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길 따라 찾아가는 고즈넉한 산사 청도 운문사

봄길 따라 찾아가는 고즈넉한 산사 청도 운문사

봄길 따라 찾아가는 고즈넉한 산사 청도 운문사

아주 특별한 시간 한개마을

운문사는 5학년 2학기 2단원에 소개된 ‘고려문화의 발전’과 ‘불교문화’를 두 눈으로 직접 보고 공부할 수 있는 살아있는 역사 교과서다.

고려시대는 불교가 매우 융성한 시기였으므로 그 시대의 건축 양식과 신라 말~고려 초에 걸친 운문사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3월이 시작된 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어느 사이엔가 4월을 기다리고 있다.

이제 곧 봄기운을 잔뜩 머금은 봄꽃들이 저마다의 예쁜 꽃망울을 터뜨릴 것이다.

섬진강변의 매화마을에는 벌써 새하얀 매화가 피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그러나 꽃을 봐야만 꼭 봄의 정취를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길가에 삐죽 얼굴을 내민 풀 한 포기라든가 들판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그리고 호젓한 산사를 찾아가는 길목에서 설레는 마음으로 봄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봄바람에 실려 오는 향긋한 솔향. 그 기분 좋은 향내를 맡으며 찾아갈 수 있는 사찰이라면 단연 운문사를 첫 손에 꼽을 수 있다.

구슬처럼 맑은 운문천의 물소리와 울창한 노송 숲이 매우 인상적인 사찰이다.

운문사가 위치한 경북 청도는 복숭아와 감, 소싸움, 새마을 운동 발상지로 잘 알려진 고장이다.

최근에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전천후 경기가 가능하도록 국내 최초 자동 개폐식 돔형 경기장인 청도소싸움경기장을 개장해 매주 주말마다 흥겨운 축제마당을 펼치고 있다.

또 이곳은 물과 산, 인심이 맑아 예로부터 ‘삼청의 고장’으로 불리기기도 했다.

도불습유라고 해서 길에 떨어져 있는 물건이 아무리 욕심나는 것이라도 자기 것이 아니면 절대 주워가지 않는 아름다운 풍습이 지금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청도의 가장 대표적인 사찰인 운문사는 청도읍에서 동쪽으로 40km쯤 떨어진 운문산(해발 1,188m) 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일명 호거산이라 불리기도 하는 운문산은 재약산, 가지산, 신불산, 취서산 등과 함께 영남알프스를 이루는 고봉 가운데 하나.

먼 옛날 원광국사가 화랑도의 신조인 세속오계를 지은 명산이기도 하다.

이처럼 유서 깊은 운문산의 북쪽 기슭 햇볕 잘 드는 곳에 운문사가 자리를 틀고 앉아 있다.

운문사는 신라 진흥왕 때인 560년에 보양국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보양국사는 신라 말기와 고려 초기에 살았던 승려이므로 이 같은 설명은 다소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옛 기록에 의하면 보양국사가 당나라에서 돌아오는 길에 지금의 운문사 자리에다 사찰을 지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본래 진흥왕 때 누군가에 의해 초창된 사찰이 폐허가 되었고, 그 자리에다 보양국사가 다시 중창을 했다고 해야 정확한 표현이 될 것이다.

중창 당시의 사찰 이름은 작압사였다. 그 후 937년에 고려태조 왕건으로부터 운문선사라는 사액을 받으면서 작압사는 운문사로 불리게 되었다.

운문사는 여승들의 수도장인 만큼 경내 전체가 마치 잘 꾸며진 정원처럼 정갈하고 깨끗하다.

나무 한 그 루, 풀 한포기, 자그마한 돌멩이 하나까지 여승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다.

2016년 현재 운문사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학인 스님은 대략 150여 명.

속세와의 인연을 끊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청순하고 쾌활한 여승들이 엄격한 계율 속에서 수행자의 길을 걷고 있다.

사찰의 참 모습을 보려면 해가 진 후 또는 해가 뜨기 전에 찾아가야 한다.

그리고 기회가 닿는다면 스님들의 바루공양에 참여하고 하루나 이틀 정도 선방에 머물면서 앞만 보고 달려온 삶에 대해 한 번쯤은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면 좋을 것이다.

일정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방문길을 서둘러서 새벽 예불에 참여해 볼 일이다.

특히 공부하는 스님들이 많은 운문사의 새벽 예불은 그 청아함과 경건함이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새벽 예불은 일반적으로 4시 30분에 시작해서 5시 30분경에 끝난다.

6시부터는 아침 공양(식사)이 시작되는데, 일반 신도들에게도 공양간(식당)을 개방하고 있다.

이밖에도 운문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명물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수령이 500년에 이르는 처진 소나무다.

천연기념물 제 180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노거수는 줄기가 땅에 닿을 정도로 처져 있다고 해서 이 같은 이름이 붙었다.

재미있는 것은 해마다 음력 3월 3일 삼짇날 나무 주위에다 막걸리 12말을 희석해 뿌리는 일이다.

물도 아닌 막걸리를 뿌리는 것에 대한 여러 가지 추측이 있지만 그 유래와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역사가 오래된 사찰인 만큼 운문사 경내에는 많은 문화재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신라 때 만들어진 구리 항아리인 동호를 비롯해서 비로전,

금당 앞 석등, 3층석탑, 원응국사비, 석조여래좌상, 사천왕석주등이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본래 사찰이름에서 유래된 작은 전 각인 작압전과 대웅보전, 오백나한전, 만세루등과 같은 크고 작은 건물들이 있다.

1958년 불교정화운동 이후 비구니 전문강원을 개설한 운문사는 1987년 승가대학으로 개칭되어 현재까지 경전연구기관으로써 수많은 수도승을 배출하고 있다.

아주 특별한 시간 한개마을

아주 특별한 시간 한개마을

아주 특별한 시간 한개마을

닭 울음소리 들리는 약수로 끓여낸 청송 달기약수닭백숙

성주 한개마을은 600여 년의 역사와 함께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하회마을과 양동마을처럼 요란스럽거나 북적이지 않아 좋다.

