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음식의 종합선물세트 안산 원곡동 다문화거리

세계 음식의 종합선물세트 안산 원곡동 다문화거리

세계 음식의 종합선물세트 안산 원곡동 다문화거리

산책이 예술이다 안양예술공원

지하철 4호선 안산역에 내려 2번 출구로 나오면 원곡동 다문화거리다. 지하계단을 빠져나오자 마자 태국이나 필리핀

중국의 어느 거리에 온 듯한 착각에 빠진다.

아니, 국적불명의 어느 거리를 걷고 있는 듯한 기분에 휩싸인다.

경기도 안산은 우리나라 최대의 외국인 밀집지역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이 원곡동을 중심으로 집단 거주지를 형성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내국인과 합법적 이주민, 비정규 체류자가 함께 모여 사는 대표적인 다문화마을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원곡동에는 내국인을 비롯해 조선족 동포와 중국인, 베트남인, 방글라데시인, 인도네시아인, 태국인, 필리핀인, 스리랑카인

네팔인, 우즈베키스탄인, 나이지리아인, 케냐인 등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고 있다.

휴일이면 서울, 수원, 인천, 화성 등 수도권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이주노동자들이 모여들어 친구나 친지를 만나기도 하고 자기 나라의 생필품을 구해가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거리에는 자연스레 여러 기관에서 운영하는 외국인 쉼터와 식당, 식료품점, 여행사, 은행 등이 들어서게 됐다.

가게 간판은 한국어보다는 외국어가 더 많다. 중국어, 베트남어, 태국어, 인도어 등 생경한 글자로 씌어진 간판이 가득하다.

휴대폰 매장 앞에는 세계 각국의 언어로 씌어진 입간판이 서 있고 은행 간판도 한국어가 아니라 중국어다. 아랍어가 적힌 노래방도 있다.

다양한 인종이 몰려드는 거리인 만큼 먹거리도 여러 가지다. 거리에 들어서면 입구부터 낯선 음식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시큼하면서도 매콤한, 그리고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향신료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힌다.

과일가게는 동남아여행에서나 보던 과일들로 가득 차 있다.

과일의 여왕으로 불리는 망고스틴, 과일의 왕자라 불린다는 두리안, 가지에 열매가 열린 모습이 마치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형상을 닮았다고 해서

이름 붙은 용과, 달콤한 맛으로 가득한 망고 등등 형형색색의 과일들은 보기만 해도 입 안 가득 침이 고이게 만든다.

길거리 음식도 풍성하다. 하지만 한국의 그것과는 종류가 사뭇 다르다.

떡볶이와 어묵, 튀김 대신 기름에 튀긴 중국식 꽈배기와 과자, 연변순대, 만두, 양고기꼬치, 닭발 등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아시아 음식의 종합선물세트라고 할 만 하다.

골목골목마다 각국의 식료품점도 자리 잡고 있어 한국 마트나 시장에서는 구하기 힘든 식재료도 구할 수 있다는 점도 다문화거리를 찾을 만한 이유다.

외국인이 자기네 전통 방식으로 직접 음식을 만들어 파는 식당도 150곳을 훌쩍 넘는다.

베트남, 태국, 인도, 네팔, 인도네시아 음식점이 많은데, 아무래도 현지인들을 상대로 음식을 팔다보니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변형시킨 음식이 아니라 현지 스타일 그대로의 음식을 판다.

그래서 아시아나 인도를 장기간 여행하고 돌아온 배낭여행자들이 현지에서 먹었던 음식을 잊지 못해 찾는 일이 많다고 한다.

세계 3대 수프라는 태국의 똠양꿍과 네팔식 탄두리치킨, 베트남 쌀국수인 포, 중앙아시아식 케밥과 양꼬치 등이 인기 메뉴.

방글라데시식 양고기 카레, 생원두와 우유를 섞어 끓이는 인도네시아식 커피, 스리랑카식 튀김요리 등을 맛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 원곡동 다문화거리다.

게다가 이곳 음식점들은 주머니가 가벼운 외국인근로자들을 상대하기 때문에 서울 강남이나 이태원은 물론 동대문에 밀집한 외국 음식점에 비해 가격이 저렴하다는 것도 장점이다.

산책이 예술이다 안양예술공원

산책이 예술이다 안양예술공원

산책이 예술이다 안양예술공원

조선 불교의 흥망성쇠 현장으로 양주 회암사지

산책은 휴식을 취하거나 건강을 위해서 천천히 걷는 일이다.

더불어 오랜 세월 명상의 한 과정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숲속을 거닐며 강의와 토론을 즐겼다고 하여 산책을 뜻하는 페리파토스학파로 불렸다.

걷고 사유하며 예술적인 감성까지 물씬 느낄 수 있는 특별한 산책로가 있다.

독일 철학자 니체도 “모든 위대한 생각은 걷기에서 나온다”라고 했다. 경기도 안양에 자리한 안양예술공원이다.

안양예술공원의 역사는 1930년대, 그러니까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안양역장 혼다 사고로(本田貞五郞)가 삼성천을 막아 천연 수영장을 만들고, ‘안양풀’이라고 이름 붙였다.

