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영주 무섬마을 물 속에 안긴 선비의 섬

경북 영주 무섬마을 물 속에 안긴 선비의 섬

경북 영주 무섬마을 물 속에 안긴 선비의 섬

원주에 이런 곳이 주방용품 화장품 잇는 산업관광

처음에는 ‘물섬마을’이라 불렸다고 전해진다.

발음상의 이유 때문인지 ‘ㄹ’이 빠지고 무섬마을이 되었다.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에 폭 안긴 자태가 영락없는 물속의 섬이다.

양반도 평민도 모두 함께 공부했다는 조용한 선비의 마을, 무섬마을로 들어서보자.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동해로 향하다 방향을 틀어 중앙고속도로 내려서면 충북 제천과 단양을 지나 경상도 땅에 들어선다.

곧 경북 영주를 필두로 양반의 고장이 시작된다.

영주와 이웃한 봉화 닭실마을과 안동 하회마을은 전국구 양반마을 아니던가. 이웃한 영주에는 그보다 덜 알려졌지만 그래서 더 고즈넉한 양반마을이 있다.

‘양반마을’보다는 ‘선비마을’이 더 잘 어울리는 공간, 삼면이 물줄기에 안긴 무섬마을이다.

양반과 평민 함께 공부하던 육지 속 섬마을

무섬마을을 보면 세 번 놀란다.

우선 마을을 품은 산과 물줄기에 놀라고 그 안에 들어선 고택들에 놀란다.

마지막으로 이 마을이 품은 개방·개혁 정신에 놀란다.

자연환경, 즉 비주얼(Visual)은 물론 멋진 몸매와 정신까지 갖춘 무섬마을에서 안빈낙도의 삶을 꾸려가던 선조들을 만나보자.

중앙고속도로에서 영주IC로 나와 영주시내 초입에서 문수면 와현리 방향으로 향한다.

수도리 전통마을 표지판이 나오면 이를 따라가면 된다. 무섬마을에 들어서려면 수도교를 건너야 한다.

마을 뒤편에 자리한 무섬교도 육지속 섬마을과 바깥세상을 이어주는 통로다.

이들 다리가 놓이기 전, 마을과 바깥을 잇던 것은 외나무다리였다. 마을 주민들은 “외나무다리로 꽃가마 타고 시집왔다 죽으면 그 다리로 상여가 나갔다”고 했다.

무섬마을로 들고 나는 시작과 끝을 보아온 외나무다리는 여전히 무섬마을의 안과 밖을 잇는다.

무섬마을을 감싸 안은 물줄기는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이다.

아예 물 위에 떠 있는 섬은 아니지만 보기에는 ‘물속의 섬’ 같다.

삼면은 내성천 줄기에 안겨있고 뒤로는 태백산 끝자락과 이어진다.

강원도 영월의 청령포를 떠올리면 모양은 비슷하다. 단종의 한(恨)이 건너지 못할 만큼 깊은 물과 도무지 빠져나갈 수 없을 절벽으로 막혔다는 점만 뺀다면.

한문으로도 똑같다. 물수(水)에 섬도(島)를 써서 수도리다.

무섬마을은 경북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에 자리한다. 뭍과 이어진 마을 뒷산은 태백산 줄기, 강 건너에는 소백산 줄기가 스며든다.

태백산에서 이어지는 내성천과 소백산에서 흐르는 서천이 이곳에서 몸을 섞어 ‘물도리동’이라고도 불렸다.

앞산(남산)에 올라 무섬마을을 살펴보면 물줄기에 물줄기가 더해지고 산과 물이 태극모양으로 돌아나간다.

음양의 조화가 좋아 자식이 잘되고 의식이 풍족하다고 해석된다.

또 무섬마을을 두고 물위에 활짝 핀 연꽃 모양의 땅,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고도 한다. 이런 지형에서는 학자들이 많이 배출된다고.

수도교를 건너자마자 좌회전하면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해우당 고택 행랑채에 관광안내소가 있으니 꼭 들르자. 지도도 챙기고 선성 김씨 종손 김광호 선생의 이야기도 들어보자. 무섬마을의 역사는 길지 않다.

“1666년, 현종7년에 반남 박씨가 강 건너 마을에서 이곳으로 분가하러 들어왔어요. 그때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거죠.

그의 증손녀 사위 선성 김씨가 이곳에 정착하면서 두 성(姓)씨 가 모여 사는 집성촌이 되었어요.

해방 전만해도 100여 가구가 넘는 큰 마을이었는데 80여년 전쯤 갑술년 수해라고 큰 홍수가 나서 절반은 손실됐지요.

지금 남은 고택은 43채에요. 사람이 사는 집은 26채 뿐이고요. 독거노인이 많다는 뜻이죠.

평균연령은 78세, 우리 마을에서 60대는 2명 뿐이에요. 청년들이죠. 90은 넘어야 노인대접을 받아요.”

40여 채의 고택 중 30여 채가 조선 후기의 사대부 가옥이다.

반남 박씨 입향시조가 지은 만죽재, 선성 김씨 입향시조가 지은 해우당 등을 포함해 9채가 지방문화재이다.

일제강점기, 김화진 선생이 세운 아도서숙도 빼놓을 수 없다.

아도서숙은 1933년 일제에 강제로 폐숙될 때까지 주민들에게 한글과 농업기술을 교육했던 독립운동의 본거지였다. 고증을 거쳐 복원을 준비하고 있다.

원주에 이런 곳이 주방용품 화장품 잇는 산업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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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에 이런 곳이 주방용품 화장품 잇는 산업관광

조선의 르네상스를 꿈꾸었던 정조를 만나다 수원 화성

강원도의 관문이자 ‘강원도’ 지명이 유래한 마을 원주(原州).

영서지방의 큰 산인 치악산(1288m)을 필두로 맑은 물길 자랑하는 섬강과 간현유원지 등을 품은 고장.

