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최초 보양온천 마금산온천과 철새도래지 주남저수지

경남 최초 보양온천 마금산온천과 철새도래지 주남저수지

경남 최초 보양온천 마금산온천과 철새도래지 주남저수지

명성산 금빛물결 황홀경에 빠지다

겨울철 여행 하면 떠오르는 것이 따끈한 온천수에 몸을 담그고 휴식을 즐기는 온천여행이다.

그리고 반가운 겨울 손님, 철새들의 생태를 관찰하는 탐조여행도 특별하다.

이 두 가지 여행을 한꺼번에 즐길 수 있는 곳이 있으니, 바로 경남 창원이다.

보양온천으로 지정된 마금산온천의 마금산원탕과 주남저수지가 그곳. 올겨울 온천여행과 탐조여행을 한꺼번에 즐길 수 있는 창원으로 떠나보자.

우리나라 전역에는 450여 곳의 온천이 있다. 이것저것 이로운 점도 많지만, 뜨끈한 온천수에 몸을 담그는 것만으로도 피로와 스트레스가 사라진다.

온천 가운데 보양온천이란 것이 있다. 수온 35℃ 이상 수질 좋은 온천 가운데 운동욕장, 수영장, 노천탕 등 보양온천 시설을 갖추고 치료와 요양, 휴양이 복합적으로 가능한 온천 시설을 말한다.

마금산온천단지의 마금산원탕이 최근 보양온천으로 지정되었는데, 경남에서는 유일한 보양온천이다.

창원시 북면 마금산과 천마산 사이에 자리잡은 마금산온천은 역사가 제법 깊다.

그 최초의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한다. “온천은 창원도호부에서 북쪽으로 18리 초미흘(草未訖)에 있다.

욕칸은 3칸이고 주사가 3칸이다.”라는 기록이 《세종실록》에 보인다. 《동국여지지》와 《동국여지승람》에도 ‘온정’이란 이름이 보이지만

영조 때 전국의 읍지를 모은 《여지도서》에는 “온정이 창원도호부에서 북쪽으로 20리 거리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라는 기록이 있어 좀 의아스럽다. 어떠한 이유로 갑자기 사라진 듯한데, 거기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온다.

조선 초엽에 마금산계곡에서 약수가 솟아나와 사람들이 그 물을 마시고 목욕을 하니 각종 질환에 효험이 있었다.

소문이 나자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는데, 그로 인해 지역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치게 되자 약수를 매몰했다고 한다.

마금산온천은 오랫동안 잊히는 듯했다가 일제강점기에 다시 등장한다.

1927년 마산도립병원장이었던 일본인 도쿠나가가 온천을 찾아내는 데 성공해 온천욕을 통한 요양 장소로 문을 열었다.

1990년대 초까지 일본식으로 지은 온천호텔이 남아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그 후로 현재의 마금산원탕과 천마산온천이 그 뒤를 잇고, 지금은 2곳을 포함해 10여 곳이 온천으로 운영되고 있다.

보양온천으로 지정된 마금산원탕은 대중탕 외에도 보양온천의 필수 시설인 수치료탕, 운동욕장, 치유풀장, 노천탕, 운동실, 사우나 등을 갖췄다.

온천수는 지하 300m에서 분출되는 약알칼리성 식염온천으로 수온이 57℃ 정도다.

20여 가지 광물질을 함유하고 있는데 특히 철, 망간, 나트륨, 라듐 등을 다량 함유해 신경통, 요통, 근육통 등 통증 완화와 피부 미용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최근 ‘아토피 피부염의 염증 완화 효과’에 대한 연구를 통해 아토피에도 효험이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와 환우들에게 희소식이 되고 있다.

마금산온천단지 뒤로 마금산(279m)과 천마산(372m)이 자리한다. 마금산과 천마산 산행을 즐긴 뒤 마금산온천에서 쌓인 피로를 푸는 사람들이 많다.

두 산은 산세가 완만할 뿐 아니라 사거정고개를 사이에 두고 서로 이어진다.

사거정고개에 상천리와 하천리로 넘어가는 도로가 나 있고, 고갯마루 도로 위에 두 산을 이어주는 출렁다리가 있어 산행이 훨씬 쉬워졌다.

온천초교나 신리마을에서 마금산 정상에 오른 뒤 출렁다리를 건너고, 다시 천마산 정상을 오른 뒤 바깥신천마을로 내려오면 된다.

출렁다리는 일명 ‘마금산온천 구름다리’로 도로 위를 가로질러 70m나 이어진다. 한 발 내딛을 때마다 출렁거리는 게 스릴 있다.

천마산 방면 출렁다리 끝에 서면 마금산온천단지가 바로 내려다보이고, 400m가 넘는 백월산의 당당한 자태가 바라다보인다.

마금산온천단지 내에는 무료로 운영되는 족욕체험장이 있다. 뜨끈한 온천수에 발을 담그고 마금산온천의 ‘물맛’을 살짝 느껴볼 수 있다.

명성산 금빛물결 황홀경에 빠지다

명성산 금빛물결 황홀경에 빠지다

명성산 금빛물결 황홀경에 빠지다

쉼과 여유의 힐러 청주 드라마 촬영지

옷장 속 반소매티, 반바지 등 얇은 옷은 서랍으로 가고, 서랍 속에 접어둔 코트, 니트 등 두꺼운 옷은 옷장에 걸린다.

겨울 준비를 마쳤지만, 마음은 왠지 싱숭생숭하다. 걷다 보면 쌀쌀한 바람이 마음을 관통하는 듯하다.

몸과 마찬가지로 마음도 따뜻하게 데워줄 필요가 있다. 가을이 왔음을 알릴 필요가 있다.

억새꽃의 하얀 솜이 그렇게 따뜻하다고 한다. 서울에서 가까운 명성산의 억새밭으로 가보자.

지도 상, 서울에서 1시 방향 약 70㎞ 거리에 솟음이 여럿 모였다.