그 중 진사댁은 마을에서 유일하게 고택 체험이 가능한 곳이고, 웰빙 시골밥상을 맛볼 수 있는 곳이다.

진사댁은 한개마을에서 고즈넉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다.

한개마을에서 가장 아름답고 정감이 넘치는 곳은 마을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진사댁이다.

너른 앞마당과 철따라 고운 꽃이 피고 지는 화단, 우물과 장독대, 어느 하나 정감가지 않는 곳이 없다.

개인적으로 고택의 아름다움을 가늠하는 요소는 ‘현재 사람이 살고 있느냐’이다. 자연은 사람의 손이 닿거나 인위적인 요소가 더해지면

서서히 망가지지만, 집은 사람의 손길과 온기가 닿아야 제 모습을 당당히 유지하기 때문이다.

진사댁이 아름다운 이유는 사람이 살고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진사댁에는 팔순의 노부부와 함께 딸 이경민 씨가 머물고 있다.

진사댁의 역사는 조선 정조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안채의 상량문으로 보아 정조 혹은 철종 때 건립한 가옥으로 추정하며, 건립 당시 안주인이 안동 예안 출신의 진성 이씨여서 예안댁으로 불렸다.

진사댁으로 불린 것은 그 후의 일이다.

이국희가 집을 매입해 들어와 살면서 1894년 조선 왕조의 마지막 소과에 합격해 진사가 되자 진사댁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진사댁은 안채와 사랑채, 새사랑채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는 기와집이며, 사랑채와 새사랑채는 초가집이다.

안채 왼편으로는 ‘ㄱ’자 형의 새사랑채가 서 있고, 앞으로는 3칸의 사랑채가 넓은 마당을 바라보고 있다.

안채 앞에는 다양한 크기의 옹기들이 오붓하게 모여 있는 장독대와 우물, 넓은 화단이 남아 있다.

고택 가운데 눈여겨볼 것은 새사랑채다. 새사랑채는 진사댁 건물 가운데 가장 늦게 지어졌다.

여성의 공간인 안채와 남성의 공간인 사랑채 사이에 새사랑채를 배치한 것도 특이하지만 마루와 방, 창고가 각각 1칸씩 총 3칸으로 ㄱ자 형태로 지어진 점

계자난간을 단 누마루 같은 마루를 낸 점이 이색적이다.

특히 방으로 들어가는 문 양쪽의 불발기창에 ‘卍’ 모양을 멋지게 내었는데, 다른 민가에서는 볼 수 없는 특별한 문양이다.

진사댁은 한개마을의 수많은 고택 가운데 유일하게 고택 체험이 가능한 곳이다.

고택 체험은 사랑채와 새사랑채에서 가능하다.

새사랑채는 2명이 오붓하게 쓸 수 있는 1칸짜리 작은 방이지만, 마루가 있어서 별도의 공간을 공짜로 얻는 듯하다.

사랑채는 방 2개와 대청으로 이루어졌고, 너른 앞마당이 있어 가족 단위로 머무르기 좋다.

숙박료는 새사랑채가 하루 5만 원이며, 사랑채는 8만 원이다.

진사댁에서는 직접 담근 장과 손수 기른 채소를 재료로 한 웰빙 시골밥상을 맛볼 수 있다.

진사댁 종부 모녀가 차려주는 정성스러운 밥상을 지나친다면 아쉬움이 클 듯하다

진사댁에서는 해마다 겨울이면 메주를 만드느라 매우 분주하다.

올 겨울에도 직접 콩을 삶아 메주를 만들었는데, 경북 청도에서 들여온 콩 13가마니가 사용되었다.

메주 만드는 풍경을 보기 시작한 것은 콩이 거의 삶아질 무렵이었다.

활활 타오르던 아궁이의 열기가 서서히 사그라지고, 가마솥에서 5~6시간 동안 푹 삶은 콩에서는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맛보라며 삶아낸 콩을 한 움큼 집어주는데, 그 고소함이 황홀할 정도다.

전통적인 조리법에는 규격화한 레시피가 따로 없는 것 같다.

그저 오랜 경험에서 나온 자연스러움이 그 집만의 전통을 이어주는 게 아닐까 싶다.

진사댁의 메주 만들기도 그렇다. 메주를 만드는 데는 콩의 품질, 콩을 삶는 시간과 불의 세기 등 여러 변수가 있다.

콩의 재배지가 어딘지에 따라 맛이 다르고, 콩을 삶는 시간과 불의 세기에 따라 메주의 성공과 실패가 좌우된다.

집집마다 메주를 만드는 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닭 울음소리 들리는 약수로 끓여낸 청송 달기약수닭백숙

닭 울음소리 들리는 약수로 끓여낸 청송 달기약수닭백숙

닭 울음소리 들리는 약수로 끓여낸 청송 달기약수닭백숙

울릉도 걷기 여행 빼놓으면 섭섭해요

우리가 흔히 닭요리로 알고 있는 백숙(白熟)은 고기나 생선을 별도의 양념 없이 물에 끓여낸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닭을 넣으면 닭백숙, 생선을 넣으면 생선백숙이라 한다. 끓는 물에 삶아내는 돼지고기나 소고기 수육 역시 큰 의미에선 백숙의 한 종류로 볼 수 있다.

백숙에는 별도의 양념이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물이 상당히 중요하다.

아니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청송 달기약수닭백숙 맛의 비밀을 물에서 찾아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청송군 청송읍 부곡리는 달기약수로 유명한 곳이다.

약수가 솟는 약수탕은 마을을 가로지르는 부곡계곡 곳곳에 자리해 있다.

곳곳이라? 그렇다. 달기약수가 솟는 약수탕이 한두 곳이 아니다.

마을 입구 하탕에서 상류의 상탕에 이르는 700m 구간에 신탕, 중탕, 천탕 등 모두 5곳의 약수탕이 있다.

이것도 구간으로 구분했을 때 얘기지, 상탕에만도 약수 나오는 샘이 3곳이나 되고, 천탕의 경우도 2곳에서 약수가 솟는다. 그래서 약수가 나오는 샘으로 치면 그 숫자는 10곳이 넘는다.