오늘은 원주의 색다른 표정을 찾아 여행을 떠나보려 한다.

이름은 조금 생소하지만 알고 보면 신통방통 재미난 ‘산업관광’이 바로 주인공이다.

가족과 함께 해도 좋을 체험여행, 산업관광 핫스팟을 소개한다.

초콜릿 좋아하는 사람 다 모여라

원주시 행구동에 자리한 초콜릿황후는 초콜릿에 특별한 맛과 효능을 더한 ‘발효 초콜릿’ 전문점이다.

12년을 투자해 만들어낸 천연발효 초콜릿은 최소 3일 이상 옹기에서 숙성시켜 깊은 맛을 낸다.

‘손탁호텔’이라고 불리는 초콜릿황후의 건물은 발효초콜릿과 발효음료를 만드는 공간인 동시에 그들을 맛볼 수 있는 카페이자 연구실, 체험 공간.

이곳에 가면 첨가물 없이 발효숙성만으로 100일 이상 장기보관 가능한 신비로운 초콜릿을 만날 수 있다.

이곳에서는 아이들과 어른 모두를 위한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4~6세 아이들을 위한 곰돌이 발효초콜릿 만들기(40~60분 소요, 1인 1만8000원)와 유치원생 이상 체험 가능한 카카오 케이크볼 만들기(40~60분 소요, 1인 1만5000원)뿐 아니라,

초등학생 이상 체험 가능한 꽃잎 발효초콜릿 만들기(60~90분 소요, 1인 2만5000원)와 초콜릿 퐁듀 만들기(30분 소요, 1인 2만원), 카카오 케이크 바 만들기(30분 내외, 1인 1만5000원)등이 주인공이다.

고등학생 이상을 대상으로 한 핸드드립 커피 체험(90분 소요, 1인 2만5000원)도 찾는 이들이 많다.

모든 프로그램이 4명 이상 신청 가능하다. 하루 전 예약 필수.

강원도 원주가 자랑하는 식물박물관 원주허브팜 1만7000평방미터의 널찍한 공간을 채운 장미뜰·가축뜰·수련뜰·실내뜰·허브족욕뜰 등 다양한 뜰과 연못에 총 1000여 종에 가까운 식물들이 자라고 있다.

특히 수천개의 LED 빛이 밝히는 색동불빛정원의 야경과 허브 족욕은 원주의 데이트 코스로 인기라고. 고양이들이 반겨주는 허브 족욕은 입장료와는 별도의 요금(1000원)이 더해진다.

원주허브팜은 크게 실내 건물과 야외 공간으로 나눌 수 있다.

앞서 설명한 식물박물관은 야외 공간을 채우며 3층 짜리 건물에서는 카페와 식당, 허브샵 등이 운영 중이다.

허브차와 허브 아이스크림, 허브 돈가스와 비빔밥 등을 맛볼 수 있어 <원주허브팜>을 찾는 이들에게 다양한 허브 체험을 제공하고 있다.

아시아 최초의 의료기기 상설전시장으로 알려진 ‘원주 의료기기종합지원센터’. ‘대체 뭐 하는 곳인가’ 하는 의문점은

원주 의료기기 테크노밸리(대표·정완길) 내의 의료기기 상설전시장을 둘러보면 금세 해결된다.

그중 관람객들의 관심이 최고치에 달하는 장소는 ‘세일즈존’.

다양한 의료기기는 물론 생활기기와 미용기기들이 전시·판매되고 있다. 여기에 기능성 화장품까지 더해져 다양성을 더하는데다 시중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어 매력적이다.

2015년 7월 초까지 기업부스관 리뉴얼 작업으로 주말 관람은 어렵다.

주중에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누구나 관람이 가능하다. 미리 예약할 경우 운영사무국 직원의 설명을 더할 수 있으니 기억해두자.

봄과 가을 1년에 2차례에 걸쳐 특가 기획전을 진행할 계획이다. 가정에서 유용한 홈케어 제품을 직접 보고 체험한 뒤 저렴하게 살 수 있어 유용하다.

조선의 르네상스를 꿈꾸었던 정조를 만나다 수원 화성

조선의 르네상스를 꿈꾸었던 정조를 만나다 수원 화성

조선의 르네상스를 꿈꾸었던 정조를 만나다 수원 화성

역사가 흐르는 동네 뒷산 의왕시 모락산

짧은 주말, 아이들에게 역사적으로 유익한 곳을 방문하고 싶은 마음이라면 수원과 화성을 1박 2일로 다녀오는 것은 어떨까?

수원과 화성에는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루었던 정조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들이 숨어있다.

조선후기의 걸출한 군주 정조가 꿈꾸었던 새로운 세상을 찾아 발걸음을 옮겨보자.

특히 수원화성은 그 아름다움과 규모 그리고 과학성으로 인해 1997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다.

우리나라 성곽건축기술의 정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성곽이 가지고 있는 모든 기능을 살펴볼 수 있는 이곳은 매년 수많은 관광객들이 모여드는 자랑스러운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수원화성은 둘레가 약 5.7킬로미터에 성벽의 높이는 평균 5미터 정도로 견고하고 튼튼한 성이다.

화성을 건축하는데 들어간 벽돌 수만 하더라도 거의 70만장에 육박한다.

한국전쟁당시 화성 성곽의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으나, [화성성역의궤]에 자세한 건축과정이 기록되어 있어서 복구가 가능했다.

수원화성을 건축하는데 큰 공을 세운 사람은 정조시대의 대 학자 정약용 이다.

정약용 선생은 중국의 [기기도설]이라는 책을 참고로 하여 거중기를 발명하였으며,

도르레를 이용한 거중기를 통해 성곽을 건축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크게 단축시켜 백성들의 고충을 덜어주었다.

