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함께 지켜요 태안 유류피해극복기념관과 태배길

바다를 함께 지켜요 태안 유류피해극복기념관과 태배길

바다를 함께 지켜요 태안 유류피해극복기념관과 태배길

휴일N 놀러와유 遊 서천갯벌

2021년 화창한 어느 가을날, 태안 앞바다에 섰다.

서해안 물빛이 이리 고왔나 놀랄 만큼 바다가 맑고 아름답다.

만리포해수욕장 끝자락에서 만난 유류피해극복기념관이 아니면 이 바다가 10여 년 전, 기름으로 뒤덮였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릴 뻔했다.

2007년 12월 7일, 만리포 앞바다에서 유조선 허베이스피리트호와 해상 크레인이 충돌해 엄청난 기름이 유출되는 불행한 사고가 발생했다.

시커먼 기름이 바다를 뒤덮은 끔찍한 장면이 TV로 전송됐다.

검게 물든 바다는 쉽게 회복되지 못할 듯 보였다.

전문가들조차 태안 앞바다가 회복되려면 수십 년이 걸릴지도 모른다는 암울한 전망을 했다.

이후 전문 방제 인력 외 전국 각지에서 123만 명이 넘는 자원봉사자가 태안으로 몰려와 기름 제거에 구슬땀을 흘렸다.

자원봉사자가 인간 띠를 이뤄 바다의 기름띠를 제거하는 작업에 동참했다.

그 결과 만리포해수욕장은 2008년 6월, ‘해수욕 적합’ 판정을 받고 다시 개장하는 기적이 일어났다.

당시 태안 앞바다에서 발생한 충격적인 환경오염 사건과 극복 과정이 유류피해극복기념관에 고스란히 기록됐다.

유류피해극복기념관은 사고 발생 10년째가 되던 2017년, 사고 현장인 만리포해수욕장 인근에 문을 열었다.

잊혀가던 유류 유출 사고의 아픔과 극복 과정, 자원봉사자의 헌신을 고스란히 담아낸 공간이다.

2층은 영상체험실로 꾸몄다. 기름 제거하기, 해양 생물 되살리기 등 영상 체험이 가능하다.

‘기름 제거하기’는 터치스크린에서 헌 옷, 고압 세척기,

흡착포 같은 도구를 선택해 기름을 제거하는 놀이 형태 체험으로, 당시 자원봉사자의 노고를 되새기게 한다.

‘해양 생물 되살리기’는 종이에 그려진 바다 생물을 선택해 채색하고, 스캐너로 이미지를 전송해 대형 스크린에 띄우는 체험이다.

바닷속 풍경을 담은 스크린에 ‘웃는 돌고래’라는 애칭이 있는 상괭이를 포함한 태안 앞바다의 해양 생물과 체험객이 띄운 물고기가 함께 노닌다.

태안 바다 환경이 해양 보호 생물로 지정된 상괭이가 나타날 정도로 회복됐음을 보여준다.

유류피해극복기념관 관람 시간은 오전 9시~오후 5시, 관람료는 없다.

해설사 안내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월요일은 휴관한다.

기념관에서 멀지 않은 ‘태배길’도 걸어보길 추천한다.

유류 유출 사고 당시 자원봉사자들이 방제 작업을 하러 오가던 길이 걷기 코스로 다시 태어났다.

전체 길이 약 6.5km 순환형 코스로, 유류 유출 피해의 아픔과 극복의 기쁨을 담아 6개 구간에 각각 순례길,

고난길, 복구길, 조화길, 상생길, 희망길이라고 이름 붙였다.

태배길은 당나라 시인 이태백이 이곳 풍광에 반해 시를 남겼다는 유래가 전할 만큼 경관이 수려하다.

의항과 구름포, 안태배, 신너루 등 해안 풍경이 아름답고, 탁 트인 전망을 제공하는 태배전망대도 있다.

태배길에서 바라보는 풍광은 찰나의 감동을 넘어 묵직한 여운이 남는다.

이 길을 묵묵히 오가며 곳곳을 청소한 자원봉사자의 수고가 뒷받침된 비경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 눈앞에 태안의 아름다운 풍경은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감사와 환경보호 실천 의지를 담아 한 걸음, 한 걸음 디뎌본다.

태안 유류 유출 사고를 얼마나 잘 극복했는지 살펴보려면 주요 피해 지역 가운데 하나인 만리포해수욕장 일대를 돌아보자.

백사장과 갯벌이 드넓은 이곳은 서해안 3대 해수욕장이라는 명성을 되찾았고,

최근 서핑 명소로 자리매김하며 서핑 메카인 미국 캘리포니아에 빗대 ‘만리포니아’라는 애칭도 얻었다.

맑은 바다와 백사장, 갯벌, 서핑에 서해안 낙조까지, 우리가 바다에서 원하는 모든 요소를 갖췄다.

해수욕장 끝자락에 지난 7월 만리포전망타워가 문을 열었다.

높이 37.5m, 지름 15m 규모로 전망대에 오르면 일대가 한눈에 보인다.

전망대가 원기둥 모양이라 한 바퀴 돌며 바다부터 산과 논밭까지 만리포 주변 경관을 두루 조망할 수 있다.

올라갈 때는 엘리베이터를, 내려올 때는 기상 상황이 허락한다면 야외 계단을 이용해보자.

나선형 계단을 따라 내려오며 눈에 담는 풍경이 또 다른 매력을 선사한다.

휴일N 놀러와유 遊 서천갯벌

휴일N 놀러와유 遊 서천갯벌

휴일N 놀러와유 遊 서천갯벌

강화 전등사 죽림다원과 도솔미술관

달에게 자리를 내어줄 시간. 태양이 수평선 뒤로 슬그머니 숨어든다.

하늘은 신비로운 보랏빛으로 가득하고 바다는 태양의 붉은 그림자로 주홍빛으로 물들었다가 서서히 어둑해진다.

태양을 배웅하는 듯, 달을 반기는 듯 순간 날아올라 화려한 군무를 추는 수만 마리의 철새들.

자연이 순리대로 낮과 밤을 교대하는 성스러움을 행할 때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펼쳐진다.

매일 저녁마다 역동적인 수채화가 그려지는 충남 서천갯벌이다.

서해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몰을 볼 수 있는 곳이자 우리나라 3대 철새도래지로 꼽히는 서천갯벌.

새만금 갯벌이 사라진 후 금강하구에 남아있는 유일한 하구 갯벌이다.

과거 이 서천갯벌을 매립하여 산업단지로 만들자는 추진이 있었다.