이들 약수탕에서는 매일 일정량의 물이 나온다.

신기한 건 아무리 가물고 추워도 마르거나 얼어붙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을 주민들은 이에 감사하는 의미로 매년 단오에 영천제를 지낸다.

달기약수는 탄산과 철분을 함유하고 있어 ‘단맛 빠진 사이다에 녹물을 섞어놓은 것’ 같은 맛을 낸다. 역하다면 역할 수도 있는 그 맛 때문에 설탕이나 꿀을 섞어 마시는 이들도 있다.

그럼에도 이곳 약수탕을 찾는 이들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지는 건 예부터 위장병과 빈혈 그리고 신경통에 효험이 있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약수를 떠가려는 이들을 위해 약수탕 주변 상가와 식당에서 물통을 판매하기도 한다.

달기약수는 약수가 나오는 위치에 따라 물맛과 성분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상탕과 하탕이 탄산이 많은 데 비해 중탕은 철분이 많다고 한다. 수량은 하탕보다는 중탕과 상탕이 많은 편이다.

달기약수는 닭백숙과 만날 때 진가를 발휘한다. 닭과 약수의 만남. 솔직히 그리 특별할 건 없다.

하지만 이 둘의 만남은 다르다. ‘달기’라 불리는 약수 이름 때문이다. 달기약수가 발견된 건 조선시대 말.

금부도사를 지내고 낙향한 권성하라는 사람이 마을 주민들을 위해 수로 공사를 하던 중 발견했다고 전한다.

한데 그 이름의 유래가 재미있다.

발견 당시 바위틈에서 나는 ‘꼬르륵 꼬르륵’ 약수 솟는 소리가 마치 암탉이 알을 낳을 때 내는 소리와 비슷하다고 해서 그 이름을 ‘달계’라 붙였다는 것이다.

한편에선 ‘닭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건 중요치 않다.

어차피 둘 다 닭과 관계된 이름이니 말이다.

닭과 연관된 이름의 약수로 끓여낸 닭백숙. 게다가 약수에 포함된 철분 등의 성분이 닭 특유의 비린내를 잡아주고 맛까지 좋게 해준다.

음식에도 궁합이 있다지만 달기약수와 닭처럼 찰떡궁합이 또 있을까 싶다.

그럼 달기약수닭백숙은 어떻게 시작됐을까.

누구는 영천제를 지낸 뒤 마을 주민들끼리 나눠 먹은 닭백숙이 그 시작이라 하고, 누구는 사위들에게 삶아 먹인 닭백숙이 입소문을 타면서 유명해졌다고도 한다.

그 시작이야 어찌되었든, 1970년대에는 닭백숙을 끓여 먹기 위해 계곡을 찾는 이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고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곳 여관에 한동안 머물고 간 뒤로는 달기약수닭백숙을 두고 만병통치약이라는 소문까지 돌았다고 하니 그 유명세가 어떠했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달기약수닭백숙은 담백한 맛이 일품이다. 약수의 탄산과 철분 성분이 기름기를 제거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인삼과 황기 등 다양한 약재가 들어가 약선음식으로도 손색이 없다.

소화력이 떨어지는 노약자나 어린이, 임산부, 회복기 환자에게 더없이 좋은 보양식으로 통하는 이유다.

달기약수닭백숙을 맛있게 먹는 방법은 따로 없다. 그냥 그 고유의 맛을 즐기면 된다.

때문에 함께 나오는 밑반찬도 볶거나 기름을 두른 것보다는 마늘, 깻잎, 고추 등을 간장에 조린 깔끔한 맛의 장아찌류가 주를 이룬다.

닭백숙의 가격은 3만 원에서 3만 5,000원 선으로, 3~4명이 먹기에 적당하다.

이곳 식당들에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메뉴가 있다. 바로 닭불고기다.

닭가슴살을 잘게 다져 매콤한 양념과 함께 버무려 석쇠에 구워내는 닭불고기는 닭백숙과는 또 다른 맛을 자랑한다.

떡갈비를 닮은 닭불고기는 식당에 따라 가슴살에 손질한 닭발을 함께 넣어 내기도 한다.

울릉도 걷기 여행 빼놓으면 섭섭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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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 걷기 여행 빼놓으면 섭섭해요

경북 영주 무섬마을 물 속에 안긴 선비의 섬

어디든 마찬가지겠지만 깊은 섬 울릉도를 제대로 여행하고 싶다면 ‘걷기’가 필수다.

빠듯한 일정에도 무리없이 울릉도 속살을 구경할 수 있는 걷기 명소를 준비했다.

앞서 성인봉~나리분지와 독도는 살펴봤으니 이들을 제외한 걷기에 나서보자.

울릉도민들이 다니던 내수전~석포옛길과 2012년 연도교로 연결된 관음도, 그리고 도동과 저동을 잇는 해안산책로가 주인공이다.

울릉도 일주도로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저동부터 도동~남양~태하~천부~석포~섬목까지 이어지던 해안도로는 거의 한 바퀴를 다 돌아갈 즈음 뚝 끊긴다.

섬목과 석포에서 처음 출발했던 내수전까지 길이 이어지지 않는 것.

직선으로는 2.5km쯤 되는 내수전과 석포를 차량으로 이동하면 2시간이 필요하게 된 이유다.

차량통행이 가능한 포장도로는 없지만 내수전~석포 구간을 잇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나는 실제로 울릉도민들이 걸어 다니던 옛길이고 또 하나는 섬목과 저동을 잇는 물길이다.

하루 4~5회 정도 섬목과 저동을 오가는 페리가 다닌다.

차량선적도 가능해 배시간만 잘 맞추면 제법 유용하지만 겨울철에는 거의 운행을 하지 않는다.

본격적인 내수전~석포 옛길은 내수전전망대 초입에서 시작한다.

일출일몰 명소로 알려진 내수전전망대가 지척에 있다. 석포까지 3.4km. 차량을 가져와 왕복해도 7km정도니 그리 무리는 없다.

야생섬의 속살과 울릉도민들의 애환을 품은 부드러운 흙길이 펼쳐진다.

중간중간 오르막길이 있지만 남녀노소 별 무리 없이 걸을 수 있는 길이다.