수원화성의 성문은 모두 네 개(장안문, 팔달문, 창룡문, 화서문)인데 그 중 정문에 해당하는 문은 장안문이다.

장안문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성문으로 그 크기와 아름다움이 국보 제 1호인 숭례문과 비교되기도 한다.

장안문은 철통 방어시설인 옹성을 갖추고 있는데, 성문을 항아리 모양으로 한 겹 더 에워 싼 성벽을 의미하는 옹성은 화공 등의 공격에 대비하기위한 매우 훌륭한 방어시설이다.

북문인 장안문이 정문 구실을 했던 이유는 정조가 사도세자의 무덤을 살피러 행차를 할 때 한양에서 수원화성으로 들어서는 가장 첫 번째 입구이기 때문이었다.

장안문을 지나면 수원화성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인 화홍문을 만날 수 있다.

총 일곱 개의 수문 위에 세운 누각인데 수문 아래로 떨어지는 물줄기가 마치 꽃비를 뿌린 듯이 아름답다.

사시사철 너무나 아름다운 화홍문 주변은 늘 많은 여행객들로 붐빈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는 노론과 소론의 당파싸움에 희생되어 아버지 영조의 명으로 뒤주에 갇혀 목숨을 잃었다.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는 왕이 된 후 가장 먼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원래 있던 자리에서 조선 제일 명당인 융릉으로 옮기고자 했다.

그러나 당시 융릉은 사람들이 이미 많이 모여서 살고 있는 곳이었다.

정조는 그 사람들을 강제 이주시키지 않고 새로운 장소에 성을 쌓고 집을 지을 돈과 이사비용까지 챙겨 사람들을 살게 하는데, 그 곳이 바로 지금의 수원화성이다.

사도세자를 모신 융릉에는 훗날 장조로 추존된 사도세자뿐만 아니라 그의 부인 혜경궁 홍씨도 함께 묻혀있다.

융릉은 다른 능과는 좀 다르게 정자각과 능침이 이루는 축이 일직선이 아니라 약간 비껴서 조성되어있는 것이 특징인데,

이는 효심 깊은 정조가 아버지의 능을 조성할 때 뒤주에 갇혀 돌아가실 때도 답답하셨을 것인데 정자각 바로 뒤에 능침을 조성한다면 얼마나 더 답답하시겠느냐 라는 말에 따른 것이라 한다.

융릉과 한 영역에 있는 건릉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와 효의왕후의 능이다.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의 탕평책을 이어받아 정치를 안정시키고 왕권을 강화하였으며 이상에 걸맞은 개혁정책을 펼친 조선후기의 르네상스를 일구어낸 왕으로 평가받고 있다.

규장각을 설치하여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검서관 제도를 마련하여 능력 있는 서얼을 적극적으로 등용하였는데,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와 같은 학자들이 대표적 인물이다.

정조는 수원화성을 건축하며 그가 꿈꾸는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려고 하였다.

그는 화성축조과정에서 정약용과 같은 걸출한 인물을 등용하기도 하였지만, 그의 뜻을 제대로 펼치기도 전에 돌아가셨고 정조가 없는 조선의 개혁은 다시 뒷걸음칠 수밖에 없었다.

건릉을 돌아보며 정조의 개혁에 대한 이상과 의지를 다시 한 번 떠올려 보자.

역사가 흐르는 동네 뒷산 의왕시 모락산

역사가 흐르는 동네 뒷산 의왕시 모락산

역사가 흐르는 동네 뒷산 의왕시 모락산

고양 서삼릉누리길 초록빛 자연을 걷다

경기도 의왕시 모락산은 주민들이 산보하듯 오르내리는 나지막한 동네 뒷산이다.

하지만 이 산에는 조선시대 이전부터 한국전쟁을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간이 공존한다.

고대 고분으로 추정되는 유적이 있고, 조선 세종의 아들 임영대군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진다.

한국전쟁 당시 정상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부근에는 현대에 세워진 전승기념비가 있다.

국기봉에는 태극기가 펄럭인다. 낮은 산이지만 다양한 수준의 코스가 마련돼 산을 오르는 재미가 좋다.

산 주변에 백운호수가 있고 호수 옆으로 먹을거리가 가득하다.

타 지역 사람들이 당일 산행을 위해 모락산을 찾는 이유는 충분하다.

경기도 의왕시 정중앙에는 모락산이 자리한다.

해발 385m의 모락산은 절벽과 기암괴석, 암릉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조선시대 세종의 넷째 아들 임영대군이 매일 이 산에 올라 서울을 향해 망궐례(멀리 있는 궁궐을 바라보고 행하는 예)를 올려

‘서울을 사모하는 산’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설과 임진왜란 때 왜구들이 이 산에서 사람들을 몰아 죽였다는 데서 모락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오래 걷지 않아도 도심이 내려다보이는 탁 트인 전망과 마주하니, 모락산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전자가 더 맞지 않을까 싶다.

정상인 국기봉으로 향하는 길은 여러 가지다. 그중 난이도가 가장 높은 계원예술대학교 옆 갈미한글공원에서 시작하는 길로 정했다.

이 길이 어려운 이유는 다른 등산로에 비해 다듬어지지 않은 흙길이기 때문이다.

출발하고 500m를 채 못 가서 모락산 산신을 모신 산령각과 마주한다. 이곳에서부터 가파른 산길이 시작된다.

그리 높지 않은 산임에도 거친 숨을 몰아 쉬는 등산의 묘미를 즐길 수 있는 구간이다.

잎이 무성한 나무들이 햇빛을 가려주니 길은 고되어도 바람은 시원하다.

또다시 500m, 특이한 모양의 바위들을 구경하며 길을 이어가다 보면 사인암에 도착한다.

임영대군이 자주 찾았다는 바위로 전해지는데, 이름의 유래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사인암은 기암절벽이다. 그 위에 오르면 의왕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시계가 좋은 날은 멀리 관악산까지 볼 수 있다.