그러나 생태계를 보존하겠다는 서천군의 현명한 선택으로 한반도는 하나의 보물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만일 이곳을 산업단지로 조성했다면 매년 찾아오는 노랑부리백로, 저어새, 검은머리물떼새 등 멸종위기야생동물들을 다수 잃었을 것이고,

서천갯벌을 터전으로 삼고 있는 101종의 조류들과 95종의 저서동물들을 다시는 볼 수 없었을 것이다.

하마터면 우리가 잃을 뻔한 한반도의 보물은 현재 그 가치를 세계적으로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서천군은 서천갯벌을 필두로 국제생태도시로 발전하고 있다.

한반도의 생태계를 비롯해 세계 5대 기후와 그곳에서 서식하는 동·식물들을 전시하고 교육하는

‘국립생태원’과 세계 해양생물자원을 수집, 보존, 연구, 전시하는 ‘국립해양생물자원관’을 보유하고 있으며,

서해안 6만여 평의 광활한 갈대밭과 1km가 넘는 해송 산림욕장 등이 있어 도시 전체가 살아있는 생태학습장이자 자연박물관이라 할 수 있다.

밀물과 썰물에 따라 모양이 바뀌는 바다와 저 멀리 울퉁불퉁 솟아있는 섬들을 한눈에 담아가며 감상하는 것도 좋지만

서천군에서는 서천갯벌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볼 수 있는 어드벤쳐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프로그램은 아이들을 위해 준비된 것이지만 막상 참여해보니 성인들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기게 될 만큼 흥미진진한 프로그램이었다.

서천갯벌 체험 프로그램 ‘에코히어로즈의 모험, 에코히어로즈 3’ 출발점은 서천 송림갯벌 야외부스이다.

이곳에서 체온을 측정하고 미션 준비물을 받는다. 미션 준비물은 책과 무전기, 미션 상자이다.

미션 확인을 위해 QR코드를 찍어 카톡방을 만들고 준비물을 잘 챙겨 지도에 표시된 첫 번째 장소로 걸어간다.

앞서가는 아이들을 보니 손에 든 지도가 보물지도라도 되는 양 수십 번을 다시 보고 또다시 확인하며 목적지를 향해간다.

첫 번째 미션은 솔방울 양궁. 솔방울 10개 던져 계란판 표적에 더 많이 들어가는 팀이 이기는 게임이다.

가족끼리 대항전에 들어가기도 했는데 어쩐지 아이들보다 어른들이 더 열정적이었다.

무엇보다 서천 해변 뒤 길게 늘어진 솔밭에 지천으로 널린 솔방울과 계란판을 재활용하여 그럴싸한 게임을 만들었다는 것이 신선했다.

그리고 꽤 먼 거리에서 붉은 계란판 안에 솔방울을 던져 넣는 일이 휴일N 놀러와유 생각보다 만만치 않아 어릴 적 비석 치기를 할 때 느꼈던 전의를 다시 불러왔다.

솔방울과 씨름을 하고 나니 양궁장 근거리에 거미줄 통과하기 게임이 보였다.

소나무 사이사이 줄을 묶어두고 줄에 방울을 달아 경보기 흉내를 내두었다.

몸을 굽히거나 줄을 넘어 방울이 울리지 않게 통과해야 하는 미션이었는데 어른들은 가장 어려워하고, 아이들은 가장 즐거워했던 코스였다.

두 번째 미션은 갯벌에서 수행하는 것이었다.

미션 상자 안에 있는 필드스코프(만원경)을 이용하여 바다의 있는 섬을 개수를 세어 무전기에 대답하면 요원이 시원스럽게 정답!을 외쳐준다.

이어 서천갯벌의 마스코트인 검은머리물떼새를 찾아 사진을 찍어 보내면 다음 임무가

하달되는데 갯벌로 내려가 살아있는 동·식물 7가지를 찾아 사진을 찍어 보내는 것이다.

7가지를 찾아야 한다는 말에 아이들도 어른들도 마음이 급해진다. 바지 끝단을 접어 올릴 새도 없이 아이들은 갯벌로 텀벙 들어간다.

사실 청정갯벌인 서천에서 각기 다른 7가지 생물을 찾는 건 굉장히 쉬운 일이었는데 말이다.

순식간에 댕가리, 동죽, 총알고둥, 엽낭게, 갈색새알조개 등을 찾은 아이들은 사진을 찍어 보내고 다시 지도를 펼쳐 다음 장소로 신나게 달려갔다.

세 번째 미션은 비교적 간단했다.

미션 상자에 들어 있던 검은색 통을 흔들어보고 무엇이 들어 있는지 무전기에 정답을 외치는 퀴즈였다.

통 안에 물건을 맞춘 정답자들은 자연의 소리를 녹음해 전송하는 다음 미션을 수행했다.

사람의 소리가 가득한 환경에만 있다가 자연의 소리를 찾아 녹음하라고 하니 순간 모두에게 정적이 흘렀다.

어른도 아이도 목소리를 줄이고 발걸음을 조심히 하며 파도소리, 바람소리, 새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눈을 감고 갯벌의 소리를 들어 보는 시간은 어른들에게도 낯선 경험이었다.

강화 전등사 죽림다원과 도솔미술관

강화 전등사 죽림다원과 도솔미술관

강화 전등사 죽림다원과 도솔미술관

물레재 넘어 펼쳐진 동강의 샹그릴라 정선 연포분교 가는 길

봄날, 차향은 마당 깊숙이 머문다. 꽃향기에 수수한 한옥 향까지 어우러져 완연한 휴식이 찾아든다.

강화초지대교와 맞닿은 강화도 길상면에는 전통찻집 두 곳이 따사롭다. 온수리(전등사로) 전등사 죽림다원과 장흥리(길상로)

도솔미술관은 한옥에 기대 전통차를 마시는 공간이다.

이른 오전에 찾은 전등사는 고즈넉함이 더하다. 아침 햇살이 산사의 여백을 채우는 사색의 시간이다.

죽림다원은 마당 너머 천년 고찰 전등사를 품에 안고 있다.

달각거리는 다기 소리와 목탁 소리가 간간이 뒤섞이는 이 시간이 평화롭다.

죽림다원은 20여 년 전에 문을 열었다.

신도들이 차를 마시며 잠시 쉬다 가는 휴식 공간이 본격적인 찻집으로 모습을 바꿨다.

나무 탁자로 채운 다원 마당에는 전등사 대조루와 종루가 병풍처럼 드리워진다.

대조루 계단 너머에는 보물로 지정된 대웅보전, 약사전, 범종 등이 수줍게 담겨 있다.

한옥 찻집 죽림다원은 단청과 커다란 서까래가 운치 있다.

내부에는 형형색색 도자기들이 전시되고, 탁자마다 놓인 화분이 봄 분위기를 더한다.

한가한 시간에 들르면 창가 자리에 앉아 전등사의 봄날을 만끽해도 좋다.