북면에 살던 울릉도 꼬마들이 울릉읍의 학교를 오갈 때 걷던 길이란다.

얼마나 걸었을까. 산속 치고는 제법 너른 쉼터가 나온다. ‘정매화’라는 인정 많은 이가 살았던 정매화골이다.

1981년까지 이효영씨 부부가 이곳에 터를 잡고 살면서 폭설 등으로 조난당한 길손들을 구조했다는 내용의 안내판이 있다.

시원한 물로 목을 축이고 잠시 쉬어가자.

울릉읍의 내수전에서 북면의 석포로 향하는 길, 이 둘의 경계와 닿자 주민들이 오가던 길임이 더욱 실감난다.

야생성이 묻어나는 북면으로 들어서자 관음도가 보인다.

석포마을 안내판을 따라가면 두 갈래길이 나오는데, 오른쪽의 ‘섬목가는 옛길’로 가야한다.

포장도로를 따라가면 안용복 기념관과 닿는다. 안용복 기념관을 등에 두고 죽도가 한눈에 펼쳐진다.

이곳에서 천부로 가는 버스가 선다. 힘들거나 버스 시간을 딱 맞췄다면 이곳에서 버스를 타고 천부로 가도 괜찮다.

오늘 종착점인 러일전쟁유적지까지는 조금 더 걸어야 한다.

일출과 일몰을 모두 볼 수 있어 석포일출일몰전망대, 라고도 부른다.

1905년 러일전쟁을 위해 일본해군이 망루를 설치했던 곳이다.

시원하게 펼쳐진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2012년 울릉도 본섬과 잇는 연도교가 놓인 관음도. 섬의 새끼섬이자, 걸어서 갈 수 있다는 편의성 덕분에 찾는 이들의 발길이 늘고 있다.

울릉도 개척당시 풍랑에 휩쓸려 관음도에 닿은 이들이 잡아먹은 깍새의 맛을 잊지 못해 이 섬으로 깍새를 잡으러 왔다고 ‘깍새섬’이라고도 불린다.

총면적 약 70,000㎡에 높이 106m, 둘레 약 800m에 달하는 고즈넉한 섬이다.

울릉도 부속섬 중에서는 독도와 죽도의 뒤를 잇는 넘버3를 차지한다. 사람은 살지 않는다.

무인도에 대한 환상을 충족시켜주기라도 하듯 관음도는 조용하다. 관음도에 입도하기 위해서는 매표를 해야 한다.

성인 4000원.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근사한 연도교가 기다리고 있다.

다리 밑으로 펼쳐진 바다색은 그동안 이 땅에서 보던 물빛과는 다르다. 북면의 해안도로를 따라 마주한 삼선암을 내려다보는 풍광이 일품이다.

울릉도에 반해 하늘로 돌아갈 시간을 놓친 세 선녀가 벌을 받아 삼선암이 됐다는 전설도 들어보자.

끝까지 늑장을 부린 막내가 변했다는 삼선암에는 풀도 나지 않는다는 얘기에 웃음이 터진다.

경북 영주 무섬마을 물 속에 안긴 선비의 섬

경북 영주 무섬마을 물 속에 안긴 선비의 섬

경북 영주 무섬마을 물 속에 안긴 선비의 섬

원주에 이런 곳이 주방용품 화장품 잇는 산업관광

처음에는 ‘물섬마을’이라 불렸다고 전해진다.

발음상의 이유 때문인지 ‘ㄹ’이 빠지고 무섬마을이 되었다.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에 폭 안긴 자태가 영락없는 물속의 섬이다.

양반도 평민도 모두 함께 공부했다는 조용한 선비의 마을, 무섬마을로 들어서보자.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동해로 향하다 방향을 틀어 중앙고속도로 내려서면 충북 제천과 단양을 지나 경상도 땅에 들어선다.

곧 경북 영주를 필두로 양반의 고장이 시작된다.

영주와 이웃한 봉화 닭실마을과 안동 하회마을은 전국구 양반마을 아니던가. 이웃한 영주에는 그보다 덜 알려졌지만 그래서 더 고즈넉한 양반마을이 있다.

‘양반마을’보다는 ‘선비마을’이 더 잘 어울리는 공간, 삼면이 물줄기에 안긴 무섬마을이다.

양반과 평민 함께 공부하던 육지 속 섬마을

무섬마을을 보면 세 번 놀란다.

우선 마을을 품은 산과 물줄기에 놀라고 그 안에 들어선 고택들에 놀란다.

마지막으로 이 마을이 품은 개방·개혁 정신에 놀란다.

자연환경, 즉 비주얼(Visual)은 물론 멋진 몸매와 정신까지 갖춘 무섬마을에서 안빈낙도의 삶을 꾸려가던 선조들을 만나보자.

중앙고속도로에서 영주IC로 나와 영주시내 초입에서 문수면 와현리 방향으로 향한다.

수도리 전통마을 표지판이 나오면 이를 따라가면 된다. 무섬마을에 들어서려면 수도교를 건너야 한다.

마을 뒤편에 자리한 무섬교도 육지속 섬마을과 바깥세상을 이어주는 통로다.

이들 다리가 놓이기 전, 마을과 바깥을 잇던 것은 외나무다리였다. 마을 주민들은 “외나무다리로 꽃가마 타고 시집왔다 죽으면 그 다리로 상여가 나갔다”고 했다.

무섬마을로 들고 나는 시작과 끝을 보아온 외나무다리는 여전히 무섬마을의 안과 밖을 잇는다.

무섬마을을 감싸 안은 물줄기는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이다.

아예 물 위에 떠 있는 섬은 아니지만 보기에는 ‘물속의 섬’ 같다.

삼면은 내성천 줄기에 안겨있고 뒤로는 태백산 끝자락과 이어진다.

강원도 영월의 청령포를 떠올리면 모양은 비슷하다. 단종의 한(恨)이 건너지 못할 만큼 깊은 물과 도무지 빠져나갈 수 없을 절벽으로 막혔다는 점만 뺀다면.

한문으로도 똑같다. 물수(水)에 섬도(島)를 써서 수도리다.