피서객을 끌어모아 막대한 철도 수입을 챙기려는 목적이었다.

1969년에 정부가 국민관광지 ‘안양유원지’로 지정하면서 해마다 평균 100만 명이 몰려, 수도권 최고의 피서지로 자리매김했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안양유원지란 이름을 여전히 익숙하게 사용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1977년 유례없는 대홍수가 안양유원지를 휩쓸었다. 천연 수영장이 참혹하게 파괴되고, 상류에서 토사와 자갈이 쏟아져 옛 모습을 완전히 잃었다.

1984년 국민관광지 지정이 취소되면서 안양유원지의 영화는 지난 추억이 됐다.

다행히 2000년대 들어 안양유원지 정비 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됐고, 2005년 안양예술공원 탄생의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이하 APAP)’가 시작됐다.

APAP는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회복하고, 예술과 건축이 어우러진 휴식 공간을 지향한다.

첫 회에 세계 각국의 건축가와 예술가 60여 명이 참여해, 유원지 일대에 영구 설치 작품 50여 점을 선보였다.

이때부터 안양예술공원이란 이름이 공식적으로 사용된다.

대표적인 작품이 포르투갈을 대표하는 건축가 알바루 시자 비에이라의 ‘안양파빌리온’과 네덜란드 건축가 그룹 MVRDV의 ‘전망대’다.

지금도 ‘안양파빌리온’은 APAP의 역사와 주요 작품을 살펴볼 수 있는 전시 공간으로,

‘전망대’는 삼성산 주변의 빼어난 풍경은 물론 안양 시내와 공원 전체를 조망하는 공간으로 사랑받고 있다.

SNS를 통해 주목받은 건축물도 있다.

주차장과 야외공연장을 잇는 산책로를 복합 구조물로 완성한 아콘치스튜디오의 ‘나무 위의 선으로 된 집’은 기하학적인 조형미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에코 프라워토의 ‘안양 사원’은 대나무로 둘러싼 돔 형태 구조물이 인도네시아의 이국적인 분위기를 고스란히 담아낸다.

볼프강 빈터와 베르트홀트 회르벨트의 ‘안양상자집’은 다양한 색 음료 박스를 재활용한 작품으로,

태양의 위치에 따라 달라지는 빛이 사진작가와 동호인들을 매료했다. 나빈 라완차이쿨의 ‘로맨스 정자’는

태국 정자의 건축양식과 천장에 그려진 가상의 러브 스토리 덕분에 태국 인플루언서까지 방문하며 관심을 모았다.

조선 최대의 왕실 사찰로 떠나는 시간 여행 양주 회암사지

조선 최대의 왕실 사찰로 떠나는 시간 여행 양주 회암사지

조선 최대의 왕실 사찰로 떠나는 시간 여행 양주 회암사지

조선 불교의 흥망성쇠 현장으로 양주 회암사지

한때 번성했으나 어느새 절집도 스님도 사라지고, 세월이 흘러 주춧돌과 유물만으로 존재를 증명하는 옛 절터.

폐사지를 떠올리면 어쩐지 쓸쓸하고 아련하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폐사지를 찾아가는 여행은 시간을 거슬러 전혀 다른 세상과 그곳에 산 사람, 그들의 꿈을 만나는 독특한 경험이다.

과거의 어느 한때로 걸어 들어가, 퍼즐 조각 맞추듯 역사의 장면을 재구성해보자.

경기 북부의 유서 깊은 고장 양주에는 고려 중기에 지어져 조선 중기에 폐사된 것으로 추측되는 회암사지가 있다.

창건 연대도, 언제 어떻게 폐사되었는지도 정확히 알려진 바 없지만 관련 기록과 건축양식, 출토 유물로 미루어 조선 최대의 왕실 사찰이었으리라 짐작한다.

조선은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은 국가이다 보니 유생들의 반발이 거셌지만, 회암사는 왕실의 후원을 받으며 오랫동안 위세를 떨쳤다.

특히 태조 이성계는 스승으로 모시던 무학대사를 회암사 주지로 보내고 자주 찾았으며, 왕위에서 물러난 뒤 이곳에 머무르며 수행하기도 했다고 알려진다.

회암사 창건 시기를 고려 중기로 보는 근거는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이다.

조선 성종 때 간행된 지리지 《동국여지승람》 권2에는 고려 명종 4년(1174) 금나라 사신이 회암사에 다녀갔다고 나온다.

한편 이색의 《목은집》에 실린 <천보산회암사수조기>에는 회암사의 건물 구조와 배치 상황이 자세히 묘사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회암사는 건물이 260여 채에 달하는 사찰이었다.

넓은 절터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대와 박물관에서 절의 규모와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속속들이 볼 수 있다.

회암사지박물관 1층에는 <천보산회암사수조기>를 바탕으로 복원한 회암사 모형이 있다.

이 모형과 재미있는 영상으로 회암사의 역사와 가치를 알기 쉽게 보여준다.

사찰 건축양식을 따르면서도 정치적인 공간을 결합한 건물 배치는 회암사를 왕실 사찰로 보는 증거 중 하나다.