등고선이 오밀조밀 겹쳐 북동쪽으로 산맥처럼 연결됐다. 이곳에 광주산맥의 한 솟음 ‘명성산’이 있다.

명성산은 경기도 포천시와 강원도 철원군의 경계에 솟았다. 정상에서 보일 풍경을 떠올려 본다. 북동쪽 조망이 보통은 아닐 것 같다는 예감이 스친다.

오전 8시 서울에서 출발, 동부간선도로를 통해 의정부를 지나기까지 정체가 계속된다.

출근시간 의정부와 서울 사이의 43번 국도는 피하는 것이 좋겠다. 의정부시청을 지나자 조금씩 도로상황이 좋아진다.

가는 길 왼편으로 야트막한 산세가 이어지고 어느 순간 오른편으로 험준한 산세가 나타나면 명성산이 가까움이다.

산정호수를 중심으로 산세가 병풍처럼 펼쳐졌다. 제일 높아 보이는 북쪽의 산이 명성산이다.

그 외에 서쪽의 망무봉, 남쪽의 관음산과 망봉산, 동쪽의 여우봉 등이 호수를 보호하기라도 하는 듯 두터운 외벽역할을 한다.

이 천혜의 요지에는 약 천 년 전의 전설이 내려오는데…, 울“명(鳴)”자, 소리“성(聲)”자가 모여 명성이란 이름이 붙여진 이 산에 어떤 사연이 있는 걸까.

때는 바야흐로 후삼국시대에서 고려시대로 넘어가는 찰나다. 후고구려를 건국한 궁예왕이 왕건의 정변으로 피신한 장소가 바로 이곳이다.

당시 궁예왕은 망국의 슬픔이 커, 온 산이 떠나가도록 통곡해 명성산으로 불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산정호수와 명성산의 남서쪽 기슭은 국민관광지로 지정돼 볼거리, 즐길거리, 먹거리가 한데 모였다.

조각공원, 호수 산책로가 운치 있게 조성됐으며 주차장, 매점, 숙박업소 등 편의시설도 부족함 없이 들어섰다.

이제 명성산으로 들어가자. 전문 산악인부터 어린아이까지 남녀노소 즐길 수 있는 난이도별 코스구성이 가능하다.

자인사를 거쳐 오르는 코스와 등룡폭포를 지나 억새군락지로 가는 코스 중 하나를 정하자.

자인사보다 등룡폭포 경유코스가 완만한 편이다. 억새군락지로 향하는 등산객 대부분은 등룡폭포를 경유해 억새군락지로 간다.

평일임에도 수도권과 가까운 덕에 명성산을 찾은 등산객이 상당히 많은 편이다.

등산로 초입부터 가을 정취가 흠뻑 풍긴다. 오른편으로 계곡물이 흐른다.

수량이 줄어 물소리의 시원함은 덜하지만 졸졸거리는 소리가 간지럽다.

본격적인 등산에 앞서 지압로가 약 100m에 걸쳐 만들어졌다.

해발 900m 정도의 산을 오르고 내려오면 발에 불나기 마련. 내려오는 길, 지압로에서 발바닥 좀 식혀주자.

사진 찍으며 천천히 오른 지 100분 정도 지나자 등룡폭포가 모습을 드러낸다.

용이 승천했다는 폭포다. 바위에 앉아 사색에 잠긴 사람, 폭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 달라 부탁하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약 1.5㎞ 구간, 옆을 나란히 하던 계곡은 등룡폭포를 지나면서 보이지 않는다.

계곡길에서 억새군락으로 이어진 능선길로 넘어온 것이다.

억새밭의 바람에 일렁이는 군무를 지나며, 팔각정이 있는 곳으로 향한다.

능선길이 완만한 편으로 억새밭을 만끽하며 걷기 좋다. 힘들게 오른 기억은 어느샌가 사라지고 이곳 분위기에 빠져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꽃이 서로 부딪치며 바스락 소리가 잔잔히 깔린다.

가을을 알리는 전령사의 음악이랄까. 이제야 몸도 마음도 겨울준비가 탄탄해진 느낌이다. 마음에 이제 가을이 왔음을 제대로 알려줬으니 말이다.

쉼과 여유의 힐러 청주 드라마 촬영지

쉼과 여유의 힐러 청주 드라마 촬영지

쉼과 여유의 힐러 청주 드라마 촬영지

괴산 둔율올갱이마을 와일드푸드 체험과 시원한 물놀이를 한번에

청주는 역사와 문화예술이 어우러진 여행지다. 도시의 편의를 간직하지만 번잡스럽지 않아 좋다.

최근에는 촬영지로도 인기다. KBS 드라마 <힐러> 역시 청주에서 촬영했다.

도심의 수암골, 옛 청주연초제조창에서 외곽의 청남대와 운보의 집까지, 청주 여행의 다채로움을 누릴 수 있는 코스다.

청주시는 플라타너스 가로수길로 시작된다. 청주IC에서 시내로 진입하는 길로 6km 정도 이어진다.

우리나라에서 손꼽는 아름다운 길이다. 1981년 영화 <만추>, 1995년 드라마 <모래시계>의

명장면으로 기억하는 이도 많다. 계절마다 색을 바꿔 청주를 찾는 이들에게 첫인사를 건넨다.

청주는 근래 들어 촬영지로 다시 부각 중이다. 얼마 전까지는 드라마 <힐러>를 청주에서 촬영했다.

‘우리가 물려받은 세상은 상처 입었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드라마로, 정치나 사회정의에 관심 없던 젊음들이 과거의 진실을 찾아간다는 내용이다.

<힐러>를 연출한 이정섭 PD의 고향이 청주와 이웃한 진천군이라 인연이 닿았다.

그는 <힐러> 촬영을 위해 여러 도시를 물색했으나 옛 청주연초제조창을 잊을 수가 없었다.