무섬마을은 경북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에 자리한다. 뭍과 이어진 마을 뒷산은 태백산 줄기, 강 건너에는 소백산 줄기가 스며든다.

태백산에서 이어지는 내성천과 소백산에서 흐르는 서천이 이곳에서 몸을 섞어 ‘물도리동’이라고도 불렸다.

앞산(남산)에 올라 무섬마을을 살펴보면 물줄기에 물줄기가 더해지고 산과 물이 태극모양으로 돌아나간다.

음양의 조화가 좋아 자식이 잘되고 의식이 풍족하다고 해석된다.

또 무섬마을을 두고 물위에 활짝 핀 연꽃 모양의 땅,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고도 한다. 이런 지형에서는 학자들이 많이 배출된다고.

수도교를 건너자마자 좌회전하면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해우당 고택 행랑채에 관광안내소가 있으니 꼭 들르자. 지도도 챙기고 선성 김씨 종손 김광호 선생의 이야기도 들어보자. 무섬마을의 역사는 길지 않다.

“1666년, 현종7년에 반남 박씨가 강 건너 마을에서 이곳으로 분가하러 들어왔어요. 그때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거죠.

그의 증손녀 사위 선성 김씨가 이곳에 정착하면서 두 성(姓)씨 가 모여 사는 집성촌이 되었어요.

해방 전만해도 100여 가구가 넘는 큰 마을이었는데 80여년 전쯤 갑술년 수해라고 큰 홍수가 나서 절반은 손실됐지요.

지금 남은 고택은 43채에요. 사람이 사는 집은 26채 뿐이고요. 독거노인이 많다는 뜻이죠.

평균연령은 78세, 우리 마을에서 60대는 2명 뿐이에요. 청년들이죠. 90은 넘어야 노인대접을 받아요.”

40여 채의 고택 중 30여 채가 조선 후기의 사대부 가옥이다.

반남 박씨 입향시조가 지은 만죽재, 선성 김씨 입향시조가 지은 해우당 등을 포함해 9채가 지방문화재이다.

일제강점기, 김화진 선생이 세운 아도서숙도 빼놓을 수 없다.

아도서숙은 1933년 일제에 강제로 폐숙될 때까지 주민들에게 한글과 농업기술을 교육했던 독립운동의 본거지였다. 고증을 거쳐 복원을 준비하고 있다.

원주에 이런 곳이 주방용품 화장품 잇는 산업관광

원주에 이런 곳이 주방용품 화장품 잇는 산업관광

원주에 이런 곳이 주방용품 화장품 잇는 산업관광

조선의 르네상스를 꿈꾸었던 정조를 만나다 수원 화성

강원도의 관문이자 ‘강원도’ 지명이 유래한 마을 원주(原州).

영서지방의 큰 산인 치악산(1288m)을 필두로 맑은 물길 자랑하는 섬강과 간현유원지 등을 품은 고장.

오늘은 원주의 색다른 표정을 찾아 여행을 떠나보려 한다.

이름은 조금 생소하지만 알고 보면 신통방통 재미난 ‘산업관광’이 바로 주인공이다.

가족과 함께 해도 좋을 체험여행, 산업관광 핫스팟을 소개한다.

초콜릿 좋아하는 사람 다 모여라

원주시 행구동에 자리한 초콜릿황후는 초콜릿에 특별한 맛과 효능을 더한 ‘발효 초콜릿’ 전문점이다.

12년을 투자해 만들어낸 천연발효 초콜릿은 최소 3일 이상 옹기에서 숙성시켜 깊은 맛을 낸다.

‘손탁호텔’이라고 불리는 초콜릿황후의 건물은 발효초콜릿과 발효음료를 만드는 공간인 동시에 그들을 맛볼 수 있는 카페이자 연구실, 체험 공간.

이곳에 가면 첨가물 없이 발효숙성만으로 100일 이상 장기보관 가능한 신비로운 초콜릿을 만날 수 있다.

이곳에서는 아이들과 어른 모두를 위한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4~6세 아이들을 위한 곰돌이 발효초콜릿 만들기(40~60분 소요, 1인 1만8000원)와 유치원생 이상 체험 가능한 카카오 케이크볼 만들기(40~60분 소요, 1인 1만5000원)뿐 아니라,

초등학생 이상 체험 가능한 꽃잎 발효초콜릿 만들기(60~90분 소요, 1인 2만5000원)와 초콜릿 퐁듀 만들기(30분 소요, 1인 2만원), 카카오 케이크 바 만들기(30분 내외, 1인 1만5000원)등이 주인공이다.

고등학생 이상을 대상으로 한 핸드드립 커피 체험(90분 소요, 1인 2만5000원)도 찾는 이들이 많다.

모든 프로그램이 4명 이상 신청 가능하다. 하루 전 예약 필수.

강원도 원주가 자랑하는 식물박물관 원주허브팜 1만7000평방미터의 널찍한 공간을 채운 장미뜰·가축뜰·수련뜰·실내뜰·허브족욕뜰 등 다양한 뜰과 연못에 총 1000여 종에 가까운 식물들이 자라고 있다.

특히 수천개의 LED 빛이 밝히는 색동불빛정원의 야경과 허브 족욕은 원주의 데이트 코스로 인기라고. 고양이들이 반겨주는 허브 족욕은 입장료와는 별도의 요금(1000원)이 더해진다.

원주허브팜은 크게 실내 건물과 야외 공간으로 나눌 수 있다.

앞서 설명한 식물박물관은 야외 공간을 채우며 3층 짜리 건물에서는 카페와 식당, 허브샵 등이 운영 중이다.

허브차와 허브 아이스크림, 허브 돈가스와 비빔밥 등을 맛볼 수 있어 <원주허브팜>을 찾는 이들에게 다양한 허브 체험을 제공하고 있다.

아시아 최초의 의료기기 상설전시장으로 알려진 ‘원주 의료기기종합지원센터’. ‘대체 뭐 하는 곳인가’ 하는 의문점은

원주 의료기기 테크노밸리(대표·정완길) 내의 의료기기 상설전시장을 둘러보면 금세 해결된다.