백제시대에 축조된 모락산성에 관한 안내문을 지나면 6.25 전승기념비가 있는 넓은 쉼터가 나온다.

한국전쟁 당시 모락산을 포함한 수리산과 백운산 주변은 수도 서울을 탈환하기 위해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요충지였다.

1951년 1월, 한국군은 모락산 정상에서 중공군과 벌인 전투에서 승리했다. 이를 기리는 전승기념비가 1999년에 세워졌다.

이 부근에서 매년 전승기념비 참배 행사가 열린다. 국기봉 주변 쉼터에 한국전쟁 관련 사진들이 전시되고, 사람들이 모여 지난 시간에 대한 애도를 표한다.

조금 더 걸어 팔각정을 지나면 태극기가 펄럭이는 모락산 정상인 국기봉에 도착한다.

모락산에는 임영대군에 얽힌 이야기가 곳곳에 전해진다.

정상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절터약수터가 있는데, 이곳 역시 임영대군이 창건한 경일암의 옛터로 추정된다.

지금도 흙바닥에서 건물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발굴조사 당시에는 기와, 토기, 자기 파편 등이 여러 점 발견되었다.

현재 등산객들을 위한 쉼터와 팔각정이 마련되었고, 두 곳의 샘물만이 옛날처럼 흐르고 있다.

고양 서삼릉누리길 초록빛 자연을 걷다

고양 서삼릉누리길 초록빛 자연을 걷다

고양 서삼릉누리길 초록빛 자연을 걷다

파주골순두부 박가네오리 농가맛집1호 청산별미

짙푸른 녹음과 왕가의 기품이 어우러진 서삼릉을 시작으로 이국적인 초원과 정겨운 마을 풍경, 잠시 걸음을 멈추고 즐기는

막걸리 한잔의 여유를 만날 수 있는 서삼릉누리길은 고양의 다양한 매력을 즐길 수 있는 종합선물세트 같은 코스다.

수도권에선 지하철만 타면 언제든 부담 없이 떠날 수 있으니 도심 속 힐링 산책길로도 제격이다.

권력이 무상하더라, 서삼릉

중종(1488~1544)의 계비였던 장경왕후(1491~1515)의 능인 희릉과 그의 아들인 인종(1515~1545)의 능인 효릉,

철종(1831~1863)의 능인 예릉이 한데 자리한 서삼릉은 서오릉과 함께 고양을 대표하는 유적지다.

왕릉은 그 주인이 누구인지가 가장 큰 관심사일 수밖에 없는데, 이곳 서삼릉은 당대 최고의 지위에 올랐으나

냉혹한 정치권력에 희생될 수밖에 없었던 인물들이 한데 자리해 더욱 눈길을 끈다.

장경왕후는 후궁으로 궁에 들어와 모든 여인들이 선망하는 왕비의 자리까지 올랐지만 겨우 스물다섯의 나이에 산후병으로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목숨과 맞바꾼 아들 인종은 훗날 임금의 자리까지 오르지만 계모인 문정왕후(1501~1565)의 등살을 이기지 못하고 재위 9개월 만에 숨을 거두고 만다.

이들 모자(母子)의 능은 본래 지아비이자 아버지인 중종 곁에

자리했으나 그마저도 문정왕후의 계략으로 정릉이 옮겨지면서 둘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강화도령’으로 잘 알려진 철종 또한 평범한 시골농부의 삶을 살다가 권력자들에 의해 왕위에 올랐고, 정치적으로 무엇 하나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허수아비 임금에 불과했다.

결국 이들은 모두가 욕망하는 자리에 앉았지만 여느 촌부만큼도 행복하지 못했다. 이들의 능을 차례로 돌아보다 보면 절로 권력의 무상함과 함께 진정한 행복의 의미를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짙푸른 초원과 하얀색 울타리, 한가로이 풀을 뜯는 흑갈색 말들이 한 폭의 수채화처럼 어우러진 원당종마목장은 각종 CF와 드라마 촬영지로도 인기가 높다.

입구부터 아름다운 은사시나무 가로수길이 펼쳐지고, 마치 유럽의 어느 목장에 온 것처럼 이국적인 풍경을 눈에 담으며 걷다 보면 북적이는 도시와는 전혀 다른 여유를 느낄 수 있다.

간혹 멋스러운 갈기를 흩날리며 기수와 한몸이 되어 달리는 경주마들도 만날 수 있어 색다른 볼거리가 된다.

힘찬 말발굽소리와 시원스런 속도감에 마음도 뻥 뚫리는 듯 하다.

본래 우수한 종마들을 육성하고 관리하기 위해 지어진 이곳은 지난 1997년부터 목장 일부를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최근엔 어린이들을 위한 체험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는데, 직접 말을 타보는 기승체험은 물론 이를 사진으로 찍어 기념 머그도 제작해준다.

또 보호자 동반 하에 마방 등 말 관련 시설 견학도 가능해 가족 단위 관람객이라면 아이들에게 특별한 추억을 선물해줄 수도 있다.

원당역 바로 옆에 자리한 배다리술도가는 1915년에 처음 문을 연 이래 무려 5대째 가업을 잇고 있다.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다시 그 아들의 아들로 이어진 세월의 맛은 1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깊고 향기롭다.

이곳에서 만든 막걸리가 전국적인 유명세를 얻은 데는 故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특별한 인연이 계기가 되었다. 우연히 근처를

지나던 길에 국밥집에서 배다리막걸리를 처음 접하게 된 박 전 대통령은 그 깔끔한 맛에 반하여 아예 청와대로 주문해 마실 만큼 즐겨 찾았다.

덕분에 ‘대통령 막걸리’라는 애칭까지 얻었는데, 지금도 그 맛을 잊지 못해 백발성성한 단골손님들이 멀리서 일부러 찾아온단다.