옛 청주연초제조창은 1946년에 문을 열어 2004년 12월에 문을 닫았다.

그 뒤로 한동안 방치됐다가 2011년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의 주무대로 부활했다. 2015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역시 연초제조창에서 꾸려졌다.

예술과 공장이 만나 아트팩토리(artfactory)의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힐러>에서도 그 느낌을 살렸다. 첫 회, 첫 장면에서 고속촬영으로 텅 빈 건물을 돌아다니던 카메라는 서정후의 아지트에서 멎는다.

옛 건물 특유의 허름한 기운 아래, ‘힐러’ 정후(지창욱 분)의 은밀하고 감각적인 공간이 한층 돋보였다.

옛 청주연초제조창에서 시청 방면으로 약 2km 거리에는 수암골 벽화마을이 있다.

우암초등학교 뒤쪽 언덕이다.

이정섭 PD의 전작인 KBS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2010), <영광의 재인>(2011)의 주무대였던 마을이다.

그에 앞서서는 SBS 드라마 <카인과 아벨>(2009)에서 극중 초인(소지섭 분)과 영지(한지민 분)의 터전이었다. 촬영지 청주의 신호탄과도 같은 드라마들이다.

<힐러>에서는 부모 세대의 젊은 날을 보여줄 때 등장했다.

다른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주로 과거 회상이나 산동네 장면을 촬영했다. 작품들의 성적이 좋아 지금도 찾는 이가 많다.

실제 수암골은 한국전쟁 이후 피란민들이 정착하며 생겨났다. 여느 산동네와 마찬가지로 벽화가 눈길을 끈다.

지난 2007년 충북의 예술인들이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진행한 결과다. 다만 다른 산동네에 비해 그리 큰 편은 아니다.

뒤편으로 우암순환도로가 지나며 마을의 확장을 막은 까닭이다. 골목을 따라 천천히 걸어도 30분이면 족하다. 크게 힘들이지 않고 벽화와 골목을 돌아볼 수 있다.

마을 위편 도로에는 수암골전망대가 있다. 청주 시내가 한눈에 펼쳐지는 조망 명소다. 그 풍경에 취해 머무노라면 금세 마음이 평온해진다.

전망대 아래쪽에는 카페 거리도 생겨났다. 커피 한잔하며 여유를 누려봄 직하다.

조금 더 화려한 도심의 카페를 원한다면 S459를 추천한다. 성화동에 있는 레스토랑이자 카페다.

<힐러>에서는 상수파의 건물로 나온다. 2014년 한국건축문화대상 우수상을 받은 건물이다.

배우 고소영과 원빈의 건물 등을 설계한 곽희수 건축가가 지었다. 근래 청주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각광받고 있다.

괴산 둔율올갱이마을 와일드푸드 체험과 시원한 물놀이를 한번에

괴산 둔율올갱이마을 와일드푸드 체험과 시원한 물놀이를 한번에

괴산 둔율올갱이마을 와일드푸드 체험과 시원한 물놀이를 한번에

먼 추억 연착륙하다 합천영상테마파크

천편일률의 맛집 소개 바람이 한 차례 지나가고, 일류 셰프들의 현란한 요리 대결과 소박한 집밥 열풍이 여전한 가운데

이제는 들에서 직접 먹거리를 수확하고 채집해서 먹는 이른바 와일드푸드 바람이 솔솔 불고 있다.

신토불이, 웰빙, 유기농에 이어 먹거리 트렌드의 끝판왕이 아닌가 싶다.

손톱만 한 올갱이 하나로 10여 년간 마을축제를 일구며 방문객들에게 시원한 체험과 푸근한 추억을 선사하는 괴산 둔율올갱이마을에서 와일드푸드를 체험한다.

그 이름부터 오지의 느낌 충만한 곳 괴산! 하지만 서울에서 2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괴산은 조령, 그러니까 새재를 넘어 영남으로 들어가는 충청도의 마지막 관문이다. ‘둔율’이라는 이 마을의 이름은 유서가 깊다.

삼국시대 한강 유역을 차지하기 위한 교두보이자 근거지였던 괴산-충주 지역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그래서 이 지역은 수시로 그 주인이 바뀌었는데, 삼국통일 후에 이곳에 밤나무를 집중적으로 심었고 그 모습이

마치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듯하다 하여 마을 이름을 ‘둔율’이라고 했다. 삼국통일 때 유래한 마을 이름이 천년을 넘게 이어져오는 것이다.

오늘 체험 가족의 미션은 올갱이마을에서 와일드푸드 체험하기! 가족은 SBS-TV <정글의 법칙>의 출연자들처럼 우선 주변의 먹거리 채집과 수확에 나선다.

7월의 올갱이마을 수확 품종은 옥수수.

먼저 다녀간 가족들에 의해 옥수수밭은 이미 2/3가 수확된 상태였지만, 다행히 밭 끝자락에 늦깎이 체험족을 위한 옥수수가 남아 있다.

수확의 기쁨과 미션 성공을 위하여 뙤약볕을 마다 않고 옥수수밭으로 들어간다.

옥수수 수확의 핵심 포인트는 터프함이다. 옥수수는 한해살이 식물이니 옥수수 줄기가 다칠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다.

크고 실한 옥수수를 골라 비틀고 잡아당겨서 따기만 하면 된다. 여덟 살, 네 살짜리 꼬마 자매도 10분 만에 수확 봉지를 가득 채운다.

뙤약볕을 무릅쓰고 밭에 들어갈 수 있었던 이유다. 하지만 억센 옥수수 잎에 피부가 쓸려 다칠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수확 체험은 계절 체험이다. 옥수수 따기는 7월 체험이고, 6월에는 감자 캐기, 8월에는 고추 따기를 할 수 있다.

가을에는 대추 따기와 벼 베기 체험이 준비되어 있다. 세심한 사람들에 한해 인삼체험도 할 수 있다.