남북으로 층층이 단이 있고 남쪽에 회랑을 둔 점은 고려 시대 궁궐 건축양식과 같다.

또 남북 축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이 되도록 건물을 배치하되, 가장 북쪽의 정청과 동방장, 서방장은 궁궐의 편전과 침전 형식을 적용했다.

보광전을 포함한 주요 건물 앞에는 의식과 경연 공간인 월대가 조성되었는데, 이는 경복궁 근정전이나 창덕궁 인정전 같은 궁궐의 중심 건물에서 볼 수 있는 양식이다.

발굴된 유물 중에도 이런 추측을 뒷받침하는 것이 많다.

보광전 주변에서 출토된 청동금탁에는 태조 3년(1394) 조선 국왕과 왕현비, 세자 등 왕실 인물이 회암사 불사를 후원한다는 명문이 새겨졌다.

또 궁궐 지붕에 올리던 토수나 잡상 같은 장식 기와, 불교와 무관한 용이나 봉황이 새겨진 기와

궁궐이나 왕실 원찰 일부 건물에 사용된 청기와, 왕실용 백자 등이 회암사와 조선 왕실의 관련성을 말해준다.

조선 불교의 흥망성쇠 현장으로 양주 회암사지

조선 불교의 흥망성쇠 현장으로 양주 회암사지

조선 불교의 흥망성쇠 현장으로 양주 회암사지

두물머리 물래길 두물머리가 들려주는 인생 이야기

한 나라가 망하고 새로운 나라가 생기는, 200년이라는 시간의 한 가운데 있던 절이 있다. 절은 부처님의 힘을 필요로 하는 인간을 도와 권력을 휘둘렀고,

그 힘에 반하는 세력에 의해 불에 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새롭게 세워졌던 그 나라조차 없어진 지금, 이제 절은 빈 터로만 남아 인간의 탐욕이 얼마나 부질없는지를 말없이 보여준다.

회암사는 천보산을 주산으로 삼고 야트막한 안산너머로 불곡산과 삼각산을 조산으로 삼고 있다.

안산 아래로 골재공장과 비닐하우스가 있어서 몰풍정하지만, 맨 처음 터를 잡았을 때의 산천은 변함이 없다. 아늑하고 편안하면서도 기상이 넘친다.

회암사가 정확히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으나, <동국여지승람>에 보면, 고려 명종 4년 (1174년) 금나라의 사신이 회암사에

왕래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12세기쯤 창건된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당시는 작은 규모였을 것이고, 1328년 인도승려 지공대사와 그의 제자 나옹선사에 의해 대사찰로 중창되었다.

고려 말에 목은 이색이 쓴<천보산회암사수조기>를 보면 총 262칸에 전각들로 이루어진 가람은 동방에 제일이며,

법당에는 15척(4.5m)의 불상 7구와 10척(3m)의 관음상이 봉안되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조선 중기에 회암사가 불탄 뒤로 버려졌고, 지금은 흩어진 돌무더기와 주춧돌뿐, 발굴 조사 작업이 한창인 역사현장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나옹의 제자인 무학대사를 회암사에 머무르게 하여 불사가 있을 때마다 대신을 보내 찬례토록 하였으며,

왕 위에서 물러난 뒤에는 친히 회암사에 머물면서 수도생활을 했다.

그 뒤로도 회암사는 조선 왕실과 지속적인 인연을 맺어오다가 명종 때 보우대사가 머물면서 다시 번창하게 된다.

하지만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의 후원으로 기세를 올리던 보우는 문정왕후가 죽은 뒤로

제주도로 유배되어 살해되었고, 문정왕후와 보우에 대한 유생들의 반감이 회암사를 폐사시켰다.

명종실록에는 유생들이 회암사를 불 지르려 한다는 기록이, 선조실록에는 회암사 옛터에 불탄 종이 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렇게 명종과 선조 사이, 전국 제일의 수선도량(修禪道場)이었던 회암사는 그 운명을 다하였다.

회암사는 조선 유교와 불교의 극명한 대결 현장이었던 셈이다.

폐사지 맨 앞쪽에 있는 사각기둥 당간 지주를 쓸어보다가,

폐사지 가장 안쪽에 있는 우람한 부도탑을 살펴본 뒤 무학대사(1327-1405)의 부도가 있는 산중턱을 올라갈 수도 있다.

그런데 먼저 천보산 산자락을 살펴보고 폐사지를 멀리서 바라보면, 폐사지 좌우로 팔걸이 같은 언덕이 길게 뻗어내려 있음을 볼 수 있다. 소위 좌청룡 우백호다.

좌청룡에 끝자락에는 무덤 한 기가 얹혀 있는데, 무덤의 후손들은 그곳이 명당이라고 본 듯하다.

회암사지에서 천보산 정상 쪽으로 700m쯤 올라가면 또 하나의 회암사가 나온다.

1828년에 경기지방 승려들이 신축한 것이다. 이 절 옆에는 회암사를 중창했던 지공과 나옹의 부도가 있고, 이성계를 도왔던 무학대사의 부도가 있다.