벚꽃이 지고 나면 수선화, 백리향, 작약, 돌단풍, 철쭉, 매발톱이 꽃망울을 터뜨린다. 마당에는 작은 연못도 있다.

죽림다원에서는 직접 만든 차를 내놓으며, 쌍화탕과 연잎차가 인기다.

쌍화탕은 14가지 한약재를 이틀간 우려 깊은 맛을 낸다.

연잎차는 전등사 승려와 보살들이 가마솥에 덖은 연잎으로 만든다.

이 밖에 모과차, 생강레몬차, 쑥차 등이 주요 메뉴이며 쑥떡과 연꿀빵도 맛볼 수 있다.

차향을 음미한 뒤에는 여유로운 호흡으로 전등사를 둘러보자.

고구려 아도화상이 창건한 전등사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고 지켜낸 사찰로 알려졌다.

수백 년 세월을 지내온 느티나무와 대웅보전 지붕을 떠받치는 나부상이 전등사의 흥미로운 볼거리다.

죽림다원 운영 시간은 오전 8시 30분~오후 6시 30분이다(연중무휴). 찻집 직원이 추천하는, ‘감동의 차 한잔’을 기울이는 시간대는 저녁 예불 무렵이다.

전등사 입장료(어른 4000원, 청소년 3000원, 어린이 1500원)는 찻값(5000~8000원)과 별도다.

장흥리 온수천 변에 자리한 도솔미술관은 한옥에 들어선 갤러리 겸 찻집이다.

고택을 재현한 이곳은 깊은 마당에 유연하게 굽은 소나무들이 인상적이다.

대청과 사랑방, 안방 등을 전시 공간이자 차 마시는 차방으로 꾸며 어느 곳이든 차향과 한옥, 작품이 함께한다.

30여 년 동안 조경업에 종사한 관장이 취미인 그림을 소재로 2015년 한옥 찻집을 열었다.

행랑채와 누마루를 끌어들이고, 대형 서까래에 기와를 올렸다.

일반인도 편하게 다가설 수 있는 문턱 낮은 미술관이 이곳의 모토다.

미술관은 1~2층 전시실 외에도 별채, 뜰안채 등으로 구성된다.

갤러리에는 매달 새로운 작품이 내걸린다. 한지 공예, 민화, 서양화, 사진, 도자기 등 소재에 제한은 없다.

5월에는 서양화 전시가 열릴 예정이다.

이곳 찻집의 대표 메뉴는 수제 대추차와 단호박식혜다.

대추차는 말린 대추를 씨와 껍질째 끓여 으깬 뒤 5시간 우려 깊은 맛이 난다.

단호박식혜는 찐 단호박을 갈아 식혜에 넣고 끓인 뒤 얼려 살얼음이 뜬 채로 낸다.

직접 담근 오미자청으로 만든 오미자차와 찰보리 가루로 구운 보리빵, 약식 등도 인기다.

봄볕이 좋을 때는 마당과 뜰안채에서 차를 마시고, 미술관 뒤쪽이나 누마루에서 강화의 들판을 바라보며 차향에 취할 수 있다.

찻집의 귀염둥이로 사랑받는 고양이 ‘레오’, 반려견 ‘별이’와 시간을 보내도 좋다. 미술관에서 작가들의 손길이 깃든 기념품도 판매한다.

갤러리에서는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아이들이 그린 그림을 즉석에서 컵에 입히는 체험이 흥미롭다. 5월 주말에는 보자기 매듭 전시를 선보이고, 공예 체험을 진행할 예정이다.

한옥 앞마당에서는 투호, 제기차기 등 전통 놀이도 가능하다.

도솔미술관 운영 시간은 오전 9시~오후 9시(연중무휴), 입장료는 8000원(차·음료 포함)이다. 친절한 작품 해설을 들을 수 있으며, 해 질 무렵 미술관 풍경도 운치 있다.

물레재 넘어 펼쳐진 동강의 샹그릴라 정선 연포분교 가는 길

물레재 넘어 펼쳐진 동강의 샹그릴라 정선 연포분교 가는 길

물레재 넘어 펼쳐진 동강의 샹그릴라 정선 연포분교 가는 길

성주에서 보내는 느긋한 휴가 한개마을과 포천계곡

연포분교는 늘 그리운 이름이다.

소사마을과 연포마을 사이에 다리가 없던 28년 전, 줄배를 타고 동강을 건너 연포분교에 간 적이 있다.

거대한 뼝대(바위로 된 높고 큰 낭떠러지) 아래로 물안개 헤치고 동강이 유유히

흐르는 풍경 앞에서 ‘우리나라에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었나?’ 감탄했다.

연포분교 운동장에서 아이들과 축구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후 몇 번 더 연포분교에 들렀고, 연포분교가 캠핑장으로 바뀌었다는 말을 듣고 일부러 찾아가기도 했다.

옛 기억을 더듬어 연포분교로 가는 길은 한없이 설렌다.

드라이브 시작점은 인적 뜸하고 소박한 예미역이 적당하다.

예미역은 청량리역을 출발한 무궁화호 열차가 하루 다섯 번 정차한다.

무인역으로 운영되지만, 내부가 깔끔하고 화장실도 이용할 수 있다.

예미교차로에서 유문동·동강 방면으로 직진하면 산비탈에 너른 밭이 펼쳐진 유문동이 나온다.

몇 가구가 드문드문 모여 있고, 슬레이트 지붕 위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풍경이 영락없는 오지 마을 같다.

정자가 있는 곳에 ‘동강 가는 길’ 이정표가 발걸음을 재촉한다.

유문동에서 구불구불 이어진 고성리재를 오르는데, 터널이 있다.

일반 터널과 달리 입구가 너무 좁아 들어가도 되는지 망설여진다.

고성터널은 1985년 고성리재 아래로 수도관을 묻으며 생긴 도수 터널(물이 일정한 방향으로 흐르도록 산을 뚫어 만든 길)이다.

내부는 차 한 대가 간신히 지날 만큼 좁고 어둡다. 시멘트로 만든 갱도와 다름없지만, 지름길이라 주민들이 이용한다.

어두운 터널에서 나오면 첩첩산중인데, 지도에 없는 샹그릴라가 나타날 듯한 기분이다.

동강고성안내소를 지나면 삼거리와 만난다.

왼쪽 연포길을 따르면 덕천리 원덕천마을이 나온다.

잠시 마을회관 앞에 차를 세우고 마을을 둘러본다. 옥수수밭 한가운데 외양간이 눈에 들어온다.

가까이 가니 어미 소와 송아지가 우물우물 맛있게 여물을 먹고 있다.

어미 소가 낯선 사람을 발견하고 눈을 부라린다. 외양간 앞에서 조망이 시원하게 열린다.

구불구불 물레재로 오르는 도로가 보이고, 그 옆에 동강 일대 최고봉 백운산이 장수처럼 버티고 섰다.