옥수수 수확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이제 이 마을의 테마이자 자랑인 올갱이를 잡으러 마을 앞 달천으로 나간다.

달천은 남한강의 지류로 1급수를 자랑한다. 괴산 사람들은 괴강이라 부른다.

‘올갱이, 그까짓 거 뭐 대충 강바닥에 있는 것 주워오면 되지 않겠어?’ 어림없는 소리다. 올갱이 잡기가 그리 만만치 않다.

큼지막한 수경 밑으로 강바닥을 샅샅이 훑어보지만 올갱이님 뵙기가 쉽지 않다.

‘아니, 올갱이마을이라면서?’ 마음속에서 마을 이름에 대한 불신이 스멀스멀 피어오르지만, 올갱이가 잡히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올갱이는 야행성이기 때문에 밤에는 바위 위에 올라와 있는 올갱이를 쓸어 담을 수 있지만, 낮에는 돌 밑이나 강바닥 속에 들어가 있어 잡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저녁밥상에서 구수한 올갱이국과 쫄깃한 올갱이전을 맛보려면 올갱이를 잡아야 한다.

‘꼭 잡고야 말리라!’ 두 눈을 부릅뜨고 수경 아래로 다시 시선을 고정한다. 몇 개의 돌을 들췄을까? 심봤다!

드디어 돌바닥에 붙어 있는 올갱이 하나를 잡았다. 귀하신 몸, 낮 올갱이 되시겠다.

올갱이 담는 바구니가 가벼워 민망하지만, 너무 실망하지는 마시라. 그런 당신을 위해 어젯밤 마을 분들이 올갱이를 미리 섭외해 냉장고에 잘 모셔 두었다.

먼 추억 연착륙하다 합천영상테마파크

먼 추억 연착륙하다 합천영상테마파크

먼 추억 연착륙하다 합천영상테마파크

통도사 서운암 천년고찰과 자연을 품은 야생화

ㄱ·ㄴ·ㄷ·ㄹ 순으로 된 전화번호 수첩을 펼쳐 번호를 찾고 다이얼을 돌려서 걸었던 전화.

상영시각보다 일찍 가서 줄을 서야만 구할 수 있었던 영화표. 조금은 답답해 보일지 모르는 과거지만, 정겨움과 인간미가 가득했다.

이제는 종이통장도 필수가 아닌 선택인 시대. 광고에서는 작은 기기를 보여주면서 편리하고 혁신적이란다.

작지만 기능도 다양해 일명 만능이다. 하지만,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 사용하기엔 너무 앞선 기술로 채워져 애물단지가 되기도 한다. 광고가 끝나고 70~80년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가 시작된다.

“저 때가 좋았지…”

추억을 찾아 떠나는 여행, 고향이 떠오른다. 하지만 고향도 세월이 지날수록 추억의 장소는 점점 줄어들어 아쉬움이 남는다.

아쉬움을 달래주기 좋은 곳이 합천에 있다. 고향도 아니고 그곳에 추억이 있는 것도 아닌데

대안으로 합천을 권한 이유는 누구나 반가울 옛 기억 하나쯤은 ‘합천영상테마파크’에서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꼭 추억을 회상하러 가는 것이 아니어도 좋다. 그 시절을 모르는 사람에겐 과거로 떠나는 여행이 될 수 있고

영화와 드라마에서 보던 배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으니 또 다른 재미가 있다. 특히 할아버지에서 손자까지 여러 세대가 함께 가면 나눌 이야기가 많을 것이다.

합천댐에서 내려온 물이 황강으로 흐른다. 물길을 5㎞정도 따라가면 강과 산 사이에 자리한 합천영상테마파크가 나온다.

대규모 촬영지는 공통적으로 빌딩 같은 높은 시설물이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조성된다.

이곳 테마파크도 주위 풍경과 세트장 사이에 방해요소가 없다. 합천의 수려한 경관과 촬영지의 색다른 분위기에 집중하기 좋은 조건이다.

합천영상테마파크가 문을 열 수 있게 된 계기는 천만 이상 관객을 동원한 ‘태극기 휘날리며’ 이다.

그 인기가 이곳 촬영지까지 이어졌고, 이에 합천군은 촬영지를 영상테마파크로 조성해 문을 열었다.

간이역처럼 꾸며진 입구에서 표를 구매. 과거행 열차 탑승권을 사는 기분이다.

테마파크에서 처음 눈에 띄는 것이 마침 노면 전차다.

1898년부터 1969년까지 운행된 대중교통수단으로, 부산과 서울에만 있었으며 서울에서는 용산, 노량진, 청량리, 서대문 등 사대문 내부를 두루 순환하는 코스로 운행됐다.

다사다난 했던 그 시절의 이야기를 다룬 영상물에 빠지지 않는 단골이다.

자동차 교통량이 증가하면서 자연스레 과거의 유물이 된 전차를 볼 수 있으니 박물관 같은 느낌마저 든다.

광복 전과 후의 시가지 풍경이 펼쳐진다. 반세기 전에는 이런 곳이 사람들로 시끌벅적한 동네였으리라.

사람과 건물이 참 이질적이다. 입장객은 1950년대로 타임머신을 타고 온 영화 속 주인공처럼 보인달까.

서울역의 원래 모습이 재현됐다.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가 촬영될 때에는 경성역이 되기도 한다.

이 역은 일제 강점기에 만주역과 연결되는 한반도의 철도교통의 중심으로 기능했고, 근대에는 서울에 부푼 꿈을 안고 상경한 젊은이들의 관문이었다. 촬영지에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배경이다.

이처럼 촬영지는 조선총독부, 경교장 등 각 시대의 대표적인 건물과 역사적 사건과 연관이 깊은 건물을 모아 놨다.

둘러보면서 자연스럽게 역사를 훑고 지나가는 셈이다. 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분위기를 짧은 구간 내에 정밀하면서 꼼꼼하게 구성해 자세히 살펴보는 재미가 있다.