천보산 자락이 흘러내린 혈처(혈이 맺히는 곳)에 무학대사의 부도가 있다.

좌청룡 우백호가 있고, 명당수가 바로 앞으로 흘러가고 있는 무학대사의 부도 뒤쪽으로 지공과 나옹의 부도도 있다.

나옹선사가 회암사를 262칸의 대찰로 중창했을 때, 전국 각지 신자들이 회암사로 몰려들었다.

고려 왕실은 나옹선사의 영향력이 너무 커질 것을 우려하여 나옹선사를 경상도의 외진 절로 옮겨가도록 했다.

하지만 나옹선사는 남한강을 따라 경상도로 내려가다가 병을 얻어 여주 신륵사에 머물다가 입적했다.

하여, 신륵사에 나옹선사의 부도와 이색이 쓴 부도비가 있는데, 회암사의 제자들은 나옹선사를 기리기 위해 회암사에 또 하나의 부도를 세운 것으로 보인다.

관상 촬영지 유명산 설매재와 용문사 은행나무

관상 촬영지 유명산 설매재와 용문사 은행나무

관상 촬영지 유명산 설매재와 용문사 은행나무

옛 철로와 추억의 한강길을 씽씽 양수역 자전거길

설매재는 2013년 하반기 최고의 화제작인 영화 <관상>의 촬영지다.

내경(송강호 분)의 가족이 마음 편히 살던 시절이다. 집 앞 억새 언덕에서 내려다보면 근심이 사라진다.

가을 나들이엔 1,100년 된 은행나무가 있는 인근 용문사도 권한다.

<관상>에 나오는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전후해 두 번이나 찾은 사찰이다.

11월이다. 남한강변에 바람이 제법 차다. 사방은 울긋불긋하다. 만추(晩秋)다. 산세가 어우러지니 완연하다.

특히 양평은 이름난 산이 많아 가을에 더 분주하다. 유명산과 용문산, 중미산 등이 조금씩 다른 매력을 뽐낸다.

그러고 보면 산에도 저마다 다른 상이 있다. 풍수지리란 자연의 관상이려나.

얼마 전 영화 <관상>이 큰 인기를 끌었다. 우리나라 영화로는 열 번째로 900만 관객을 동원했다.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도 돋보였지만 관상이라는 소재도 흥행에 적잖이 영향을 미쳤다.

<관상>은 계유정난을 배경으로 한다.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을 제거하고 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사건이다.

그 역사의 중심에서 관상쟁이 김내경의 시선을 좇는다.

첫 장면은 기생 연홍(김혜수 분)이 내경을 찾아가는 길목이다.

내경은 초야에 숨어 지내는 무림고수처럼 첩첩산중에 산다.

역적의 집안이라는 요인도 있겠지만 제 관상을 이미 알고 숨어 사는 건 아니었을는지.

그럼에도 그 재주를 어찌할까. 사람들이 알음알음 입소문을 듣고 찾아온다.

기생 연홍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 내경의 재주를 이용해 큰돈을 벌어보려는 속셈이다.

장사꾼으로 위장해 찾지만 당대의 관상쟁이를 속일 수는 없다.

“도화 빛이 돌고 입술이 붉은 게 무당 끼가 도는데 무당 될 팔자는 아니고….”

내경의 집을 찾아가는 길의 가을 풍경이 언뜻언뜻 연홍의 붉은 입술을 닮았다.

유명산 자락에 해당하는 설매재 고갯길이다. 눈이 많이 내려도 매화가 피어난다 해 붙여진 이름이다.

1999년부터는 그 능선에 사설 휴양림도 운영 중이다. 통나무집과 오토캠핑장을 고루 갖춰 캠핑 마니아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휴양림 내에는 다모숲, 소서노의숲 등이 자리했다.

드라마 <다모>와 <주몽>을 이곳에서 촬영했다.

<관상>의 촬영지는 설매재휴양림 입구를 지나쳐 배너미재까지 조금 더 굽이치며 올라간다.

고갯마루에 다다르면 ATV 대여점과 작은 컨테이너 매점이 있다. 매점 옆에는 산을 향해 길이 나 있고 차량차단기가 있다.

촬영지로 향하는 들머리다. 주변에 차를 대고 30분 정도 걸어 들어가면 <관상>에 나온 내경의 집이 보인다.

내경의 집으로 가는 임도 초입은 웃자란 나무들이 시야를 가린다. 간간이 어비산의 단풍이 들고나지만 만족할 정도는 아니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아쉬움을 만회하듯 시원스런 풍경이 열린다.

길 왼쪽으로 용문산과 백운봉이 위용을 자랑한다. 가을을 실감할 만한 산이다.

그 아래는 남한강 줄기가 따른다. 숨을 고르듯 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바라본다.

다시 돌아서면 슬슬 억새의 하늘거림이다. 내경의 집이 멀지 않았다는 증표다. 곧 첫 번째 갈림길이다.

삼거리에 B, D코스와 왕남 코스라는 표지판이 섰다. 삼거리처럼 보이지만 실은 사거리다.