물레재 정상에는 솔숲이 우거지고, 서낭당이 자리한다.

물레재는 옛날 고갯마루에 실을 뽑는 물레가 걸려 있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연포마을과 소사마을 사람들이 장에 가려면 물레재를 넘어야 했다.

도로가 없을 때는 걸어서 험한 고개를 넘었다. 서낭당에 그 시절 주민들의 애환과 기원이 담겨 있다.

물레재에서 내려오면 소사마을이다.

산비탈에 들어앉은 마을이 수려한 뼝대와 동강을 바라본다.

비료를 뿌린 널찍한 사과밭이 평화롭다.

소사마을에서 내려오면 동강을 건너는 세월교와 만난다. 다리가 없던 시절, 연포마을은 동강으로 끊긴 섬 같았다.

여기서 줄배를 타고 연포마을로 들어갈 때, 얼마나 설렜던가.

연포분교는 캠핑장을 꾸미면서 많이 변했지만, 학교 건물은 옛 모습 그대로다.

오지 캠핑 장소로 마니아 사이에 인기다. 연포분교는 영화 〈선생 김봉두〉 촬영장으로도 유명하다.

옛 분교의 아름다운 모습이 영화에 오롯이 남았다. 연포분교캠핑장 마당에서 뼝대 세 봉우리가 잘 보인다.

주민들은 칼봉, 둥근봉, 큰봉이라 불렀다. 연포마을에는 달이 세 번 뜬다는 말이 있다.

달이 세 봉우리에 가렸다가 나타나기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연포분교는 1969년 개교해 졸업생 169명을 배출하고 1999년 폐교했다.

캠핑장 옆에 연포상회가 있어 반갑다. 연포상회는 마을의 유일한 가게이자 식당으로, 오래전부터 이 자리를 지켰다.

소사마을에 살던 곤옥란 씨 부부가 20여 년 전에 인수했다.

곤 씨의 세 아들도 연포분교를 나왔다.

대처로 나간 세 아들은 지금도 명절에 모이면 줄배 타고 등교하던 시절을 이야기하며 웃는다고 한다.

성주에서 보내는 느긋한 휴가 한개마을과 포천계곡

성주에서 보내는 느긋한 휴가 한개마을과 포천계곡

성주에서 보내는 느긋한 휴가 한개마을과 포천계곡

해안길 걸으니 부산이 품에 안긴다 부산 이기대 해안산책로

참외가 노랗게 익어가는 6월이다. 이 무렵 성주에 가면 농장에서 갓 딴 참외를 판매하는데,

한 봉지만 사도 차 안이 온통 달큼한 냄새로 가득하다. 옛 골목이 아름다운

한개마을을 천천히 걷다가 시원한 포천계곡에 앉아 아삭한 참외를 한입 베어 물면, 그보다 여유롭고 느긋한 휴가가 또 있을까 싶다.

성주 한개마을은 안동 하회마을, 경주 양동마을과 더불어 주민들이 살며 옛 모습을 지켜가는 전통 마을이다.

뒤쪽으로 영취산이 포근히 감싸고, 앞으로 두 하천이 만나서 흘러가는 전형적인 배산임수 길지다.

한개는 ‘큰 개울’ ‘큰 나루’를 뜻하는 순우리말인데, 과거 마을에 큰 개울이나 나루가 있던 데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한다.

한개마을은 성산 이씨 집성촌이다. 조선 세종 때 진주목사를 지낸 이우가 들어와 개척한 마을로,

오랜 역사만큼이나 수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사도세자의 호위 무관으로, 뒷날 정조가 되는

세손을 업고 몸싸움 끝에 입궐해 영조에게 아비를 살려달라 청할 수 있도록 도운 돈재 이석문이 한개마을 출신이다.

그는 이 사건으로 관직을 빼앗기고 낙향해 평생 은거했는데, 사도세자를 추모하는 뜻에서

여닫이문을 북쪽으로 냈다는 북비고택(응와종택, 경북민속문화재)이 바로 돈재가 머물던 곳이다.

돈재의 증손자이자 조선 유림을 대표하는 문장가 응와 이원조도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일찍이 벼슬길에 올라 병조참판을 지냈는가 하면, 1866년 병인양요가 발발하자 75세 노구에도

의병을 모집해 나라를 지키는 데 앞장섰다. 이 같은 업적 덕분에 응와종택은 대감댁으로 불린다.

조선 후기 대학자로 꼽히는 한주 이진상과 그의 아들이자 독립운동가 대계 이승희도

한개마을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한주는 ‘심즉리설’을 내세워 당대와 현대 철학자들에게 주목받았다.

대계는 을사오적을 참수하고 조약을 파기하라는 상소를 올렸다가 대구감옥소에 투옥되고,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일제 침략을 폭로하는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이들 부자의 숨결이 남아 있는 대산동 한주종택(경북민속문화재)은 국가보훈처에서 현충 시설로 지정했다.

한때 100여 채에 이르던 집은 현재 70여 채 남았다. 대부분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지은 집으로,

그 원형을 잘 간직해 지역의 건축 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특히 대산동 교리댁(경북민속문화재)은 멋스러운 사랑채와 잘 가꾼 정원이 아름답다.

현재 보수공사 중이라 온전한 모습을 감상하기 어렵지만, 우아한 곡선미를 자랑하는

사랑채 툇보에서 경북 한옥의 미를 조금이나마 느껴볼 수 있다.

지역적 특성을 반영한 ‘튼 ㅁ’ 자형 배치가 두드러진 대산리 하회댁과 도동댁,

대산동 월곡댁 등도 경북민속문화재로 지정돼 눈여겨볼 만하다. 후손이 거주하는 공간이다

보니 문이 닫힌 경우, 외부 관람만 가능하다. 그렇다고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흙과 돌을 섞어 쌓은 정겨운 담장이 고택을 이어 골목이 호젓하다.

초여름의 싱그러운 초록빛과 알록달록 피어난 꽃이 어우러져 느긋하게 산책하기 좋다.

한개마을에서 자동차로 20여 분 거리에 포천계곡이 있다. 가야산이 빚어낸 그림 같은 계곡으로,

반석의 짙푸른 무늬가 베[布]를 널어놓은 것 같다고 포천이란 이름이 붙었다. 7km에 이르는 물줄기를

따라 곳곳에 너럭바위와 작은 폭포가 펼쳐져, 주민들이 즐겨 찾는 피서지이자 물놀이 명소다.

포천계곡에 처음 간다면 상류에 자리한 성주 만귀정(경북문화재자료)을 목적지로 추천한다.

한개마을 출신 이원조가 만년에 후학을 양성하고 자연을 벗 삼아 독서하던 곳이다.