세트장 이곳저곳에서 다양한 포즈를 지으며 사진을 찍지만, 유독 한 촬영지에서는 V자로 손가락을 펴기가 어렵다.

마음도 무겁다. 트럭이 엎어져 있고, 자전거는 검게 그을려 찌그러진 바퀴를 위태롭게 달고 있다.

포탄이 떨어진 듯한 건물, 벽에는 총알이 박힌 듯한 구멍이 군데군데 뚫렸고 창문은 성한 것이 없다. 전쟁터를 재현한 세트장의 모습이다.

한해살이풀들만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이곳은 절망, 상처, 슬픔의 공간이다. 배우는 전쟁 속의 한 인물로 연기했을 것이다.

이입된 그 감정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전쟁터 촬영세트장을 지나 이제 출구가 나오겠지 하는 순간, 다른 시대의 세트장이 나온다. 약 7만 평에 걸쳐 형성된 촬영지는 쉽게 끝을 볼 수 없을 만큼 넓다.

약 70~80년대의 서울의 모습이 나온다. 88올림픽이 열리기 전의 서울이라면 적당할 것 같다.

통도사 서운암 천년고찰과 자연을 품은 야생화

통도사 서운암 천년고찰과 자연을 품은 야생화

통도사 서운암 천년고찰과 자연을 품은 야생화

우리네 옛집의 품격

통도사는 국지대찰이자 우리나라 3보 사찰 중 하나인 불보종찰로 꼽히는 명찰로, 서운암은 이러한 유서깊은 사찰의 한 암자이다.

서운암 주변 5만 여평 야산에는 무려 100여 종의 야생화가 지천으로 피어 있는 ‘야생화 군락지’ 이다.

서운암은 이를 시민의 자연학습장으로 활용 중이며, 매년 들꽃축제(제16회째), 문학인축제(제7회째), 천연염색축제(제6회째) 등 다채로운 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통도사는 19개에 달하는 암자가 있으며, 모두 차량으로 접근이 가능하다.

암자의 규모가 큰 편이라 모든 암자를 둘러보기 보다는 암자를 선별해 몇 차례로 나눠 둘러보는 것이 좋다.

통도사는 국지대찰이자 우리나라 3보 사찰 중 하나인 불보종찰로 꼽히는 명찰로, 서운암은 이러한 유서깊은 사찰의 한 암자이다.

통도사의 말사인 서운암은 전통 약된장, 천연염색, 도자삼천불과 장경각 등이 유명하며, 특히 서운암 쪽염은 통도사를

중심으로 계승되어 온 한국의 대표적인 전통 천연염색 방법으로 1990년대 중반 이후 문화강좌를 통해 대중화에 기여했다.

근래에는 잊혀져 가는 야생화를 알리기 위하여 서운암 주변 5만 여평 야산에 100여 종의 야생화 수 만 송이를 심어 ‘야생화 군락지’를 조성하여

시민의 자연학습장으로 활용 중이다. 또한 매년 들꽃축제(제16회째), 문학인축제(제7회째), 천연염색축제(제6회째) 등 다채로운 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금낭화 (Dicentra spectabilis)

금낭화는 풀 전체가 흰 빛이 도는 녹색이며, 잎이 모란잎과 닮았다. 꽃은 담홍색으로 핀다.

황매화 (Kerria japonica)

황매화는 높이 2m 내외로 무더기로 자란다. 꽃은 황색으로 잎과 같이 피고 가지 끝에 달린다.

홍매화 (Prunus glandulosa)

양성꽃으로 꽃이 잎과 같이 피며 적색으로 만첩이며, 열매는 적색 핵과로 6~8월에 성숙한다.

흰매화 (Prunus mume)

만첩흰매실화라고도 하며 나무의 높이 약 5m이다. 꽃은 겹꽃으로서 흰색으로 핀다.

수련 (Nymphaea tetragona)

수중식물로 땅속줄기에서 많은 잎자루가 자라서 물 위에서 잎을 편다. 꽃은 긴 꽃자루 끝에 1개씩 달린다.

능소화 (Campsis grandiflora)

능소화는 낙엽성 덩굴식물로 가지 길이가 10m에 달하며, 꽃은 지름이 6~8cm로 황홍색이다.

통도사는 국지대찰이자 우리나라 3보 사찰 중 하나인 불보종찰로 꼽히는 명찰로, 신라 27대 선덕여왕 15년(646년)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통도사는 사찰 그자체로서 역사적 가치를 가질 뿐 아니라 우리나라 사찰 중 가장 많은 44종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국보 제290호인 통도사 대웅전 및 금강계단을 비롯한 813점의 문화재가 보관되고 있으며,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유물 또한 통도사내

성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어 우리민족의 역사적, 문화적 향토 발자취를 탐구하기 위한 불교문화 탐방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우리네 옛집의 품격

우리네 옛집의 품격

우리네 옛집의 품격

충주 미륵대원지 옛길에서 만나는 아주 오래된 절터

만석지기, 청송 심부자댁

청송(靑松)이다. 고장의 이름이 푸른 소나무다. 그 의미만으로 울림이 있다.

청송 사람들은 이를 ‘동쪽에 있는 불로장생의 신선 세계’라고도 받아들인다. 청송에 들어서면 그 말이 이해가 간다.

주왕산 아래 생명력이 넘치는 자연이다. 파천면 덕천리에 다다를 때 즈음에는 머물러 살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이 생겨난다. 파천면은 우리나라의 열 번째 슬로시티다.

자연과 역사를 존중하며 느리게 살아가는 마을이다. 여러 씨족이 집성촌을 이루어 살지만 덕천리의 청송 심씨 집안이 가장 잘 알려졌다.

파천이 슬로시티가 된 가장 큰 원동력 역시 청송 심씨 집안의 송소고택과 무관하지 않다. 송소고택은 청송 심씨 집안의 심호택이 지었다.