표지판 뒤에 샛길이 하나 더 있다. 왕남 코스를 택하면 조금 더 주변 풍광을 감상하며 걸을 수 있다.

특히 단풍 든 가을 나무 한 그루가 섰는데 경사진 억새밭과 인근 산들의 너울거림이 인상 깊다.

두물머리 물래길 두물머리가 들려주는 인생 이야기

두물머리 물래길 두물머리가 들려주는 인생 이야기

두물머리 물래길 두물머리가 들려주는 인생 이야기

옛 철로와 추억의 한강길을 씽씽 양수역 자전거길

두물머리는 남한강과 북한강의 두 물줄기가 만나는 지역이다.

환경정책기본법, 수도법, 하천법 등 각종 법으로 개발이 제한되어 온 곳이라 자연환경이 잘 보전되어 있다.

두물머리의 때 묻지 않은 풍경을 볼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두물머리 물래길을 걷는 것이다.

두물머리 물래길은 두물머리 인근을 한 바퀴 도는 10km 걷기 길이다.

양수역에서 출발해 세미원, 두물머리, 다온광장(두물경), 양수리환경생태공원, 남한강 자전거길 등 두물머리 주변 생태 여행지를 두루 들른다.

연꽃정원 세미원, 황포돛배와 느티나무가 한갓진 분위기를 자아내는 두물머리,

한강 자생식물이 자라는 두물지구 생태학습장, 갈대가 무성한 갈대쉼터 등 두물머리가 들려주는 생태 이야기가 강물 따라 흐른다.

두물머리 물래길은 두물머리 일대를 시계 방향으로 도는 10km 걷기 길이다.

출발점은 지하철 경의중앙선 양수역. 양수역 역사 내에서 물래길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물래길은 세미원, 두물머리, 두물지구 생태학습장,

양수리환경생태공원, 북한강철교 등 두물머리 일대 가볼 만한 곳을 고루 들른다.

흩어져 있던 여행지들이 ‘두물머리 물래길’이라는 이름 안에 묶인 것이다.

물래길의 목적은 빨리 완주하는 것이 아니다.

연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에 귀 기울이거나 느티나무 거목 아래에서 다리쉼을 하거나 두물머리 강물을 감상하며 느릿느릿 걸어야 한다.

눈이 가장 호사를 누리는 곳은 세미원이다. 세미원은 물래길에서도 대표적인 생태 관광지다.

연꽃 정원은 15년 전만 해도 상류에서 밀려온 쓰레기로 가득했다.

상수원 보호구역 철망에 쓰레기가 걸리며 수질은 나빠져만 갔다.

이에 주민과 환경단체가 수질정화 능력이 뛰어난 연을 심기 시작했고, 경기도의 지원을 받으며 2004년 세미원이 문을 열었다.

6월 중순부터 8월에는 홍련과 백련을 포함해 수십 가지 연꽃이 핀다.

불그스름한 홍련과 새하얀 백련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진 풍경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이를 촬영하기 위해 대포 같은 카메라를 들고 찾은 이들도 여럿이다.

풍류를 즐기는 선비가 된 듯 연꽃 정원을 거닐고 연향을 깊숙이 들이마시자.

그사이 ‘관수세심(觀水洗心) 관화미심(觀花美心)’, 즉 물을 보며 마음을 씻고 꽃을 보며 마음을 아름답게 하라’는 세미원의 정신을 체화할 수 있다. 세미원은 유료로 입장해야 한다.

세미원을 건너뛰고 싶다면 양수역-양서문화체육공원-두물머리 위쪽 공영주차장 코스를 선택한다.

금강산에서 출발한 북한강과 강원도 태백 금대봉 기슭 검룡소에서 출발한 남한강이 두물머리에서 처음 만난다.

두물머리는 예로부터 풍경이 뛰어났다. 조선시대 화가 겸재 정선과 석범 이건필은 이곳의 수려한 경치를 그림으로 남겼다.

그뿐인가. 서울로 향하는 배들에게는 넉넉한 쉼터였다.

옛 철로와 추억의 한강길을 씽씽 양수역 자전거길

옛 철로와 추억의 한강길을 씽씽 양수역 자전거길

옛 철로와 추억의 한강길을 씽씽 양수역 자전거길

세미원 맑은 세상 흐르고 흘리다

바람이 분다. 봄바람이다. 다리 위에도, 강변 벤치에도, 삐딱하게 눌러쓴 헬멧 옆으로도 싱그러운 강바람이 스쳐 지나간다.

양평 두물머리 하면 추억의 장소다. 예전에 수없이 MT를 다녔고, 주머니 사정 넉넉지 않은 청춘들이 마음먹고 나섰던 야외 나들이 코스다.

이제는 제법 분주해졌다. 남한강과 북한강을 잇는 자전거길이 정착됐고, 양수역도 유명세를 타고 있다.

세미원 등 굵직굵직한 명소들 역시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양수역 일대는 요즘 자전거 타러 오는 가족 단위 여행객들이 부쩍 늘었다. 봄이 되니 인기가 더욱 만만치 않다.

지난해 양수역은 무료로 자전거를 빌려주는 ‘행복자전거’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신분증만 맡기면 무료로 자전거를 빌려 탈 수 있었다.