포천계곡의 아름다운 풍광을 꼽은 포천구곡 가운데 9곡에 속하는 홍개동 근처라 풍광이 빼어나다.

물빛이 맑고 크고 작은 바위 사이로 계단처럼 이어진 폭포가 한낮의 무더위를 시원스레 날린다.

한개마을에서 포천계곡으로 향하는 길에 성주역사테마공원도 들러보자.

성주의 옛 모습을 재현한 공원으로, 기록으로 남은 성주읍성을 비롯해 객사

연못에 세웠다는 쌍도정과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한 성주사고

등이 볼거리를 더한다. 특히 성주사고는 조선 전기 4대 사고 중 하나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실록각 2층에 관련 전시 공간을 마련해 방문객의 이해를 돕는다.

해안길 걸으니 부산이 품에 안긴다 부산 이기대 해안산책로

해안길 걸으니 부산이 품에 안긴다 부산 이기대 해안산책로

해안길 걸으니 부산이 품에 안긴다 부산 이기대 해안산책로

정겨운 시골 인심 삼척 산양농산촌체험마을

“섬의 봉우리가 동쪽에서 보면 여섯, 서쪽에서 보면 다섯으로 보인다.” <동래부지>에 기록된 오륙도의 설명이다.

부산의 상징이랄 수 있는 섬, 오륙도. 그 곁 해안에 멋진 바위 절벽과 널찍한 바위 자락이 이어지는 경관이 있다.

장산봉(장자산 224m) 기슭의 이기대 해안산책로다.

오륙도와 이기대는 모두 화산 분출로 이뤄진 국가지질공원이다.

오륙도-이기대 지질공원은 경관이 빼어나고 볼거리가 많으며 전망 좋은 산책로가 조성돼 있어 사철 탐방객 발길이 이어진다.

부산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이기대의 멋진 해안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탁 트인 바닷가 경치를 감상하는 일정을 짜볼 만하다.

중생대 백악기 화산 분출로 이뤄진 퇴적암 지층에 기이하고 놀랍고 신비로운 지질 특성이 나타난다.

또한 근현대 사람살이의 흔적이 곳곳에 묻어 있고, 무엇보다 걷는 내내 부산의 멋진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다.

부산의 상징 오륙도를 만나다

이기대 해안산책로는 남쪽 오륙도선착장에서 장산봉 자락 해안을 따라 북쪽 끝 동생말까지 이어진 4.7km의 도보길이다.

출발점은 남쪽 오륙도선착장으로 잡는 것이 수월하다.

해안산책로가 북쪽으로 갈수록 완만해지기 때문이다.

남쪽엔 가파른 산길 구간이 몇 곳 있다.

하지만 거의 전 구간이 데크길, 계단길로 조성돼 있어 쉬엄쉬엄 오르내린다면 크게 어려운 구간은 없다.

오륙도선착장은 이기대 해안산책로 출발점이기도 하고, 동해안을 따라 멀리 강원도 고성까지 이어지는 해파랑길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오륙도는 방패섬, 솔섬, 수리섬, 송곳섬, 굴섬, 등대섬 등 6개의 작은 바위섬 무리를 말한다.

방패섬과 솔섬은 육지 쪽(승두말)에 가까이 붙어 있고, 나머지 4개 섬은 조금 떨어진 채 나란히 도열해 있다.

선착장 쪽에서 오륙도의 온전한 모습은 볼 수 없다. 6개 섬의 모습을 모두 보려면 영도 쪽으로 가거나 배를 타고 나가야 한다.

화산 분출 때 층층이 쌓인 쇄설물 퇴적암

중생대 백악기 말 부산의 해운대 쪽 장산과 영도의 봉래산 지역에서 대규모 화산 분출이 여러 차례 일어났다.

오륙도와 이기대 일대 지층은 장산에서 분출한 화산 쇄설물이 퇴적된 것이다.

화산 분출의 흔적을 스카이워크 쪽으로 오르면서 확인할 수 있다.

커다란 바윗덩이 옆면에 크고 작은 바윗돌이 박히거나 입자가 작은 연한 잿빛 층이 켜켜이 쌓여 있다.

화산 분출 때 날아온 쇄설물이 차례로 쌓인 지층이다.

폭발 때 먼저 굵직한 각력(각이 진 돌, 모자갈)들이 날아와 쌓였고 이어 고운 입자의 화산재가 내려앉아 굳은 것이다.

바위엔 굵은 돌이 쌓인 층(화산각력암층)과 화산재가 굳은 잿빛 층(응회암층)이 세 단계나 겹쳐져 있다.

화산 폭발이 최소 3차례 이상 진행됐다는 증거다.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지 않으면 전혀 몰랐을, 8000만 년 전 시간의 흔적이다. ‘알아야 보인다’는 말이 실감난다.

오륙도 스카이워크는 높이 35m의 바위절벽 위에 만든 길이 15m의 전망대다.

바닥을 유리판으로 만들어 아찔한 발밑 바위 자락 경치를 내려다볼 수 있다.

여기서 오륙도 너머 왼쪽 바다를 바라보면 수평선에 걸린 일본 쓰시마섬이 희미하게 눈에 잡힌다.

지리적으로,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와 가까운 땅이다.

이 일대 지명이 승두말(잘록개)이다.

지형이 말안장 모습을 닮아 붙인 이름인데, 오륙도 쪽을 향해 튀어나온 작은 반도의 형태다.

12만 년 전까지 오륙도 섬무리는 승두말과 이어진 긴 반도 모습이었다고 한다.

오랜 세월 파도의 침식을 받아 깎여나가면서 현재의 지형이 만들어졌다.

이기대 자연마당은 널찍한 전망공원이다.

이곳과 왼쪽 고층아파트 일대는 과거 한센병 집단거주지역이 자리하고 있었다.

옆 언덕엔 일제강점기 일본군 포진지 터도 있었다고 하는데 ‘경관을 해친다’ 해서 파묻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의 아픈 흔적도 역사적 기록물이라는 점에서 아쉬운 조처다.

정겨운 시골 인심 삼척 산양농산촌체험마을

정겨운 시골 인심 삼척 산양농산촌체험마을

정겨운 시골 인심 삼척 산양농산촌체험마을

진주대첩과 논개로 유명한 호국충절의 성지

아궁이에 불을 피워 가마솥에 순두부를 끓여 먹고, 초가집 아랫목에 옹기종기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마을이 있다.

삼척시 끝자락에 자리한 산양농산촌체험마을이다.

할머니들과 정겨운 인심을 나누고, 함께한 이들과 추억을 쌓는 마을로 들어서자.

구불거리는 산길이 조금 힘들어도 마을에는 훈훈한 정이 가득하다.

오래전에는 공식적인 주소와 별도로 몇 가구가 모인 곳마다 이름이 있었다.