1880년경 호박골에서 조상의 본거지인 덕천리로 이전하면서다. 그의 호를 따 송소고택이라 부른다.

그는 조선 영조 때 만석지기였던 심처대의 7대손이다. 청송 심씨는 무려 9대에 걸쳐 만석의 부를 누렸던 집안으로 경주 최부자와 함께 영남의 양대 부호였다.

청송에서 대구를 가려면 심부자의 땅을 밟지 않고는 갈 수가 없을 정도였다.

또 조선왕조 500년 동안 세종대왕의 비인 소헌왕후를 비롯해 4명의 왕비와 4명의 부마(임금의 사위), 13명의 정승을 배출했다.

13년에 걸쳐 지은 99칸 송소고택이 그 위세를 짐작케 한다.

99칸 대부호의 집

신흥천을 지나 고택에 다다르자 먼저 솟을대문이 맞이한다. 좌우에 정면 7칸, 측면 1칸의 행랑채를 가진 대문간채다.

솟을대문에는 홍살을 설치했고, 위에는 ‘송소세장(松韶世莊)’이란 현판이 걸렸다. 이 또한 송소고택의 부(富)를 부연한다.

그 아래를 지나 고택으로 들어선다. 경내에는 10채의 건물이 자리한다. 대문채, 안채, 큰사랑채와 작은사랑채, 사당, 별채 등이 다.

하지만 제일 먼저 마주하는 건 집이 아니라 ‘ㄱ’자형의 헛담이다.

내외담이라고도 부르는데, 사랑채에 기거하는 남자들과 안채를 오가는 여자들 사이를 가른다.

조선 유교사회의 전통을 엿보게 한다. 헛담 주변으로는 아담한 정원을 꾸몄다. 화초들이 어울려 정감 있다.

마당에 선 향나무 고목도 고택의 풍모를 더한다. 헛담 뒤편에는 큰사랑채와 작은사랑채가 ‘ㅡ’자로 길게 자리한다.

큰사랑채는 집안의 가장 큰 어른이 머물던 공간이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위엄이 느껴진다.

누마루방에서는 바깥 정원의 풍경이 일품이다. 그 옆은 대청마루다. 대문간채 너머로 안산의 풍경이 시원스럽다.

대청 건너에는 책방이 있다. 사랑방은 정면 2칸에 측면이 1칸 반이다. 미닫이 창살문을 들여 반 칸의 작은 방(반침)을 뒀다.

작은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중문을 포함해 사랑 2칸과 대청 1칸 등으로 이뤄졌다.

여자들의 공간인 안채는 큰사랑채와 작은사랑채 사이 중문으로 들어간다. 전형적인 ‘ㅁ’자 구조로 전면에 사랑채가 있고 후면에 안채다.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특히 대청마루의 세살문 위에 빗살무늬 횡창을 달아 시선을 끈다. 마당에는 화단과 우물이 옛 정취를 느끼게 한다.

동쪽에는 3칸짜리 큰 부엌이 있는데, 그 너머 후원에 따로 방앗간까지 두었을 정도로 부유했다.

서쪽 담장의 솟을삼문을 지나면 별채로 이어진다. 가묘가 아니라 정자를 둔 게 독특하다.

송소고택은 단순히 유서 깊은 고택에 그치지 않는다. 2002년부터 일찌감치 고택 체험 시설로 개방해 일반인의 숙박이 가능하다.

큰사랑과 작은사랑, 안사랑과 행랑채 등 14개의 방을 개방한다. 큰사랑채의 누마루방이나 별채 등이 인기가 좋다.

화장실과 샤워실은 신발을 신고 나가야 하지만 수세식으로 꾸며 깔끔하다. 해마다 열리는 고택음악회도 빼놓을 수 없다.

한옥 처마 아래 울리는 소리가 은은하다. 다채로운 체험 프로그램이 있지만, 실은 별도의 체험을 하지 않아도 충분하다.

충주 미륵대원지 옛길에서 만나는 아주 오래된 절터

충주 미륵대원지 옛길에서 만나는 아주 오래된 절터

충주 미륵대원지 옛길에서 만나는 아주 오래된 절터

낭만 가득 재미 가득 한옥에서의 하룻밤 경북 청송 송소고택

하늘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옛길이다. 하늘재가 열리면서 수많은 사람과 문물이 넘나들었고, 길 위에는 사찰 터와 원터 등 오래된 역사의 흔적이 숱하게 남았다.

하늘재 입구의 충주 미륵대원지라 불리는 사찰 터도 그 중 하나다.

충주 미륵대원지는 드라마 <무신>의 첫 회에 등장한 배경지다.

<무신>은 고려시대 무신정권을 종식시키는 김준이라는 인물을 통해 급변하는 고려의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드라마다.

충주 미륵대원지는 노비 신분에서 고려의 최고권력자에 오른 김준의 파란만장한 인생의 시작점이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은 고려 왕건에게 신라의 모든 것을 넘겨주었다.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몸서리치며 반대했지만, 결국 모든 것을 체념하고 금강산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마의태자가 망국의 설움을 달래며 넘었던 길이 하늘재이고, 신라를 등지고 북녘 땅을 바라보는 미륵불을 세운 곳이 바로 충주 미륵대원지다.

충주 미륵대원지는 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에 창건되었고, 대몽항쟁기 때 충주산성 등 충주 인근에서 몽고군과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 점으로 미루어 이때 불탄 것으로 여겨진다.

우연이었을까? 드라마 <무신>의 배경은 고려시대 무인정권시대부터 대몽항쟁이 펼쳐지는 시기와 일치한다.

더구나 드라마 <무신>의 첫 회 촬영지가 바로 충주 미륵대원지다.

<무신>의 주인공 김준은 노비 출신으로서 최충헌-최우-최항-최의에 이르는 60년간의 최씨 무신정권을

무너뜨리고 최고의 지위인 문하시중에 올랐다.