파주골순두부 박가네오리 농가맛집1호 청산별미

파주골순두부 박가네오리 농가맛집1호 청산별미

파주골순두부 박가네오리 농가맛집1호 청산별미

위로가 되어주는 따뜻한 국밥 한 그릇 밀양 돼지국밥

잘 먹고 잘 사는 동네의 밥상은 뭐가 다를까? 포천에는 원조 맛집들이 맛과 건강을 지키고 나섰다.

콩으로 만든 담백한 순두부는 웰빙음식의 선두주자로서 지존의 자리에 올랐다.

이 한 몸 받쳐 사람을 건강하게 하리라는 신념으로 숯불에 몸을 던진 오리는 기름기 쫘~악 뺀 채 환골탈태했다.

버섯을 직접 재배해서 밥상에 내어놓는 버섯요리의 1인자도 포천에 있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신의 손맛이 궁금하다면 포천으로 떠나보자.

구수한 순두부를 보리밥에 슥슥 비벼먹는 원조파주골순두부

포천 43번 국도를 달리다 보면 영평천을 끼고 파주골 순두부촌이 형성되어 있다.

얼핏 봐도 10여 개가 넘는다. 여러 집 중에서 원조를 찾기란 어렵지 않다.

‘원조파주골순두부’ 입간판이 큼직하게 서서 소리 없이 안내한다.

청와대처럼 파란색 기와를 올린 큰 한옥이 위풍당당 원조임을 과시한다. 어지간한 단체손님이 와도 문제 될 것이 없을 것 같은 규모다.

원조파주골순두부의 사장 김예주 할머니는 30여 년 전 등산객에게 무료로 순두부와 보리밥을 제공하다가 반응이 좋아서 본격적으로 식당을 운영했다고 전한다.

입소문을 타면서 순두부의 살아있는 전설이 되었는데 이후 순두부집들이 많이 생겼지만, 그 아성을 넘볼 수 없어 보인다.

주문과 동시에 콩나물, 상추 겉절이, 열무김치, 무채무침 등 반찬 엳아홉 개가 깔린다.

대부분 양념이 과하지 않으면서 간이 심심하다. 넓은 대접에 함께 나오는 보리밥은 양이 푸짐하다.

드디어 우윳빛의 순부두가 올라온다.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김은 구수한 향을 사방에 날려 보낸다.

첫맛은 심심하다. 뒤이어 고소한 맛이 혓바닥을 휘어 감더니 목젖까지 점령해버린다.

이 맛을 보려고 전국의 미식가들이 앞다퉈 이곳을 찾는다. 한 번의 숟가락질은 끊어질 줄 모르고 계속 이어진다.

간장에 쪽파, 깨소금 등을 넣어 만든 양념장을 비벼 맛을 보니 파향이 순두부와 어우러져 감칠맛이 난다.

보리밥에 순두부를 넉넉하게 넣고 각종 나물, 참기름, 김가루, 된장찌개 등을 넣고 비벼 먹으니 정말 제대로 밥 먹은 기분이다.

여름 한 철 깊이울 유원지는 피서객들로 북적인다. 이곳에 신북 오리촌이 있다. 10여 개의 오리전문점들이 모여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먼저 깃발을 꽂은 식당은 ‘박가네 오리’다. 1994년 오리사냥으로 시작했다가 사장의 성(姓)을 따서 지금의 상호로 변경했다.

오리고기 한 마리를 주문하면 몸통, 날개, 똥집이 꼬치에 꽂혀 8개 정도 나온다.

3~4명이 넉넉하게 먹을 양이다. 흔히 오리는 로스구이, 진흙구이, 주물럭 등으로 많이 먹는데 이 집은 20년 전부터 오직 회전구이에 주력하고 있다.

꼬치에 끼운 오리고기를 숯불 사이에 꽂으면 자동으로 회전하면서 기름기는 빠지고 고기는 노릇노릇하게 익는다.

적당히 익은 고기는 꼬치에서 뽑은 뒤 보온 열판에 올려놓고 먹으면 된다. 딱딱해지기 쉬운 다 익은 고기를 보온 열판이 항상 같은 온도를 유지해준다.

위로가 되어주는 따뜻한 국밥 한 그릇 밀양 돼지국밥

위로가 되어주는 따뜻한 국밥 한 그릇 밀양 돼지국밥

위로가 되어주는 따뜻한 국밥 한 그릇 밀양 돼지국밥

영양 선바위와 남이포 역적이 된 남이장군이야기

경상도 이외 지역 사람들에게는 돼지국밥이란 음식이 다소 낯설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돼지고기가 들어간 국밥은 먹어보지 않은 이상 선뜻 상상하기 힘든 맛일 수도 있다.

경상도에서 보편화된 음식인 돼지국밥이 지난겨울 전국적으로 크게 조명을 받았다.

바로 당시 큰 반향을 일으켰던 영화 <변호인>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돼지국밥은 주인공 송강호만큼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영화가 흥행하면서 돼지국밥집을 찾는 사람들도 많았다. 영화를 보고 난 후 훌훌 말아먹는 뜨끈한 돼지국밥 한 그릇은 마음에 묘한 위로가 되어주었다.

부산과 경남 지역의 대중식인 돼지국밥은 한국전쟁 당시 경상도 지역으로 피란 온 사람들이 만들어 먹기 시작했다는 설도 있고,

경상도 지역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났다는 설도 있다.

탄생설이 여러 가지이듯 원조 지방을 꼬집어 얘기할 수는 없으나, 대부분 부산과 경남 밀양을 돼지국밥의 원조로 인정한다.

부산의 돼지국밥집들은 이미 많이 소개가 됐으므로, 오늘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밀양의 돼지국밥집들을 찾아가보고자 한다.

