름의 원시 숲이 꾸며져 있다.

아이들이 특히 좋아하는 곳으로 2층 경사로를 오르며 원시 숲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나무를 타고 오르는 아이와 그 모습을 지켜보는 원숭이, 나무 위에 집을 짓고 사는 가족의 모습을 실물 크기로 만들어놓았다.

제3전시실에 들어서면 경북의 지리적 특성과 경북 지역에서 자라는 나무들

산촌마을의 풍경을 보여주는 디오라마, 그리고 귀틀집이 이어진다.

제4전시실은 산림의 파괴와 그로 인한 환경 재앙, 복구를 위한 노력, 미래 숲의 모습을 보여준다.

숲의 미래가 곧 지구의 미래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이다.

특수 공정을 도입해 색감이 살아 있는 야생화 압화실, 표본갤러리, 고가구를 비롯한 목공예품을 전시하고 있는 기획전시실 등

다양한 테마 공간과 4D상영관도 인기다. 4D상영관에서는 ‘나라와 준의 초록별 모험’이라는 제목으로 파괴된 지구 환경을

되살리기 위해 펼치는 모험을 매 시각 실감나는 4D 영상으로 보여준다.

숲의 사계절을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는 테마 공간도 이색적이다.

꽃이 피어나는 봄날

녹음이 우거진 여름, 고운 단풍이 물드는 가을, 눈 쌓인 겨울을 천천히 걸어볼 수 있어 마치 1년을 한순간에 느껴보는 시간여행을 하는 기분이다.

경상북도산림자원개발원은 산림자원을 소득과 연계할 수 있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조성한 소득식물생태숲에서 각종 산야초와 약용수, 유실수 등을 재배, 관리하고 있으며 주변 숲을 일반인에게 개방하고 있다.

숲해설가의 안내를 받아 숲의 생태에 대해 설명을 들을 수 있는 숲체험 프로그램도 운영 중이다.

산림과학박물관 뒤편의 십이지신상을 감상한 후 산모퉁이를 돌아 이어지는 길을 오른다.

원추리, 비비추, 개미취가 심어진 길을 따라가면 울창한 숲이 발아래 펼쳐진다. 오르막이긴 하지만 대화를 나누며 천천히 걷기 좋을 정도의 경사다.

단풍이 아름다운 춘천

단풍이 아름다운 춘천

단풍이 아름다운 춘천

건강한 우리 술 막걸리와 산야초장아찌

많은 사람들이 가을하면 제일 먼저 떠올리는 도시는 춘천일 것이다.

서울춘천고속도로가 뚫린 뒤 1시간 남짓이면 닿을 수 있는 가까운 거리이기 때문에, 닭갈비와 막국수가 먹고 싶은 날에는 별 고민 없이 하루

나들이 코스로 춘천을 다녀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휘적휘적 거리며 춘천 시내를 도보로 돌아보는 것도 재미있고, 배타고 어렵게 찾아간 중도에서 행복한 캠핑라이프를 즐기는 것도 좋고

낭만적인 남이섬에서 사랑하는 가족들과 즐거운 산책을 즐기는 것도 좋고

코끝을 살랑이는 가을바람과 춘천은 가을엽서와 몽당연필처럼 잘 어울린다.

그동안 사랑하는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잘 알려진 춘천. 하지만 가족단위 관광객이 늘면서 아이들을 위한 이색 박물관들이 많아지고 있다.

춘천에는 아이들이 금방이라도 빠져들만한 신기한 볼거리들, 체험거리들로 가득한 박물관이 많이 있다. 춘천이 자랑하는 이색박물관의 세계로 다 같이 떠나보자.

막국수체험박물관

메밀로 만들어져 쌉쌀하면서도 향긋한 맛이 일품인 막국수는 메밀의 주산지인 강원도 사람들이 즐겨먹는 음식중 하나이다.

메밀은 체중을 조절해주고 혈압을 낮춰주며 혈중 콜레스테롤을 낮춰주는 등 우리 몸에 아주 좋은 음식이다.

이 메밀을 이용해 만든 막국수에 대한 모든 것들이 전시되어있는 곳이 바로 막국수체험박물관이다.

체험프로그램을 미리 예약하면 2층 체험장에서 체험지도사와 함께 맷돌, 국수틀 등을 사용한 전통방식으로 막국수를 만들어 볼 수 있고 즉석에서 식사까지 할 수도 있다.

평소에는 쌉쌀한 맛 때문에 먹기를 꺼려했던 아이들과 함께 직접 막국수를 만들어 맛있게 먹어보자.

전시장에서는 춘천막국수를 만들어내던 원조 국수틀이 전시되어있어 있다.

지금이야 기계화되어 반죽을 넣어 뜨거운 물아래로 쭉 뽑아내면 맛있는 막국수 면발이 금방 완성되지만

예전에는 이렇게 나무로 된 국수틀에다가 일일이 넣어서 뽑아내어야 했다.

함지는 통나무 속을 파내어 만든 튼튼하고 예쁜 그릇이다.

커다란 통나무 속을 파내 만든 그릇이었기 때문에 다른 그릇들보다 강도가 튼튼해서 주로 맷돌을 받치는 용도로 사용했다.

맷돌을 함지 위에 얹어두고 곡식을 갈면 함지 아래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나중에는 맷돌을 치우고 함지 안에 들어있는 갈아진 곡식을 요리할 때 사용했다.

함지는 또 모양이 예쁘고 면적이 널찍하여 여러 사람들이 먹을 요리 재료를 한꺼번에 넣어 비비고 무치는 용도로 사용하기도 했다.

통나무 속을 파내어 그릇을 만들었던 산간지역 사람들의 생활력을 엿볼 수 있는 전시물이다.

메밀막국수를 만드는 원료로 사용되는 메밀은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 예로부터 강원도 사람의 주식으로 많이 활용되던 곡식이다.

배고프고 힘든 시절 메밀을 수확하여 곡식을 가루로 만든 다음, 여러 가지 음식재료로 활용했는데 막국수를 비롯하여 메밀전병

메밀부침, 메밀묵, 메밀칼국수 등은 산간지역 사람들의 친근하고 든든한 먹거리가 되어주었다.

지금은 도시사람들이 즐겨 찾는 고급스러운 음식으로 이름을 높이고 있다.

강원도산림박물관은 도립화목원내에 위치해있다. 화목원은 정원이 아름답게 잘 가꾸어져있어서 가족들과 산책하기에도 좋다.

강원도산림박물관은 여러 전시실 모두 잘 꾸며져 있지만 강원도 특유의 아름다운 숲과 숲속에서 살고 있는 동물들이 실감나게

재현되어있는 숲체험실을 특히 추천할 만하다. 다른 여느 박물관처럼 이곳에서도 체험과 4d 입체영상을 관람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