그야말로 드라마틱하고 영화 같은 삶을 살다간 인물이다.

고려시대 거란군과의 전쟁에 무리하게 동원된 승려들이 난을 일으키자, 무신정권은 승려들의 대대적인 숙청으로 화답했다.

갓난아이 때 축령사에 맡겨진 김준은 무상이라는 법명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축령사로 설정된 충주 미륵대원지는 승려들에 대한 탄압이 자행되는 공간으로 등장한다.

무신정권의 친위군이 승려들과 백성들을 잔인하게 공격하는 가운데 김준도 결국 붙잡혀 개경으로 압송된다.

충주 미륵대원지는 단 한 번 촬영이지만 스님들이 봉술과 수박 등 무술을 연마하는 장면, 김준과 월아의 애틋한 감정이 살아나는 장면 등이 촬영되었고

우뚝 솟은 석조여래입상 등 절터의 독특한 전경이 뚜렷한 인상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드라마 <무신>은 고려의 무신정권을 배경으로 30년에 걸친 대몽항쟁뿐 아니라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팔만대장경에 대한 이야기도 다룬다고 하니 격변하는 고려의 역사를 살짝 음미해볼 만하다.

충주 미륵대원지에 이르면 가장 먼저 쓰러져 있는 당간지주와 거대한 귀부가 눈에 들어온다.

멀리 우뚝 솟은 석가여래입상과 함께 팔각석등, 오층석탑이 일렬로 나란히 서 있다.

오층석탑 옆에는 사각의 독특한 석등이 하나 남아 있다.

충주 미륵대원지는 오래전 고개를 넘나들던 민초들이 간절한 염원을 빌던 곳이었고, 고개를 넘기 전 지친 발길을 쉬어가던 휴식처였지만

전란으로 폐허가 되고 문경새재 길이 열리면서 사람들에게 서서히 잊혀갔다. 그리고 800여 년이란 긴 세월 동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세상의 빛을 다시 보게 된 것은 한국전쟁 이후 현 미륵세계사가 들어서고 1977년 발굴 조사를 시작하면서부터다.

특히 발굴 조사를 통해 <미륵당>, <미륵당초>가 새겨진 기와편이 출토되었는데,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미륵대원으로 여겨진다고 한다.

충주 미륵대원지는 사적 제317호로 지정되었다.

낭만 가득 재미 가득 한옥에서의 하룻밤 경북 청송 송소고택

낭만 가득 재미 가득 한옥에서의 하룻밤 경북 청송 송소고택

낭만 가득 재미 가득 한옥에서의 하룻밤 경북 청송 송소고택

사람이 하나가 되다 충주의 산과 호수 하늘과 땅

이 겨울, 하루 이틀 정도 한옥체험을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달빛이 비치는 환한 창호지 너머로는 먼 마을의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오고 문에는 배롱나무 그림자가 희미하게 어린다.

따뜻한 아랫목에 누워 두툼한 이불을 나눠 덮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겨울밤이 훈훈해진다.

경북 청송군 파천면 덕천마을에 자리한 송소고택에 가면 이런 낭만적인 겨울밤을 보낼 수 있다.

심심산골 덕천마을 한가운데에 자리한 송소고택은 조선 영조 때 만석지기였던 심처대의 7대손 송소 심호택이 1880년경 13년에 걸쳐 지은 99칸짜리 집이다.

아들을 넷 두었던 선생은 인근에 또다시 30칸짜리 집 3채를 7년에 걸쳐 지었지만, 한국전쟁 때 2채가 불타버리고 지금은 송소고택과 둘째 아들의 집이었던 송정고택만이 남아 있다.

청송 심씨는 조선 왕조 500년 동안 세종대왕의 비인 소헌왕후를 비롯해 왕비 4명, 부마 4명, 정승 13명을 탄생시킨 명문대가다.

송소고택은 김좌진 장군과 함께 활약했던 이범석 장군,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 독립운동가 조병옥 박사 등 역사 속의 많은 인물들이 하룻밤 묵어간 곳이기도 하다.

2010년에는 대한민국 관광의 최고상인 ‘2011 한국 관광의 별’로 선정됐고, 연간 4~5만 명이 다녀가는 명소로 자리 잡았다.

송소고택은 전형적인 조선시대 부잣집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다. 대문을 밀면 120년이 넘는 오랜 세월을 말해주듯 삐거덕 소리를 내며 열린다.

솟을대문을 여닫을 때마다 요란한 소리가 나도록 한 것은 찾아오는 손님이 많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다.

홍살을 올린 솟을대문은 당시의 부를 말해주는데, 전하는 얘기에 따르면 심 부자의 재력은 9대 2만 석에 이르렀다고 한다.

개화기에 전답을 정리해 화폐로 바꾸니 고을 돈이란 돈은 전부 모였고, 이것을 청송으로 옮기는 행렬의 길이만 10리나 뻗쳤다고 전해진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먼저 눈에 띄는 건 ㄱ자형 헛담이다.

헛담은 안채에 드나드는 여자들이 사랑채에 기거하는 남자들 눈에 띄지 않게 하기 위해 지은 간이 담장으로 일명 내외담이라고도 한다.

헛담을 지나면 사랑채가 나온다. 집안 어른이 기거하던 큰 사랑채와 후계자인 큰아들이 기거했던 작은 사랑채로 나뉘어 있다.

큰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을 얹었는데 못을 쓰지 않고 만들었다고 한다.

여자들의 공간인 안채는 사랑채 뒤편에 살포시 ‘숨어’ 있다. 안채는 전형적인 ‘ㅁ’자형을 이룬다.

문간을 들어서면 동쪽으로 방과 부엌이 이어져 있고 서쪽으로는 두지, 고방 등이 연결되어 있다. 안채의 대청마루에는 세살문 위에 정교한 빗살무늬의 교창을 달았다.

송소고택에서 가장 특징적인 구조물은 사랑채와 안채 사이 담장에 뚫린 구멍이다.