서툰 하이킹족이 굳이 양수역을 찾는 데는 이유가 있다.

양수역에서 1km 가량만 벗어나면 남한강뿐 아니라 북한강변의 정취가 고스란히 더해진다.

녹슨 철교가 남은 옛 기찻길 다리도 지나고 생태공원 벤치에 앉아 김밥도 먹을 수 있다.

질주가 목적이 아니라 추억을 만들어내기에 좋다.

양수역에서 남한강변을 따라 이어지는 자전거길에는 ‘추억의 길’이라는 별칭이 붙어 있다.

서울 한강 둔치처럼 프로 라이더들이 고속 질주하는 길이 아니다.

이곳 자전거길은 ‘낭만’과 ‘풍경’이라는 테마가 적절하게 어우러진다. 무작정 달리기에는 지나치는 풍경들이 탐스럽다.

갈대숲과 연꽃연못이 내려다보이고, 팔당호 수면 위에는 은은하게 햇빛이 부서진다.

조금 속도를 내려고 하면 옛 철로 옆 새로 난 철길 위로 열차가 오간다.

지나는 열차 중에는 자전거로 외관을 울긋불긋하게 꾸민 자전거열차도 있다.

새삼 열차와 자전거가 공존하는 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누구나 잠시 멈추거나 속도를 줄이고 열차에 손짓을 한다.

자전거길은 보행자를 위한 길과도 나란히 연결된다. 꼬마들도 엄마아빠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느리게 달리는 2인용 자전거도 정겹게 오간다.

완전무장을 한 라이더들도 양수역에서 북한강 철로를 잇는 길목에서만큼은 호흡을 가다듬는다.

더디게 오가는 가족들을 위한 배려다. “귀여운 꼬마네.” “자전거 멋진데요.” 한두 마디 농담을 건네는 데도 인색하지 않다.

길목 곳곳에는 쉼터와 벤치가 마련돼 있다. 두물머리를 바라보며 혹은 옛 철로를 추억하며, 커피 한잔 마시는 여유가 쉼터에 녹아든다.

북한강로와 남한강로가 만나는 곳에는 자전거 여행자 정보센터와 인증 부스가 갖춰져 있다.

수첩에 도장도 찍고 담소도 나누는 따사로운 휴식이 길가에 깃든다.

무료로 탈 수 있었던 양수역 행복자전거가 2013년 3월 민간에 위탁하면서부터 유료로 전환됐다.

물론 신분증도 맡겨야 한다. 무료인 줄 알고 찾았다가 실망하는 가족, 연인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무료였을 때는 주말 오전 10시면 자전거가 동이 났다지만 유료로 전환된 후로는 낮에도 자전거를 원활하게 빌릴 수 있기는 하다.

그래도 봄바람에 들떠 전철 타고 나들이 온 가족들에게 느닷없는 비용은 부담이다.

양평 생각속의 집 글램핑 글램퍼스

양평 생각속의 집 글램핑 글램퍼스

양평 생각속의 집 글램핑 글램퍼스

세미원 맑은 세상 흐르고 흘리다

캠핑 마니아까지 유혹하는 독특한 구조의 돔형 텐트

캠핑이 여행의 한 트렌드가 되면서 ‘화려하다’는 뜻의 ‘글래머러스(glamorous)’와 ‘캠핑(camping)’을 합친 글램핑(glamping)이라는 단어도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되었다.

캠핑 장비 일체를 대여해주는 글램핑장도 있고, 숙박은 호텔 객실을 이용하고 저녁 바비큐만을 즐기는 특급호텔의 글램핑존도 있다.

우리나라 최고의 펜션 중 하나인 생각속의 집에서 운영하는 글램핑장인 글램퍼스는 뭔가 다르다.

여러 가지 불편함을 이유로 캠핑을 꺼리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글램핑에 거부감을 가지는 캠핑 마니아까지도 확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다.

텐트와 취사도구 등 단순히 캠핑 장비를 빌려주는 차원을 넘어서 글램핑으로만 느낄 수 있는 멋진 요소들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시선을 사로잡는 독특한 외관은 ‘과연 저 안이 어떻게 채워져 있을까?’

하는 궁금증을 유발하고, 부족함 없이 채워진 내부시설은 1박 2일 동안의 멋진 시간을 상상하게 한다.

펜션 생각속의 집 맞은편 산자락에 자리 잡은 글램퍼스는 둥근 도넛형, 기다란 모듈러형의 돔형 텐트 여덟 동으로 이루어진 글램핑장이다.

숲속 나무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자리한 하얀 돔형 텐트가 마치 새들의 둥지를 연상시킨다.

이 독특한 디자인은 독일에서 활동한 건축가 심희준, 박수정 부부의 작품이다.

모든 텐트에 눈비를 막아주는 데크와 야외 테라스가 있고, 멋스런 야외 소파들이 놓여 있다.

바비큐를 즐길 수 있는 화로도 준비되어 있다. 캠핑 사이트가 아니라 독립형 펜션에 가깝다.