그중 관람객들의 관심이 최고치에 달하는 장소는 ‘세일즈존’.

다양한 의료기기는 물론 생활기기와 미용기기들이 전시·판매되고 있다. 여기에 기능성 화장품까지 더해져 다양성을 더하는데다 시중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어 매력적이다.

2015년 7월 초까지 기업부스관 리뉴얼 작업으로 주말 관람은 어렵다.

주중에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누구나 관람이 가능하다. 미리 예약할 경우 운영사무국 직원의 설명을 더할 수 있으니 기억해두자.

봄과 가을 1년에 2차례에 걸쳐 특가 기획전을 진행할 계획이다. 가정에서 유용한 홈케어 제품을 직접 보고 체험한 뒤 저렴하게 살 수 있어 유용하다.

조선의 르네상스를 꿈꾸었던 정조를 만나다 수원 화성

조선의 르네상스를 꿈꾸었던 정조를 만나다 수원 화성

조선의 르네상스를 꿈꾸었던 정조를 만나다 수원 화성

역사가 흐르는 동네 뒷산 의왕시 모락산

짧은 주말, 아이들에게 역사적으로 유익한 곳을 방문하고 싶은 마음이라면 수원과 화성을 1박 2일로 다녀오는 것은 어떨까?

수원과 화성에는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루었던 정조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들이 숨어있다.

조선후기의 걸출한 군주 정조가 꿈꾸었던 새로운 세상을 찾아 발걸음을 옮겨보자.

특히 수원화성은 그 아름다움과 규모 그리고 과학성으로 인해 1997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다.

우리나라 성곽건축기술의 정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성곽이 가지고 있는 모든 기능을 살펴볼 수 있는 이곳은 매년 수많은 관광객들이 모여드는 자랑스러운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수원화성은 둘레가 약 5.7킬로미터에 성벽의 높이는 평균 5미터 정도로 견고하고 튼튼한 성이다.

화성을 건축하는데 들어간 벽돌 수만 하더라도 거의 70만장에 육박한다.

한국전쟁당시 화성 성곽의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으나, [화성성역의궤]에 자세한 건축과정이 기록되어 있어서 복구가 가능했다.

수원화성을 건축하는데 큰 공을 세운 사람은 정조시대의 대 학자 정약용 이다.

정약용 선생은 중국의 [기기도설]이라는 책을 참고로 하여 거중기를 발명하였으며,

도르레를 이용한 거중기를 통해 성곽을 건축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크게 단축시켜 백성들의 고충을 덜어주었다.

수원화성의 성문은 모두 네 개(장안문, 팔달문, 창룡문, 화서문)인데 그 중 정문에 해당하는 문은 장안문이다.

장안문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성문으로 그 크기와 아름다움이 국보 제 1호인 숭례문과 비교되기도 한다.

장안문은 철통 방어시설인 옹성을 갖추고 있는데, 성문을 항아리 모양으로 한 겹 더 에워 싼 성벽을 의미하는 옹성은 화공 등의 공격에 대비하기위한 매우 훌륭한 방어시설이다.

북문인 장안문이 정문 구실을 했던 이유는 정조가 사도세자의 무덤을 살피러 행차를 할 때 한양에서 수원화성으로 들어서는 가장 첫 번째 입구이기 때문이었다.

장안문을 지나면 수원화성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인 화홍문을 만날 수 있다.

총 일곱 개의 수문 위에 세운 누각인데 수문 아래로 떨어지는 물줄기가 마치 꽃비를 뿌린 듯이 아름답다.

사시사철 너무나 아름다운 화홍문 주변은 늘 많은 여행객들로 붐빈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는 노론과 소론의 당파싸움에 희생되어 아버지 영조의 명으로 뒤주에 갇혀 목숨을 잃었다.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는 왕이 된 후 가장 먼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원래 있던 자리에서 조선 제일 명당인 융릉으로 옮기고자 했다.

그러나 당시 융릉은 사람들이 이미 많이 모여서 살고 있는 곳이었다.

정조는 그 사람들을 강제 이주시키지 않고 새로운 장소에 성을 쌓고 집을 지을 돈과 이사비용까지 챙겨 사람들을 살게 하는데, 그 곳이 바로 지금의 수원화성이다.

사도세자를 모신 융릉에는 훗날 장조로 추존된 사도세자뿐만 아니라 그의 부인 혜경궁 홍씨도 함께 묻혀있다.

융릉은 다른 능과는 좀 다르게 정자각과 능침이 이루는 축이 일직선이 아니라 약간 비껴서 조성되어있는 것이 특징인데,

이는 효심 깊은 정조가 아버지의 능을 조성할 때 뒤주에 갇혀 돌아가실 때도 답답하셨을 것인데 정자각 바로 뒤에 능침을 조성한다면 얼마나 더 답답하시겠느냐 라는 말에 따른 것이라 한다.

융릉과 한 영역에 있는 건릉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와 효의왕후의 능이다.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의 탕평책을 이어받아 정치를 안정시키고 왕권을 강화하였으며 이상에 걸맞은 개혁정책을 펼친 조선후기의 르네상스를 일구어낸 왕으로 평가받고 있다.

규장각을 설치하여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검서관 제도를 마련하여 능력 있는 서얼을 적극적으로 등용하였는데,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와 같은 학자들이 대표적 인물이다.

정조는 수원화성을 건축하며 그가 꿈꾸는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려고 하였다.

그는 화성축조과정에서 정약용과 같은 걸출한 인물을 등용하기도 하였지만, 그의 뜻을 제대로 펼치기도 전에 돌아가셨고 정조가 없는 조선의 개혁은 다시 뒷걸음칠 수밖에 없었다.

건릉을 돌아보며 정조의 개혁에 대한 이상과 의지를 다시 한 번 떠올려 보자.

역사가 흐르는 동네 뒷산 의왕시 모락산

역사가 흐르는 동네 뒷산 의왕시 모락산

역사가 흐르는 동네 뒷산 의왕시 모락산

고양 서삼릉누리길 초록빛 자연을 걷다

경기도 의왕시 모락산은 주민들이 산보하듯 오르내리는 나지막한 동네 뒷산이다.