산양농산촌체험마을도 예외는 아니다. 예부터 불린 동네 이름은 종현마을.

옛날 산골짜기에 위치한 이 마을에 작은 사찰이 있었다.

사찰도 마을도 무척 작아 외부에 알릴 길이 없었는데,

사찰 주지 스님이 작은 종을 세워두고 아침저녁으로 종소리를 퍼뜨렸다고 한다.

그때부터 이 마을이 외부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이곳을 종현마을이라 불렀다.

동네 할머니들이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그 시절 이야기를 들려준다.

산양농산촌체험마을이 조성되고 전통 놀이를 즐기는 마당 한가운데 작은 종이 세워졌다.

이 종은 마을 전설과 별개로 만들었지만, 이곳에 찾아와 옛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종을 한 번씩 울리며 마을에 당도했음을 알린다고.

마을에 들어서고 벗어나며 종 한 번 울리는 것으로 “나 왔소, 나 가오” 하며, 산천초목과 할머니들에게 정겨운 인사를 전해보자.

할머니들과 함께하는 농촌·산촌 체험

산양농산촌체험마을은 삼척시 관할로 운영되지만, 손님을 맞이하고 마을을 지키며 시설을 관리하는 것은 이곳 주민의 몫이다.

마을 바로 위 언덕에 사는 할머니들이 직원으로 근무한다.

숙박동의 청소며 침구 세탁, 체험 준비와 진행 등이 모두 할머니들 업무다.

일이 힘에 부치지 않을까 싶지만, 텃밭을 일구며 살아가던 자신들에게 소일거리와 함께 아들딸,

손자, 손녀가 수백 명 생긴 셈이라고 말한다.

산양농산촌체험마을은 사시사철 농촌·산촌 생활을 체험할 수 있는 시설로 조성되었다.

농기구 창고에서 전통 농기구를 구경하고, 그 옆 체험장에서 직접 사용해본다.

봄부터 가을까지 토마토, 호박, 가지, 상추, 깻잎 등 각종 텃밭 채소를 거둬 먹을 수 있는 채소원이 운영된다.

봄이면 산나물과 송이 채취, 여름이면 옥수수와 감자 수확 체험도 가능하다.

가을에는 마을 곳곳에서 감을 따 먹고, 톡톡 떨어진 밤과 도토리도 주울 수 있다.

마을 옆으로 개울이 흐르는데, 여름이면 수변 공원과 수영장이 운영되고, 겨울에 물이 얼면 썰매장이 된다.

마을 동산에는 눈썰매장도 있다. 전통 놀이 마당에 있는 그네와 널은 누구나 언제든지 이용 가능하다.

떡 만들기와 두부 만들기는 사철 체험인데, 각 체험실이 별도로 운영된다.

그중 더 인기 있는 것은 두부 만들기 체험이다. 아궁이와 가마솥, 맷돌 등을 이용해 만들기 때문이다.

체험 전날 할머니들은 마을에서 수확한 콩을 물에 불린다.

체험은 불린 콩을 맷돌에 가는 것부터 시작된다.

맷돌 가는 것이 수월하지 않을 텐데 아이들은 힘든 줄 모른다.

아궁이에 불을 피워 가마솥에 물을 끓이고, 맷돌에 간 콩에 끓인 물을 부어 삼베 주머니에 거른다.

콩 찌꺼기는 비지, 콩 물은 가마솥에 끓이면 순두부가 된다.

체험에 참여한 사람들은 끓인 순두부를 한 대접씩 후루룩 맛본다.

남은 순두부는 누름판에 넣고 단단하게 눌러 모두부로 만든다.

진주대첩과 논개로 유명한 호국충절의 성지

진주대첩과 논개로 유명한 호국충절의 성지

진주대첩과 논개로 유명한 호국충절의 성지

대전광역시 맨발로 걸어요 계족산 황톳길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성 앞으로 흐르는 남강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곳이 과거 치열하고 처절했던 전투의 현장이었다는 사실을 잊게 된다.

지금은 푸르고 아름다운 경관과 멋진 야경을 자랑하는 장소이지만, 430여 년 전에는 진주 목사 김시민과 7만의 민군관이 순절했던 장소,

진주성. 이제는 아이들이 뛰어놀 공간이자 시민들의 휴식처이자,

경상남도가 추천하고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안심관광지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3대첩 중 하나인 진주대첩이 벌어진 곳

사적 제118호인 진주성은 본래 토성이던 것을 고려 우왕 때 석성으로 수축한 것이다.

진주성이 호국충절의 성지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임진왜란 3대첩 중 하나인 진주대첩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 때문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10월, 왜군 3만여 명이 침공하자 진주 목사 김시민은 3,800여 명의 군사, 성민과 함께 왜군을 상대로 크게 이겼다.

이것이 진주대첩이다.

그러나 그 다음 해, 왜군이 설욕을 노려 9만 여 명을 이끌고 재침을 하였고 7만의 민군관이 순절했다.

적장을 껴안고 남강에 몸을 던진 논개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 바로 진주성이다.

논개는 왜의 재침으로 성이 무너지자 촉석루 아래 의암으로 왜장을 유인하여 강물에 몸을 던져 충절을 다했다.

진주성 정문에는 공북문이라는 적힌 현판이 달려 있다.

공북문은 ‘북쪽에 계시는 임금님을 향해 두 손을 모아 공경의 뜻을 표한다’라는 의미가 담긴 문이다.

진주성의 실질적인 정문으로 주 출입문이다.

공북문을 지나 성 안으로 들어가면 높고 푸른 나무와 잔디가 눈을 시원하게 해준다.

양쪽으로 갈라지는 길 초입에는 안내 표지판이 서 있다.

왼쪽 방향으로 촉석루, 임진대첩계사순의단 등이 적혀 있고, 오른쪽 방향으로 국립진주박물관, 창렬사 등이 적혀 있다.

가장 먼저 봐야 할 곳으로 촉석루를 정하고 왔기에 왼쪽으로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진주성은 내부가 넓어서 전부 둘러보려면 시간이 꽤 걸린다.

촉석루로 가는 길에 김시민 장군 전공비를 만나 발걸음을 멈췄다.

진주대첩을 이끈 김시민 장군의 공로를 돌에 새겨 기록한 것으로 ‘고목사김후시민전성각적비’라고도 부른다.

전공비 앞에서 잠시 머물다 다시 촉석루로 향한다.

진주성의 남쪽 벼랑 위에 장엄하게 우뚝 솟은 촉석루는 영남 제일의 아름다운 누각이다.

고려 고종 28년에 진주목사 김지대가 창건한 후 몇 차례 불타 없어졌고, 여러 차례 고쳐지었다.