먼저, 제대로 된 밀양식 돼지국밥을 만나보고 싶다면 밀양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무안면으로 가보자.

밀양시외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20여 분 가면 무안면 읍내에 도착한다.

밀양 돼지국밥의 원조로 손꼽히는 곳이 ‘양산식당’인데, 그 명맥을 잇는 ‘동부식육식당’에 전국의 미식가들이 모여든다.

동부식육식당 최수곤 사장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일제강점기 무안면 장터에서 양산식당을 운영했고, 지금 3대째 가업을 이어가고 있다.

동부식육식당의 돼지국밥은 다른 곳에서 흔히 접하는 돼지국밥들과는 여러 면에서 차이가 난다.

우선 국물이 뽀얀 색을 띠지 않고 맑은 편이다. 일반적인 돼지국밥과 달리 돼지뼈가 아니라 소뼈를 고아낸 국물을 쓰기 때문이다.

그리고 돼지국밥집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정구지(부추의 경상도 사투리)’가 나오지 않는다.

이유는 소뼈 육수와 함께 누린내가 나지 않는 질 좋은 암퇘지만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돼지고기 특유의 잡내가 없으니 굳이 부추를 함께 내놓지 않는단다.

국밥에 약간의 파와 깨소금만 올려서 낼 뿐이다. 양념장도 얹지 않고 따로 주기 때문에 깔끔한 국물 맛을 그대로 음미할 수 있다.

얼큰한 맛을 선호한다면 양념장을 넣어 먹으면 된다.

소뼈 육수를 기본으로 사용하니 돼지국밥뿐 아니라 소고기국밥도 맛볼 수 있다.

식육식당이라 질 좋은 고기도 판매하며, 수육과 소고기육회 메뉴도 있다.

주변에 자리한 ‘제일식육식당’과 ‘무안식육식당’도 모두 양산식당 후손들이 운영하는 곳이다.

나라에 큰 사건이 생길 때마다 표면에 물이 맺혀 ‘땀 흘리는 비석’이라고도 불리는 표충비(지방유형문화재 제15호)가 도보 5분 거리에 있다.

돼지국밥 한 그릇 먹고 유적도 관람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 돼지국밥 6,000원, 따로국밥 6,500원, 소국밥 6,000원.

밀양전통시장 좁은 골목길에는 이름부터 정겨운 ‘단골집’이 자리한다. 일부러 찾아오는 단골이 아닌 이상 우연히 지나다가 발견하기는 어려운 위치다.

찾아오는 손님들도 서로 편안하게 안부를 물을 정도로 단골이 많다. 단골집이라는 이름이 딱 어울린다.

영양 선바위와 남이포 역적이 된 남이장군이야기

영양 선바위와 남이포 역적이 된 남이장군이야기

영양 선바위와 남이포 역적이 된 남이장군이야기

쉼표가 있는 농촌 숲 속 여행 지리산의 너그러움에 물드는 하동 여행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지 중의 오지, 바로 영양이다.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굽이굽이 국도를 타고 한참을 들어가야 하는 영양은 여행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꿈꾸었을 법한 아름답고 청정한 고장이다.

일월산자락의 성스러운 분위기와 밤이 되면 쏟아져 내리는 무수한 별빛이 오염되지 않은 영양의 모습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산촌마을의 외롭고 맑은 분위기는 하루 밤 묵어가고 싶은 간절함을 꿈꾸게 만들어준다.

이 아름다운 영양에 조선시대 풍운의 꿈을 안고 스러져간 남이장군에 대한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남이장군의 설화가 얽힌 영양을 여행하며 교과서여행지로서 영양의 매력을 만끽해 보도록 하자.

조선 세조 13년, 이시애의 난이 발발되었다.

이시애는 원래 함길도 길주의 지방토착 세력으로 세조 치하에 토호들의 세력이 약화되자 강한 반발심을 품게 되어 난을 일으킨 인물이다.

이시애는 난을 일으키기 전 함길도 전역에 흉흉한 소문을 퍼트려 민심을 어지럽혔고, 민심이 흉흉해지자 함길도 절도사 강효문을 죽이며 난을 일으켰다.

초반에 이시애의 난은 굉장한 반응을 불러일으키며, 순식간에 수많은 고을 수령들이 피살되었고 왕을 신뢰하지 않았던 백성들은 이시애의 휘하에 속속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세조는 이 난을 잠재우기 위해 의외의 인물을 중용했는데, 그 인물이 스물여섯의 조카 구성군과 남이장군이었다.

구성군과 남이장군은 이시애의 난을 멋지게 해결해 조정의 중요 인물로 전면에 설수 있게 되었고, 세조는 이들의 공을 치하하는데 그치지 않고 실제 인사를 단행하기에 이른다.

큰 공을 세운 스물여섯의 구성군을 영의정에, 역시 젊은 남이장군을 병조판서에 임명한 것이다.

조정대신들은 강하게 반발했으나 세조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다.

당시 한명회나 신숙주와 같은 구공신들은 이미 너무나 강한 권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시애의

난을 계기로 공을 세운 젊은 신진들의 힘을 함께 키워주기 위한 세조의 생각이 반영된 결과였던 것이다.

세조가 이와 같은 개혁을 단행한 이유는 악화된 세조의 건강 때문이었다.

세조의 뒤를 이을 예종이 권력의 균형을 갖춘 세력을 이끌기를 원했던 것이다.

세조는 이와 같은 개혁을 단행하고 얼마 있지 않아 숨을 거두었다.

세조가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했던 구성군과 남이장군 중 구성군은 신중하고 사려 깊은 성격으로 조정신료들의 지지를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남이장군은 나서기를 좋아하고 겸손하지 못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구공신들을 무시하고 뻣뻣하게 구는 남이장군을 조정신료들이 곱게 봐주기 만무했다.