내부 구조도 재미있다. 도넛형은 거실과 주방, 침실이 둥글게 연결되어 있다.

거실 쪽으로 난 문을 열고 들어가 내부를 한 바퀴 돌면 침실 전면으로 난 문을 통해 다시 야외로 나오게 된다.

벽면과 천장이 둥글게 이어져 마치 이글루 안에 들어온 것 같다.

티피형 텐트와도 다른 느낌으로 천장 전체가 높아 전혀 답답하지 않다.

지렁이 모양의 모듈러형은 거실과 주방, 침실이 일자로 연결된다.

침실이 있는 후면에 나무데크가 설치되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안락한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실내 전용 슬리퍼도 마련되어 있어 바닥의 냉기를 피해 쾌적하게 머물 수 있다.

전기주전자를 비롯한 주방도구 일체가 갖춰진 일자형 싱크대와 화장실, 샤워시설까지 완벽하다.

글램핑의 꽃이라 할 수 있는 푹신하고 커다란 침대가 있고, 문을 열면 바로 야외로 연결된다.

주방 앞에 놓인 2개의 소파를 펼치면 2인용 침대로 변신하니 4인 가족이 머물기에 부족함이 없다.

전기를 사용할 수 있는 콘센트가 바닥에 있어 음악을 듣거나 노트북으로 영화를 즐기기에도 좋다.

완벽한 시설을 갖춘 내부를 튼튼하게 보호해주는 텐트도 특별하다.

멀리서 바라볼 때는 일반 텐트용 천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 만져보면 특수 원단으로 제작된 텐트임을 알 수 있다.

햇빛과 내부 조명을 투과시키는 원단 위로 비바람을 막을 수 있는 또 다른 소재의 원단이 이중으로 덮여 있다.

내부 온도를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다. 텐트 전체를 지탱하고 있는 구조물은 강한 비바람을 견딜 수 있는 철골 구조다.

세미원 맑은 세상 흐르고 흘리다

세미원 맑은 세상 흐르고 흘리다

세미원 맑은 세상 흐르고 흘리다

붉은발말똥게와 함께하는 한강하구 평화이야기

남한강과 북한강이 두물머리에서 만나 대한민국의 젖줄, 한강으로 흐른다. ‘양평’하면 떠오르는 그림이다.

이 같은 천혜의 환경을 살리면서 개성적, 매력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는 곳을 찾아갈 예정이다.

녹색이 절정으로 멋을 부리는 요즘, 절로 발걸음이 향하는 곳 ‘양평’을 가보자.

양평은 수도권에서 접근하기 쉬운 편. 가벼운 나들이 목적지로 제격이다. 여행 준비 별거 없다.

얼려놓은 물통, 읽다가 만 책 한권, 작은 똑딱이 카메라 정도면 완료. 교통편은 당연히 대중교통.

중앙선 양수역에서 1번 출구로 나와 10분 정도 직진하면 체육공원 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좌회전, 곧 세미원이라는 곳에 도착한다.

주소는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용담리,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 습지를 이루는 장소와 매우 가까운 위치다.

세미원은 생태공원을 표방하면서 자연정화공원이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다. 정화공원이라는 단어가 다소 낯설다.

꽃을 보고 안구정화하라는 것인가. 일단 안으로 들어가 보자. 입구를 지나면, 작은 정자와 카페 그리고 연꽃박물관으로 구성돼 있다.

공원으로 들어가기 전에 박물관부터 보고 가라는 취지가 아닐까.

연꽃박물관은 우리 문화, 역사 속의 연꽃을 심도 있게 다룬 박물관이다.

한반도에 불교가 정착한 이후 고구려, 백제, 신라, 통일신라, 고려, 조선 등 긴 세월 동안, 연꽃이 우리 선조의 일상에 어떻게 녹아들었는지 직접 볼 수 있다.

연꽃을 의식주에 적용한 다양한 유물에서 선조의 재해석 시선도 느낄 수 있다.

또, 연꽃은 열매, 잎, 뿌리, 꽃 등 모든 것이 인간에게 유용해, 다양한 음식으로 활용되는데,

그 조리법도 간단하게 설명돼 있다. 웰빙 음식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이곳에서 연꽃으로 만드는 음식정보도 챙겨가자.

이제 공원으로 가보자. 매표하면서 세미원이라는 이름의 뜻을 물어봤다.

<장자>에 나오는 ‘관수세심 관화미심(觀水洗心 觀花美心)’에서 세(洗)와 미(美)를 따온 이름이라고 한다.

‘물을 보면 마음이 씻기고, 꽃을 보면 마음이 아름다워진다’

여행을 좋아하고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백번 공감할 내용이다.

들어가기 전, 몇 가지 주의사항이 있다. 일단, 음식물 반입이 안 된다.

공원 나들이에 도시락이 빠질 수 없거늘… 아쉽지만, 음식물로 인한 자연훼손을 방지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앞선 공원문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뾰족한 굽이 있는 구두나 카메라 삼각대처럼 지면에 꽂히는 것도 금지다.

지면이 파이거나, 식물이 상할 우려가 있기 때문. 구두 같은 경우 고무신을 빌려 신고 입장할 수 있다.