전시에는 진주성을 지키는 지휘본부였고, 평화로운 시절에는 시인묵객들이 풍류를 즐기던 명소로, 또 과거를 치르는 고사장으로 쓰이기도 했다.

촉석루와 촉석문 사이 즈음 논개가 뛰어내렸다는 의암이 보인다.

조선 선조 때 임진왜란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성이 함락되고 성안의 민군관이 모두 순절할 때

논개도 의암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순국했다.

논개의 의로운 행동을 기리고자 이 바위를 의암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진주성 이곳저곳을 돌아보는 발걸음이 바빠진다.

진주의 역사와 문화가 모두 담긴 곳이면서 풍경이 아름다운 곳이기도 해서 가족이 함께 온 팀들이 눈에 자주 띈다.

호국사와 창렬사를 거쳐 한참을 걸으니 국립진주박물관이 나온다.

국립진주박물관은 1984년 가야문화 연구를 위하여 경상남도 첫 국립박물관으로서 문을 열었다.

천자총통, 지자총통, 중완구, 비격진천뢰 등 임진왜란 무기를 비롯해 경남의 역사 문화와 관련된 다양한 유물을 보존, 연구, 전시하고 있다.

국립진주박물관 건물 옆에는 국보 제105호인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이 서 있다.

이층 기단에 삼층의 탑신을 올린 전형적인 통일신라 양식의 석탑이다.

석탑의 국내에서 유일하게 섬장암으로 만들어졌고, 상층 기단에는 신장상이, 1층 탑신에는 보살상이 조각되어 있다.

신장상과 보살상의 조합은 독특한 사례로 9세기 통일신라 석탑 양식의 중요한 지표가 된다.

진주성은 야간에도 개장을 하는데 야경 명소로 유명하다.

촉석문 옆의 달 조형물에 조명이 들어와서 성문 밖으로 환하게 빛나는 달이 얼굴을 빼꼼 내비친다.

누가 봐도 포토존인 야경 명소여서 달을 배경 삼아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았다.

진주성을 관광할 계획을 짠다면 낮의 진주성뿐만 아니라 밤의 진주성도 꼭 보기를 바란다.

진주성 개방 시간은 하절기에는 저녁 11시, 동절기에는 저녁 10시지만, 진주성 안에 있는 촉석루 등은 오후 6시까지만 개방한다.

진주성 개방 시간만 생각하고 갔다가는 성 안을 제대로 둘러보지 못할 수도 있으니 늦지 않게 서둘러야 한다.

진주성 안에서는 퀵보드, 자전거, 반려동물 출입이 제한된다.

대전광역시 맨발로 걸어요 계족산 황톳길

대전광역시 맨발로 걸어요 계족산 황톳길

대전광역시 맨발로 걸어요 계족산 황톳길

삶의 향기 스민 도시 기행 대구 근대골목 투어

교통의 요지이자 카이스트와 대덕연구단지를 품은 과학도시.

꿈돌이공원을 품은 엑스포의 도시 대전. 기차나 고속버스를 타고 대전과 스친 경험 얼마나 많던가.

목적지가 ‘대전’이 아니었을 뿐 다른 여행지로 향하는 길 위에서 우리는 수도 없이 대전땅을 지나갔다.

스쳐 지나간 수많은 소개팅들처럼. 그냥 지나치기만 해서는 알 수가 없다.

지역이건 사람이건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법이다.

문제는 몸과 마음을 쏟는 공이 그냥 절로 되지는 않는다는 것.

이 둘을 움직이게 하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강력한 효과를 지닌 매력적인 볼거리가 필요한 이유다.

그렇다고 해도 볼거리나 외형이 모든 걸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잘 몰랐지만 알아갈수록 매력을 보여주는 이들도 있지 않은가. 대전도 그와 닮았다.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일단 안으로 들어와서 살펴보면 생각보다 알차고 다양하다.

엑스포 과학공원을 시작으로 유성온천 대전오월드 뿌리공원 그리고 대청호반과 계족산 황톳길 등을 갖추고 있다.

수수하고 무뚝뚝하게만 보이던 상대방이 의외로 재미있고 알차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의 기분이랄까.

이 모두를 둘러보려면 하루로는 어림도 없다. 먼저 대전의 힐링(healing) 명소로 떠오르고 있는 계족산 황톳길부터 살펴보자.

계족산(420m)이라. 익숙한 이름, 계룡산(845m)이 떠오른다.

지도를 살펴보니 계족산은 대전 외곽 동쪽에 자리하고 대전 서쪽 경계선으로는 계룡산 자락이 닿는다.

대전을 사이에 두고 서쪽으로는 계룡산이, 동쪽으로는 계족산이 자리하는 셈이다.

모두 이름에 계가 들어간다. ‘닭 계(鷄)’자다. 대전(大田)은 큰 밭을 뜻하니 큰 밭을 사이에 두고 닭들이 에워싼 그림이 그려진다.

어떤 이들은 두 닭산을 이어 계룡산은 닭의 머리, 계족산은 닭의 다리로 풀어내기도 한다.

맞다. 계족(鷄足), 닭의 다리라는 뜻이다. 산 중턱의 순환 임도가 닭의 다리를 닮았다고 닭다리산 또는 닭발산이라고 불렀다.

인근 송촌에 지네가 많아 지네와 천적인 닭을 이름에 붙였다고도 전해진다.

계족산에 황톳길만 있는 것은 아니다. 명품 100리 숲길과 장동산림욕장도 품고 있다.

오늘 걸을 황톳길은 그 일부, 계족산 산중턱 임도를 따라 이어진다. 장동산림욕장 입구가 시작점이다.

마을 주민들에게 사랑받던 계족산이 대전 시민은 물론 전국구로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은 맨발로 걸을 수 있는 황톳길 공이 크다.

건강을 챙기는 이들이 힐링(Healing) 여행지로 황톳길을 찾았기 때문이다.

정상에 오르는 대신 계족산 능선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지는 환형의 길.

MTB코스로도 사랑받고 있는 임도의 일부를 황토로 덮어 만들었다.

비가 오고 난 후에는 황토의 부드럽고 찰진 느낌을 제대로 맛볼 수 있다. 내리막길에서는 미끄러울 수 있으니 주의하자.

황톳길은 장동산림욕장 입구~원점 삼거리~임도 삼거리~절고개 삼거리~원점 삼거리~장동산림욕장 입구로 이어진다.

총 14.5km로 넉넉하게 5시간 정도면 걸을 수 있는 원점회귀 코스이다.

계족산성을 오르지 않는 이상 매끄럽고 부드러운 길이 이어진다.

물이나 간식 등을 챙겨 산책이나 소풍을 가기에도 좋고 운동 삼아 힘차게 걷기에도 좋다.

시원하게 뻗은 나무 사이로 부드러운 황톳길이 이어진다. 맨발로 찰진 황토가 그대로 전해진다.