남이장군을 총애하던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하자마자 남이장군에 대한 신료들의 상소가 빗발쳐,

예종은 즉위한 당일 바로 남이장군을 좌천시켰다.

이에 남이는 자신을 좌천시킨 조정 신료들에게 불만을 품게 되고 역시 자신처럼 세조 시절 총애를 받았던 유자광을 찾아가 그의 심정에 대해 토로하게 되었다.

그러나 유자광은 남이를 만나고 난 뒤 바로 대궐로 들어가 남이 장군이 역심을 품었다고 고변을 했다.

유자광은 남이의 역심을 고변하는 자리에서 남이가 쓴 시를 바꿔치기 하여 ‘나이 스물에 나라를 얻지 못하면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하리요.

‘라는 시구절로 예종의 마음을 흔들었다고 한다. 남이 장군은 결국 역적의 혐의를 받아 처형당했다.

실록에 기록된 대로 그가 정말로 역심을 품어 반란을 꾀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백성들은 젊은 나이에 큰 칼을 휘두르며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민심을 잠재웠던 훌륭한 장수 남이의 죽음을 안타깝게 생각했다고 한다.

억울하게 죽은 영혼은 무당이 신으로 모시는 경우가 많아, 남이장군을 몸주로 모시는 무당들이 남이장군의 죽음 이후에 많이 생겨났다고 한다.

백성들 사이에도 남이장군의 용맹함에 대한 이야기들이 전설처럼 전해지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영양의 선바위와 남이포에도 억울하게 죽은 남이장군의 전설이 서려있다.

쉼표가 있는 농촌 숲 속 여행 지리산의 너그러움에 물드는 하동 여행

쉼표가 있는 농촌 숲 속 여행 지리산의 너그러움에 물드는 하동 여행

쉼표가 있는 농촌 숲 속 여행 지리산의 너그러움에 물드는 하동 여행

영화 속 교도소의 흔적을 만나다 전북 익산 교도소세트장

하동 화개면의 신흥마을에서 의신마을까지 화개천 계곡을 따라 4.2km 가량 이어지는 서산대사길은 실제 서산대사가

지리산에 머물며 걸었던 길일뿐만 아니라 최치원이 지리산에 입산하여 사색을 했던 길이라고 전해진다.

서산대사길을 걸으며 옛 위인의 자취와 함께 사색에 잠겨보자. 서산대사길 끝자락에 다다르면 해방 이후 빨치산

사건으로 생긴 현대사의 아픔을 간직한 지리산역사관에 들러보는 것도 좋다.

지리산역사관에서 가슴 아픈 현대사와 지리산에서 터전을 가꾸고 살아가던 화전민들의

생활상을 둘러본 후에는 인근에 위치한 농촌체험마을 <의신마을>로 가보자.

반달가슴곰을 통해 자연을 배우는 반달가슴곰 생태학습장 탐방해설 프로그램, 반달가슴곰의 배설물로 발효퇴비를 만드는 과정,

그리고 그것을 양분으로 자라는 야생화 화분 만들기 등 다양한 체험프로그램을 즐길 수 있다.

체험이 끝난 후에는 의신마을 선학관에서 신선한 식재료로 차린 산나물밥상을 맛보고, 하룻밤 묵어가자.

다음 날,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두가 아는 대표 시장, 화개장터를 둘러보고, 그 곳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마지막으로 박경리문학관, 최참판댁, 토지 촬영지를 둘러본 후 여행을 마무리하자.

서산대사길

지리산 옛길로 불리는 서산대사길은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장터에서 쌍계사를 거쳐 의신계곡을 지나 지리산 주 능선의

벽소령을 넘어 하동군 화개면 신흥마을에서 의신마을까지 옛길 구간 4.2km를 말한다.

옛 보부상들이 하동 광양 등 남해안의 소금과 해산물을 벽소령을 넘어 함양 등 내륙지방으로 물건을 팔러 다니던

길이자 의신 마을 주민들이 산에서 구워낸 참숯을 하동 화개장터로 넘나들던 옛길 그대로이다.

지리산에 머무는 동안 오가며 신흥마을에서 의신마을까지 지리산 화개천을 따라 지리산 모퉁이를 돌고 돌아 꼬불꼬불 나 있는 아름다운 길이다.

하동군 화개면에 위치한 지리산 역사관은 지리산에 얽힌 고단한 삶들을 기리는 곳으로, 총 3개의 전시실로 이루어져 있다.

제1전시실은 지리산 깊은 숲 속에 불을 내어 밭뙈기를 일구며 살았던 화전민의 생활상을 보여준다.

제2전시실에는 6.25 전쟁을 전후하여 지리산에서 벌어졌던 전쟁에 관한 기록들을 전시하고 있다.

제3전시실에는 다양한 총기류 등이 전시되어 있다.

한 시대를 힘겹게 살아갔던 그들의 발자취를 따르는 동안 현재의 무탈함에 안도하게 된다.

지리산을 이고 있는 듯한 역사관 주변의 모습이 아름답다.

의신마을은 화개동 골짜기 상류에 자리잡은 아늑한 마을로, 계절마다 다양한 야생화가 지천으로 피어나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청정한 환경을 머금은 산나물과 산약초, 송이버섯, 고로쇠 수액 등 품질 좋은 특산품을 생산하고 있다.

멸종위기종인 반달가슴곰 생태학습장과 야생화 학습장을 조성하여 야생화 화분 만들기 등 다양한 생태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으며,

부녀회 어머니들이 정성껏 준비하는 산음식을 맛볼 수 있는 식체험관인 선학관도 있다.

숙박 시설도 잘 갖추고 있어 지리산 품속에서 쉼을 맛보기 좋다.