하지만 이 산에는 조선시대 이전부터 한국전쟁을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간이 공존한다.

고대 고분으로 추정되는 유적이 있고, 조선 세종의 아들 임영대군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진다.

한국전쟁 당시 정상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부근에는 현대에 세워진 전승기념비가 있다.

국기봉에는 태극기가 펄럭인다. 낮은 산이지만 다양한 수준의 코스가 마련돼 산을 오르는 재미가 좋다.

산 주변에 백운호수가 있고 호수 옆으로 먹을거리가 가득하다.

타 지역 사람들이 당일 산행을 위해 모락산을 찾는 이유는 충분하다.

경기도 의왕시 정중앙에는 모락산이 자리한다.

해발 385m의 모락산은 절벽과 기암괴석, 암릉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조선시대 세종의 넷째 아들 임영대군이 매일 이 산에 올라 서울을 향해 망궐례(멀리 있는 궁궐을 바라보고 행하는 예)를 올려

‘서울을 사모하는 산’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설과 임진왜란 때 왜구들이 이 산에서 사람들을 몰아 죽였다는 데서 모락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오래 걷지 않아도 도심이 내려다보이는 탁 트인 전망과 마주하니, 모락산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전자가 더 맞지 않을까 싶다.

정상인 국기봉으로 향하는 길은 여러 가지다. 그중 난이도가 가장 높은 계원예술대학교 옆 갈미한글공원에서 시작하는 길로 정했다.

이 길이 어려운 이유는 다른 등산로에 비해 다듬어지지 않은 흙길이기 때문이다.

출발하고 500m를 채 못 가서 모락산 산신을 모신 산령각과 마주한다. 이곳에서부터 가파른 산길이 시작된다.

그리 높지 않은 산임에도 거친 숨을 몰아 쉬는 등산의 묘미를 즐길 수 있는 구간이다.

잎이 무성한 나무들이 햇빛을 가려주니 길은 고되어도 바람은 시원하다.

또다시 500m, 특이한 모양의 바위들을 구경하며 길을 이어가다 보면 사인암에 도착한다.

임영대군이 자주 찾았다는 바위로 전해지는데, 이름의 유래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사인암은 기암절벽이다. 그 위에 오르면 의왕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시계가 좋은 날은 멀리 관악산까지 볼 수 있다.

백제시대에 축조된 모락산성에 관한 안내문을 지나면 6.25 전승기념비가 있는 넓은 쉼터가 나온다.

한국전쟁 당시 모락산을 포함한 수리산과 백운산 주변은 수도 서울을 탈환하기 위해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요충지였다.

1951년 1월, 한국군은 모락산 정상에서 중공군과 벌인 전투에서 승리했다. 이를 기리는 전승기념비가 1999년에 세워졌다.

이 부근에서 매년 전승기념비 참배 행사가 열린다. 국기봉 주변 쉼터에 한국전쟁 관련 사진들이 전시되고, 사람들이 모여 지난 시간에 대한 애도를 표한다.

조금 더 걸어 팔각정을 지나면 태극기가 펄럭이는 모락산 정상인 국기봉에 도착한다.

모락산에는 임영대군에 얽힌 이야기가 곳곳에 전해진다.

정상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절터약수터가 있는데, 이곳 역시 임영대군이 창건한 경일암의 옛터로 추정된다.

지금도 흙바닥에서 건물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발굴조사 당시에는 기와, 토기, 자기 파편 등이 여러 점 발견되었다.

현재 등산객들을 위한 쉼터와 팔각정이 마련되었고, 두 곳의 샘물만이 옛날처럼 흐르고 있다.

고양 서삼릉누리길 초록빛 자연을 걷다

고양 서삼릉누리길 초록빛 자연을 걷다

고양 서삼릉누리길 초록빛 자연을 걷다

파주골순두부 박가네오리 농가맛집1호 청산별미

짙푸른 녹음과 왕가의 기품이 어우러진 서삼릉을 시작으로 이국적인 초원과 정겨운 마을 풍경, 잠시 걸음을 멈추고 즐기는

막걸리 한잔의 여유를 만날 수 있는 서삼릉누리길은 고양의 다양한 매력을 즐길 수 있는 종합선물세트 같은 코스다.

수도권에선 지하철만 타면 언제든 부담 없이 떠날 수 있으니 도심 속 힐링 산책길로도 제격이다.

권력이 무상하더라, 서삼릉

중종(1488~1544)의 계비였던 장경왕후(1491~1515)의 능인 희릉과 그의 아들인 인종(1515~1545)의 능인 효릉,

철종(1831~1863)의 능인 예릉이 한데 자리한 서삼릉은 서오릉과 함께 고양을 대표하는 유적지다.

왕릉은 그 주인이 누구인지가 가장 큰 관심사일 수밖에 없는데, 이곳 서삼릉은 당대 최고의 지위에 올랐으나

냉혹한 정치권력에 희생될 수밖에 없었던 인물들이 한데 자리해 더욱 눈길을 끈다.

장경왕후는 후궁으로 궁에 들어와 모든 여인들이 선망하는 왕비의 자리까지 올랐지만 겨우 스물다섯의 나이에 산후병으로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목숨과 맞바꾼 아들 인종은 훗날 임금의 자리까지 오르지만 계모인 문정왕후(1501~1565)의 등살을 이기지 못하고 재위 9개월 만에 숨을 거두고 만다.

이들 모자(母子)의 능은 본래 지아비이자 아버지인 중종 곁에

자리했으나 그마저도 문정왕후의 계략으로 정릉이 옮겨지면서 둘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강화도령’으로 잘 알려진 철종 또한 평범한 시골농부의 삶을 살다가 권력자들에 의해 왕위에 올랐고, 정치적으로 무엇 하나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허수아비 임금에 불과했다.

결국 이들은 모두가 욕망하는 자리에 앉았지만 여느 촌부만큼도 행복하지 못했다. 이들의 능을 차례로 돌아보다 보면 절로 권력의 무상함과 함께 진정한 행복의 의미를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짙푸른 초원과 하얀색 울타리, 한가로이 풀을 뜯는 흑갈색 말들이 한 폭의 수채화처럼 어우러진 원당종마목장은 각종 CF와 드라마 촬영지로도 인기가 높다.