황토에는 미생물을 품은 효소들이 있는데 그들이 몸의 순환작용을 돕는다고 알려진다.

발가락 사이사이로 파고드는 황토에 부쩍 건강해지는 것 같다. 문득 궁금해진다. 황토, 누가 깔았을까? 왜?

계족산 황톳길은 (주)맥키스컴퍼니의 맨발 걷기 체험에서 출발한다.

맨발 걷기의 효능에 반한 조 회장이 계족산에 황톳길을 조성하기로 한 것.

황톳길은 2006년 시작한 선양마사회 마라톤 대회와 함께 모습을 갖춰간다.

매년 진행해온 마라톤 대회는 지난 2011년 계족산 맨발축제로 이름을 변경, 사람과 자연 그리고 문학과 문화예술 축제로 방향을 잡았다.

2012년 올해에는 오는 10월13일부터 이틀간 펼쳐질 예정이다.

산림욕장 덕분인지 숲에 안겨 걷는 기분이 제법 괜찮다.

신발을 신고 임도를 걷는 것과 맨발로 황톳길을 걷는 차이를 직접 느껴보자.

항상 양말과 신발에 갇혀있던 발바닥이 만세를 외치는 것 같다.

닿을 때마다 발을 쫀쫀하게 감싸주는 황토의 질감은 느껴보지 않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얼마나 걸었을까. 계족산성을 알리는 표지판이 나온다. 여기까지 와서 계족산성을 놓칠 수 없어 오르기로 했다.

길이 제법 가파르다. 지금까지 걸어온 황톳길이 덧셈과 뺄셈이라면 지금부터 계족산성까지 이어진 길은 미적분이다.

계족산성(사적 제355호)은 계족산 정상에서 능선을 따라 축조된 산성이다.

백제가 쌓은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1998년 발굴을 통해 6세기 경 신라에서 쌓았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성안에서 발굴된 토기 조각 대다수가 신라의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길이 1200m에 높이 7~10m. 복원된 일부 성벽만으로도 그 장대한 규모를 엿볼 수 있다.

대전 북동쪽에 자리한 계족산은 넓은 분지를 품은 데다 중부지방과 영남지방을 잇는 길목으로 전략적 요지였음을 알 수 있다.

계족산성이 힘을 더한다.

삶의 향기 스민 도시 기행 대구 근대골목 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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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도심에서 가장 빨리 기장의 바다를 만나는 동해선

최근 몇 년 사이 대구 도심을 찾는 여행자가 부쩍 늘었다.

대구 근대골목의 매력에 흠뻑 빠진 여행자들이 전하는 입소문에 더해 지난 2012년 ‘한국관광의 별’

장애물 없는 관광자원 부문과 ‘한국관광 100선’에 선정되며 명성까지 얻었기 때문이다.

‘대구에 뭐 볼 게 있나?’ 했던 이들이 도심 한복판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근대문화유산을 직접 둘러보고

그 시절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나며 진정한 감동을 느낀다. 화려하게 단장한 관광지가 아닌,

좁은 골목길과 일상의 공간들을 돌며 소박한 것들이 전하는 삶의 의미를 돌아보게 된다. 여행을 통한 진짜 배움이다.

‘한국관광의 별’ 장애물 없는 관광자원 부문에 선정된 만큼,

급경사로를 통과해야 하는 동산병원 선교사 사택과 계단으로 이루어진 3.1만세운동길을 제외하면,

중구를 중심으로 한 근대골목은 휠체어 이동이 용이하다. 적당한 간격으로 장애인화장실과 쉼터 등도 잘 조성되어 있다.

출입구에 경사로가 설치되어 있거나 단차 없이 접근할 수 있는 식당도 여럿이다.

KTX를 타고 동대구역에 내려 대구지하철 1호선을 타면 반월당역에서 가까운

대구 근대골목까지 수월하게 접근할 수 있어 대중교통을 이용한 여행도 가능하다.

도시의 소음과 질주하는 차량들에 놀라지 말자. 빈틈없는 빌딩 숲 안쪽으로 들어서면 역사와 함께 자리를 지켜온 명소들과 옛집,

이야기를 품은 골목길이 기다리고 있다. 마치 오래전부터 기다려온 듯 다정하게 손을 내밀며 추억 속 어린 시절로 데려다준다.

문화와 향기를 만나는 골목, 계산성당에서 약령시한의약박물관까지

대구지하철 1호선 반월당역에 내려 14번 출구 쪽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지상으로 올라가면 대구 도심 한복판이다.

서울 명동에 해당하는 동성로와 중앙로가 연결되고, 백화점 등 고층 건물들이 도열해 있다.

하지만 오늘 여행의 출발지인 계산성당이 있는 빌딩 숲 안쪽은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오래 묵은 가로수가 도열한 도로를 따라가면 붉은 벽돌로 지어진 계산성당(사적 제290호)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1899년 한옥 성당으로 지어졌으나 화재로 소실된 뒤, 1902년 로베르 신부가 설계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영남 지역에 천주교가 뿌리내리는 데 중심 역할을 했으며, 100년 넘는 세월을 변함없는 모습으로 견뎌낸 견실함이 돋보인다.

성당 왼편에 설치된 경사로를 이용해 개방된 성당 내부를 둘러볼 수 있다.

긴 스테인드글라스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성당 내부의 경건함과 성스러운 분위기를 은은하게 감싸준다.

계산성당에서 나와 오른편 골목으로 접어들면 일제강점기에 저항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를 남긴 시인 이상화 고택과 국채보상운동을 이끌었던 서상돈 고택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함께 자리한 계산예가는 계산동의 옛 모습과 대구에서 활동했던 문인, 예술가 들을 만나는 공간이다.

특히 한옥으로 지어진 전시관은 호출 벨을 누르면 관광안내소 직원이 바로 달려와 휠체어 전용 리프트의 작동을 도와준다.

리프트를 이용해 한옥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특별한 시스템이다.

조선 말기 대구에서 큰 포목점을 운영했던 상인이자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서상돈의 고택은 이상화 고택과 마주보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전국적으로 일어난 국채보상운동이 바로 대구에서 시작되었고,

그 중심에 섰던 인물이 바로 서상돈이다. 고증을 거쳐 복원된 소박한 고택 역시 단차가 없어 휠체어로 이동 가능하다.

서상돈 고택에서 나오면 약령시로 이어진다. 현재 한의약 약재상이 170여 곳이나 몰려 있는 곳으로 조선시대 약령시가 열렸던 거리이다.

경상도의 한약재가 한양으로 올려지기 전 대구 감영으로 먼저 모였고,

자연스럽게 이 거리를 중심으로 약령시가 형성되었다. 거리에 가득한 한약재 냄새만으로도 절로 건강해지는 듯한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