영화 속 교도소의 흔적을 만나다 전북 익산 교도소세트장

영화 속 교도소의 흔적을 만나다 전북 익산 교도소세트장

영화 속 교도소의 흔적을 만나다 전북 익산 교도소세트장

왕새우양식장에서 맛보는 새우요리 싱싱하고 맛있다

누구도 넘지 못할 높은 담, 차가운 철문과 쇠창살, 세상과 철저히 격리된 시간과 공간

교도소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잔상이다. 교도소는 죄를 짓지 않는 이상 들어가려야 갈 수 없는 곳이다.

하지만 전북 익산에는 교도소의 모습을 그대로 본떠 만든 교도소세트장이 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교도소 내부를 둘러보는 느낌은 어떨까? 을씨년스럽고 독특한 풍경을 선사하는 교도소세트장을 찾아가보자.

전북 익산에 자리 잡은 교도소세트장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영화나 드라마를 촬영하기 위해 만든 영화 촬영용 교도소다.

영화 <홀리데이> 는 교도소세트장에서 탄생한 첫 번째 영화이자 교도소세트장의 탄생 배경이 되는 영화다.

교도소세트장은 지난 2005년 영화 <홀리데이> 를 촬영하기 위해 익산시와 영화제작사가 손을 잡고 세웠다.

<홀리데이> 를 시작으로 영화 <거룩한 계보> , <타짜> , <식객> , <해바라기> 를 촬영했고, 드라마 <아이리스> ,

<태양을 삼켜라> , <수상한 삼형제> 와 가장 최근에는 <노란 복수초> , <더킹투하츠> 도 이곳에서 촬영했다.

원래 이곳은 성당초등학교 남성분교가 있던 곳이다.

남성분교가 폐교된 후 학교 부지 위에 교도소 건물을 올린 것이다.

아직도 본관 건물과 널찍한 운동장이 옛날 학교의 흔적을 고스란히 전해준다.

교도소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늘 편견이 묻어난다.

세상과 격리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죄를 짓고 들어온 사람들의 날카로운 표정과 눈빛이 넘나드는 곳이다.

하지만 그곳 역시 사람이 살아가는 곳이다. 교도소는 새로운 인생의 출발점이지만, 영화 <빠삐용> 이나 <쇼생크 탈출> 에서처럼 세상 밖으로 나가기 위해

처절히 몸부림치는 탈출구가 되기도 한다. 영화 <홀리데이> 의 지강헌, <거룩한 계보> 의 동치성, 드라마 <노란 복수초> 의 설연화도 그랬다.

암울한 회색빛 담장과 높은 망루 사이로 두툼한 철문이 가로막고 있다. 교도소로 들어가는 출입문이다.

출입문 우측 담장 아래에는 그동안 촬영했던 영화와 드라마 포스터가 길게 도열해 있다.

비록 촬영장이라고는 하지만, 철문을 들어서는 순간 낯선 세상으로 들어서는 것 같아 기분이 묘해진다.

수 m에 이르는 높은 담장이 망루들을 휘감아 하늘은 담장이 감싸고 있는 그만큼만 보인다.

교도소세트장 내부는 철문과 쇠창살의 연속이다. 차디찬 쇳덩어리와 회색 벽이 음울한 공간을 연출한다.

높은 천장과 작은 창문으로 새어드는 빛이 교도소 공간임을 실감하게 해준다.

교도소 내부는 면회장, 취조실, 수감시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수감시설은 2층으로 좌우 양쪽에 나란히 이어져 있다.

대부분은 들어갈 수 없지만, 1층 독방과 2층의 일부 수감시설은 내부까지 둘러볼 수 있다.

1층 독방은 최근 종영된 드라마 <더킹투하츠> 에서 중국 공안에게 잡힌 김항아(하지원 분)가 수용되었던 독방이다.

당시 벽에 썼던 붉은 글씨가 지금도 남아 있다. 교도소세트장 곳곳에서 일부러 남겨둔 당시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내부를 둘러보다 보면 교도소 이름도 ‘익산교도소’ ‘안양교도소’등 다양하다.

곳곳에 붙은 표어나 일본어로 표기된 부착물들을 통해 시대적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지난날 금강은 충청도와 전라도 내륙까지 물자를 실어 나르던 중요한 뱃길이었다.

바다에서 내륙으로 들어가는 뱃길이 있었으니 자연스럽게 포구가 생기고 마을도 들어섰다.

웅포 역시 뱃길 따라 생긴 포구다. 웅포의 옛 지명은 곰개나루. 마치 곰이 강물을 마시는 모습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웅포는 관광지로 조성되어 여행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웅포관광지를 즐기려는 사람들은 각양각색이다.

금강변에서 낚시를 즐기는 사람, 자전거를 타는 사람, 캠핑을 즐기는 사람, 일몰을 감상하거나 사진을 찍는 사람 등 저마다 즐길거리를 하나씩 가지고 있다.

바꿔 말하면 웅포관광지에는 다양한 즐길거리가 있다는 얘기다.

웅포는 서해안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일몰이 아름다운 곳이다. 특히 덕양정과 금강정에서 바라보는 일몰이 으뜸이다.

먼저 덕양정 뒤편 언덕에 자리 잡은 금강정을 올라가보자. 금강정은 웅포관광지에서 최고의 전망을 선사한다.

웅포관광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일 뿐 아니라 금강 저편 신성리 갈대밭과 멀리 금강을 가로지르는 웅포대교까지 바라다 보인다.

신성리 갈대밭은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 촬영지로 잘 알려진 곳이다.

덕양정은 원래 매년 정월 대보름날에 마을의 안녕과 번영, 풍어를 기원하는 용왕제를 지내던 용왕사 터였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으로 운명을 달리한 군사들의 넋을 기리던 곳으로 전한다.

일몰이 시작되면 유유히 흐르던 금강 물줄기도 붉은 기운을 머금는다. 덕양정 앞 커다란 느티나무와 소나무 사이로 일몰의 장관이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