처음 방문한 사람에게는 조금 곤욕스러운 과정일 수 있겠다.

하지만 이것도 음식물 반입과 마찬가지로 불편을 감수해서라도 좀 더 아름다운 자연을 보여주고자 하는 관리자의 운영관이 담겼으리라.

생수병 하나 달랑 들고 가볍게 공원에 들어섰다.

약 180,000㎡ 규모의 공원에 연꽃을 비롯한 수생식물들이 가득한 6개 이상의 연못이 자리 잡았다.

연못 둘레로 조성된 산책로도 구간마다 다른 분위기를 연출해 걷는 맛이 좋다.

노을이 질 때면 아늑한 분위기가 나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과 걷기에 딱 좋겠다.

산책하다 보면 장독대와 멋진 소나무가 어우러진 곳이 있다. 이곳 항아리의 뚜껑에 구멍이 났는데, 물이 솟으며 분수쇼가 펼쳐진다. 이것이 꽤나 장관이다.

이처럼 자연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놔두면서, 과하지 않게 꾸민 분위기가 세미원의 매력이다. 조형물, 석조물들이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여백을 채워, 운치 있는 공간이 된다.

수호자의 마음으로 걷다 고양 행주산성

수호자의 마음으로 걷다 고양 행주산성

수호자의 마음으로 걷다 고양 행주산성

붉은발말똥게와 함께하는 한강하구 평화이야기

‘산’을 오르는 것과 ‘산성’을 오르는 것은 다르다.

산을 오르는 것은 정복자가 되기 위함이고, 산성을 오르는 것은 수호자가 되기 위함이다.

정상을 향해 도전하는 마음으로 산에 오를 때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수호자의 마음으로 산성을 걸을 때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세월을 품은 고목 한 그루, 소담하게 피어있는 노란색 야생화. 지키고 싶은 것들을 새록새록 만나게 되는 것.

그것이 수호자가 되어 산성을 걷는 이유이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산에 있는 행주산성.

삼국시대에 처음 지어졌고, 임진왜란(1592년) 이후 중건된 모습으로 현재까지 남아있다.

행주대첩으로 유명한 행주산성은 흙을 이용하여 쌓은 토축산성으로 총 1km의 길이이다.

산성은 본디 방어를 위해 지어진다. 행주산성 역시 한강 유역에 있는 다른 산성들과 함께 삼국시대부터 중요한 방어요새로 활약했다.

가장 잘 알려진 전투는 임진왜란 때 권율이 왜군을 대파한 ‘행주대첩’.

산성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고 9차례에 걸쳐 맹공격을 해오는 일본군을 결국엔 퇴각시키고 승리를 쟁취한 곳이다.

이 전투는 대한민국 역사에 자랑스러운 한 페이지로 남아 진주대첩, 한산도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꼽힌다.

목숨을 걸고 행주산성을 지켰던, 그래서 이 나라를 기어코 지켜냈던 용맹한 수호자 ‘권율’.

행주산성의 대첩문에 들어서면 그가 가장 먼저 사람들을 반긴다.

대첩문을 지나 300m 가량 올라가면 첫 번째 갈림길을 만난다.

왼쪽은 행주대첩비가 있는 정상 쪽으로 오르는 길이고, 홍살문이 멋들어진 오른쪽은 권율 장군의 영정을 모신 충장사로 가는 길이다.

권율 장군에게 먼저 찾아가는 것도 좋지만 행주산성 정상으로 방향을 잡는 것을 추천한다.

이 성의 가치를 먼저 깨우쳐야, 수호자의 절실함도 이해할 수 있으니까.

평평하지도 가파르지도 않은 언덕길을 적당히 힘이 들어가는 걸음으로 15분 정도 올라가면 고고하게 서 있는 덕양정을 발견할 수 있다.

덕양정은 1970년대 건립한 정자로 한강의 윤슬을 감상할 수 있는 행주산성의 경치 맛집이다.

행주대첩비 바로 앞에는 대첩비각이 자리하고 있다.

행주대첩의 경과와 권율 장군의 공덕을 기리는 내용으로 선조 35년 장군의 부하들이 직접 세웠다고 한다.

비문은 최립, 글씨는 한석봉이 썼다고 하니, 아군의 3배가 넘는 적을 물리친 행주대첩이 당시 사람들에게도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이었는지 알 수 있다.

바로 옆에 신행주대첩비가 왜군 앞에서도 움츠러들지 않았던 민족의 용맹함을 품고 하늘을 향해 늠름하게 뻗어 있다.

한없이 높은 가을 하늘도 단번에 뚫어버릴 것 같은 날카로운 기세는 고개가 절로 숙여지게 만든다.

행주대첩비를 바라보다 뒤를 돌아서면 서울, 김포, 고양의 아름다움이 한눈에 들어온다.

3개의 도시를 하나로 연결하듯 흐르는 한강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보여주듯 반짝인다.

지금이야 건물들이 늘어선 도시가 밤낮없이 찬란하지만 권율 장군이 이곳에 서서 바라봤을 풍경은 사뭇 달랐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