사랑채에서 보면 6개이지만 안채에서 보면 3개뿐이다. 사랑채 손님이 몇 명이나 왔는지 안채에서 엿보는 용도로 쓰였다고 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안채에서는 사랑채가 보이지만 사랑채에서는 안채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

안채 구멍 1개에 사랑채 구멍 2개가 45도 각도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양반가의 엄격함을 엿볼 수 있다.

송소고택은 아이들도 좋아한다. 부드러운 흙이 깔린 널찍한 마당과 정원은 잡기놀이와 비석치기 등 놀이를 즐기기에 좋고 숨바꼭질을 하기도 좋다.

꽃담과 굴뚝, 아궁이, 문고리 등 집 안 구석구석마다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소소하고 신기한 볼거리들로 가득 차 있다.

제기차기, 새총 쏘기, 투호 등 우리 전통놀이도 체험해볼 수 있다.

송소고택에 하루쯤 묵어보는 것은 각별한 체험이다. 120여 년 전의 대청마루와 기둥, 문살이 그대로 남아 있다.

최근 들어 새로 만들어진 한옥체험관과는 느낌이 다르다. 송소고택은 모든 재료가 옛날 자연 그대로다.

기단은 돌을 사용했고, 기둥과 서까래, 대청 바닥 등은 나무로 만들었다. 벽은 볏짚과 흙을 섞은 흙벽이다. 모든 창에는 한지를 발랐다.

밤이면 은은한 문살 사이로 달빛이 새어든다. 소쩍새 소리와 송소고택 앞을 흐르는 개울물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운다. 아침도 좋다.

송소고택에서는 되도록 일찍 일어날 것을 권한다. 새벽안개가 자욱하게 내려앉은 별채 기와의 선이 예쁘다.

송소고택 뒤편에는 후원이 있다. 조그만 대숲과 흙담을 따라가는 산책도 즐겁다. 후원에서는 송소고택의 전경이 보인다.

사람이 하나가 되다 충주의 산과 호수 하늘과 땅

사람이 하나가 되다 충주의 산과 호수 하늘과 땅

사람이 하나가 되다 충주의 산과 호수 하늘과 땅

합천 해인사 여행 천년의 시간을 거슬러 오르다

충북 충주는 내륙의 분지다. 사방을 준수한 산들이 둘러치고 있다. 그 중 외지인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이른바 ‘천·지·인 삼등산’이다.

각각 천등산(807m)과 지등산(535m) 인등산(667m)의 머리글자를 따 부르는 이름이다.

한데 북에서 남으로 이어가는 산줄기의 순서는 천-지-인이 아니라 천-인-지다.

충주 북쪽에서부터 순서대로 보면 천등산이 가장 위에 있고, 인등산, 지등산이 이어져 있다.

풍수설을 믿는 이들은 이를 하늘 아래 사람이 땅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다는 뜻이라고 풀이한다.

세 산은 높이에 견줘 산세가 험한 편이다. 골짜기도 깊다. 그 탓에 예부터 나라에 변고가 생길 때마다 피난처로 곧잘 이용됐다.

‘삼등산을 모두 넘으면 한 가지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은 이런 이유에서 생겼을 것이다.

세 산은 간격이 넓다. 따라서 종주산행을 하는 이들은 드물고, 각각의 산을 따로 오르는 게 일반적이다.

우리나라엔 산이 많다. 하지만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산은 그리 많지 않다. 강원도 태백산, 인천 강화의 마니산 등 손에 꼽을 정도다.

천등산도 예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산이었다. 다만 태백산이나 마니산 등에 견줘 덜 알려졌을 뿐이다.

천등산 입구에서 느릅재 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천제단이 나온다. 원래 있던 위치에서 옮겨 보다 크고 웅장하게 조성했다.

먼저 천등산에 대한 오해부터 풀고 가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천등산과 박달재가 가까울 것이라 생각한다.

옛 가요 ‘울고 넘는 박달재’때문이다. 반야월이 가사를 쓴 노래는 ‘천등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로 시작된다.

가사대로라면 누구나 박달재가 있는 곳이 천등산이라 생각하기 마련이다. 한데 박달재는 충북 제천, 천등산은 충주에 속해 있다.

거리도 9㎞ 정도나 떨어져 있다.

그러니 노래 가사에 생략된 단어들을 포함시켜 보다 정확히 가사를 쓰자면 ‘천등산 지나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라고 해야 옳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박달재가 있는 산은 시랑산(691m)이다.

모실 시(侍)에 사내 랑(郞)을 쓴다. 말 그대로 낭군을 모신다는 뜻이니 박달 도령과 금봉 처녀의 사랑이야기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천등산은 높이 807m의 제법 험한 산이다. 충주시 산척면 송강리에 위치하고 있다.

산행 기점은 다릿재다. 충주 삼척면과 제천 백운면이 경계를 이루고 있는 고개다.

다릿재 높이가 해발 374m이니 433m 정도 고도를 높이면 천등산 정상에 닿는 셈이다.

다릿재 가는 길은 충주와 제천을 잇는 4차선 도로가 조성되기 전까지만 해도 유일하게 두 도시를 잇던 간선도로였다.

그러다 10여 년 전에 새 도로가 뚫렸고, 이 때 다릿재 터널이 생기면서 지금은 잊혀진 도로가 되고 말았다.

다릿재 가는 길은 더없이 호젓하다. 사람들의 시선에서 살짝 비켜선 덕이다.

충주구치소에서 구불구불 산자락을 휘감아 돌며 5㎞ 정도 이어진다.

다릿재에서 시작되는 천등산 등산로의 전체 길이는 1.8㎞ 정도다.

들머리에서 소봉까지 0.9㎞, 소봉에서 천등산 정상까지 0.9㎞의 단순한 구조다. 바삐 걸으면 2시간 30분, 쉬엄쉬엄 걸어도 3시간이면 다녀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