입구부터 아름다운 은사시나무 가로수길이 펼쳐지고, 마치 유럽의 어느 목장에 온 것처럼 이국적인 풍경을 눈에 담으며 걷다 보면 북적이는 도시와는 전혀 다른 여유를 느낄 수 있다.

간혹 멋스러운 갈기를 흩날리며 기수와 한몸이 되어 달리는 경주마들도 만날 수 있어 색다른 볼거리가 된다.

힘찬 말발굽소리와 시원스런 속도감에 마음도 뻥 뚫리는 듯 하다.

본래 우수한 종마들을 육성하고 관리하기 위해 지어진 이곳은 지난 1997년부터 목장 일부를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최근엔 어린이들을 위한 체험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는데, 직접 말을 타보는 기승체험은 물론 이를 사진으로 찍어 기념 머그도 제작해준다.

또 보호자 동반 하에 마방 등 말 관련 시설 견학도 가능해 가족 단위 관람객이라면 아이들에게 특별한 추억을 선물해줄 수도 있다.

원당역 바로 옆에 자리한 배다리술도가는 1915년에 처음 문을 연 이래 무려 5대째 가업을 잇고 있다.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다시 그 아들의 아들로 이어진 세월의 맛은 1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깊고 향기롭다.

이곳에서 만든 막걸리가 전국적인 유명세를 얻은 데는 故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특별한 인연이 계기가 되었다. 우연히 근처를

지나던 길에 국밥집에서 배다리막걸리를 처음 접하게 된 박 전 대통령은 그 깔끔한 맛에 반하여 아예 청와대로 주문해 마실 만큼 즐겨 찾았다.

덕분에 ‘대통령 막걸리’라는 애칭까지 얻었는데, 지금도 그 맛을 잊지 못해 백발성성한 단골손님들이 멀리서 일부러 찾아온단다.

파주골순두부 박가네오리 농가맛집1호 청산별미

파주골순두부 박가네오리 농가맛집1호 청산별미

파주골순두부 박가네오리 농가맛집1호 청산별미

위로가 되어주는 따뜻한 국밥 한 그릇 밀양 돼지국밥

잘 먹고 잘 사는 동네의 밥상은 뭐가 다를까? 포천에는 원조 맛집들이 맛과 건강을 지키고 나섰다.

콩으로 만든 담백한 순두부는 웰빙음식의 선두주자로서 지존의 자리에 올랐다.

이 한 몸 받쳐 사람을 건강하게 하리라는 신념으로 숯불에 몸을 던진 오리는 기름기 쫘~악 뺀 채 환골탈태했다.

버섯을 직접 재배해서 밥상에 내어놓는 버섯요리의 1인자도 포천에 있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신의 손맛이 궁금하다면 포천으로 떠나보자.

구수한 순두부를 보리밥에 슥슥 비벼먹는 원조파주골순두부

포천 43번 국도를 달리다 보면 영평천을 끼고 파주골 순두부촌이 형성되어 있다.

얼핏 봐도 10여 개가 넘는다. 여러 집 중에서 원조를 찾기란 어렵지 않다.

‘원조파주골순두부’ 입간판이 큼직하게 서서 소리 없이 안내한다.

청와대처럼 파란색 기와를 올린 큰 한옥이 위풍당당 원조임을 과시한다. 어지간한 단체손님이 와도 문제 될 것이 없을 것 같은 규모다.

원조파주골순두부의 사장 김예주 할머니는 30여 년 전 등산객에게 무료로 순두부와 보리밥을 제공하다가 반응이 좋아서 본격적으로 식당을 운영했다고 전한다.

입소문을 타면서 순두부의 살아있는 전설이 되었는데 이후 순두부집들이 많이 생겼지만, 그 아성을 넘볼 수 없어 보인다.

주문과 동시에 콩나물, 상추 겉절이, 열무김치, 무채무침 등 반찬 엳아홉 개가 깔린다.

대부분 양념이 과하지 않으면서 간이 심심하다. 넓은 대접에 함께 나오는 보리밥은 양이 푸짐하다.

드디어 우윳빛의 순부두가 올라온다.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김은 구수한 향을 사방에 날려 보낸다.

첫맛은 심심하다. 뒤이어 고소한 맛이 혓바닥을 휘어 감더니 목젖까지 점령해버린다.

이 맛을 보려고 전국의 미식가들이 앞다퉈 이곳을 찾는다. 한 번의 숟가락질은 끊어질 줄 모르고 계속 이어진다.

간장에 쪽파, 깨소금 등을 넣어 만든 양념장을 비벼 맛을 보니 파향이 순두부와 어우러져 감칠맛이 난다.

보리밥에 순두부를 넉넉하게 넣고 각종 나물, 참기름, 김가루, 된장찌개 등을 넣고 비벼 먹으니 정말 제대로 밥 먹은 기분이다.

여름 한 철 깊이울 유원지는 피서객들로 북적인다. 이곳에 신북 오리촌이 있다. 10여 개의 오리전문점들이 모여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먼저 깃발을 꽂은 식당은 ‘박가네 오리’다. 1994년 오리사냥으로 시작했다가 사장의 성(姓)을 따서 지금의 상호로 변경했다.

오리고기 한 마리를 주문하면 몸통, 날개, 똥집이 꼬치에 꽂혀 8개 정도 나온다.

3~4명이 넉넉하게 먹을 양이다. 흔히 오리는 로스구이, 진흙구이, 주물럭 등으로 많이 먹는데 이 집은 20년 전부터 오직 회전구이에 주력하고 있다.

꼬치에 끼운 오리고기를 숯불 사이에 꽂으면 자동으로 회전하면서 기름기는 빠지고 고기는 노릇노릇하게 익는다.

적당히 익은 고기는 꼬치에서 뽑은 뒤 보온 열판에 올려놓고 먹으면 된다. 딱딱해지기 쉬운 다 익은 고기를 보온 열판이 항상 같은 온도를 유지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