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추억 연착륙하다 합천영상테마파크

먼 추억 연착륙하다 합천영상테마파크

먼 추억 연착륙하다 합천영상테마파크

통도사 서운암 천년고찰과 자연을 품은 야생화

ㄱ·ㄴ·ㄷ·ㄹ 순으로 된 전화번호 수첩을 펼쳐 번호를 찾고 다이얼을 돌려서 걸었던 전화.

상영시각보다 일찍 가서 줄을 서야만 구할 수 있었던 영화표. 조금은 답답해 보일지 모르는 과거지만, 정겨움과 인간미가 가득했다.

이제는 종이통장도 필수가 아닌 선택인 시대. 광고에서는 작은 기기를 보여주면서 편리하고 혁신적이란다.

작지만 기능도 다양해 일명 만능이다. 하지만,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 사용하기엔 너무 앞선 기술로 채워져 애물단지가 되기도 한다. 광고가 끝나고 70~80년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가 시작된다.

“저 때가 좋았지…”

추억을 찾아 떠나는 여행, 고향이 떠오른다. 하지만 고향도 세월이 지날수록 추억의 장소는 점점 줄어들어 아쉬움이 남는다.

아쉬움을 달래주기 좋은 곳이 합천에 있다. 고향도 아니고 그곳에 추억이 있는 것도 아닌데

대안으로 합천을 권한 이유는 누구나 반가울 옛 기억 하나쯤은 ‘합천영상테마파크’에서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꼭 추억을 회상하러 가는 것이 아니어도 좋다. 그 시절을 모르는 사람에겐 과거로 떠나는 여행이 될 수 있고

영화와 드라마에서 보던 배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으니 또 다른 재미가 있다. 특히 할아버지에서 손자까지 여러 세대가 함께 가면 나눌 이야기가 많을 것이다.

합천댐에서 내려온 물이 황강으로 흐른다. 물길을 5㎞정도 따라가면 강과 산 사이에 자리한 합천영상테마파크가 나온다.

대규모 촬영지는 공통적으로 빌딩 같은 높은 시설물이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조성된다.

이곳 테마파크도 주위 풍경과 세트장 사이에 방해요소가 없다. 합천의 수려한 경관과 촬영지의 색다른 분위기에 집중하기 좋은 조건이다.

합천영상테마파크가 문을 열 수 있게 된 계기는 천만 이상 관객을 동원한 ‘태극기 휘날리며’ 이다.

그 인기가 이곳 촬영지까지 이어졌고, 이에 합천군은 촬영지를 영상테마파크로 조성해 문을 열었다.

간이역처럼 꾸며진 입구에서 표를 구매. 과거행 열차 탑승권을 사는 기분이다.

테마파크에서 처음 눈에 띄는 것이 마침 노면 전차다.

1898년부터 1969년까지 운행된 대중교통수단으로, 부산과 서울에만 있었으며 서울에서는 용산, 노량진, 청량리, 서대문 등 사대문 내부를 두루 순환하는 코스로 운행됐다.

다사다난 했던 그 시절의 이야기를 다룬 영상물에 빠지지 않는 단골이다.

자동차 교통량이 증가하면서 자연스레 과거의 유물이 된 전차를 볼 수 있으니 박물관 같은 느낌마저 든다.

광복 전과 후의 시가지 풍경이 펼쳐진다. 반세기 전에는 이런 곳이 사람들로 시끌벅적한 동네였으리라.

사람과 건물이 참 이질적이다. 입장객은 1950년대로 타임머신을 타고 온 영화 속 주인공처럼 보인달까.

서울역의 원래 모습이 재현됐다.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가 촬영될 때에는 경성역이 되기도 한다.

이 역은 일제 강점기에 만주역과 연결되는 한반도의 철도교통의 중심으로 기능했고, 근대에는 서울에 부푼 꿈을 안고 상경한 젊은이들의 관문이었다. 촬영지에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배경이다.

이처럼 촬영지는 조선총독부, 경교장 등 각 시대의 대표적인 건물과 역사적 사건과 연관이 깊은 건물을 모아 놨다.

둘러보면서 자연스럽게 역사를 훑고 지나가는 셈이다. 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분위기를 짧은 구간 내에 정밀하면서 꼼꼼하게 구성해 자세히 살펴보는 재미가 있다.

세트장 이곳저곳에서 다양한 포즈를 지으며 사진을 찍지만, 유독 한 촬영지에서는 V자로 손가락을 펴기가 어렵다.

마음도 무겁다. 트럭이 엎어져 있고, 자전거는 검게 그을려 찌그러진 바퀴를 위태롭게 달고 있다.

포탄이 떨어진 듯한 건물, 벽에는 총알이 박힌 듯한 구멍이 군데군데 뚫렸고 창문은 성한 것이 없다. 전쟁터를 재현한 세트장의 모습이다.

한해살이풀들만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이곳은 절망, 상처, 슬픔의 공간이다. 배우는 전쟁 속의 한 인물로 연기했을 것이다.

이입된 그 감정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전쟁터 촬영세트장을 지나 이제 출구가 나오겠지 하는 순간, 다른 시대의 세트장이 나온다. 약 7만 평에 걸쳐 형성된 촬영지는 쉽게 끝을 볼 수 없을 만큼 넓다.

약 70~80년대의 서울의 모습이 나온다. 88올림픽이 열리기 전의 서울이라면 적당할 것 같다.

통도사 서운암 천년고찰과 자연을 품은 야생화

통도사 서운암 천년고찰과 자연을 품은 야생화

통도사 서운암 천년고찰과 자연을 품은 야생화

우리네 옛집의 품격

통도사는 국지대찰이자 우리나라 3보 사찰 중 하나인 불보종찰로 꼽히는 명찰로, 서운암은 이러한 유서깊은 사찰의 한 암자이다.

서운암 주변 5만 여평 야산에는 무려 100여 종의 야생화가 지천으로 피어 있는 ‘야생화 군락지’ 이다.

서운암은 이를 시민의 자연학습장으로 활용 중이며, 매년 들꽃축제(제16회째), 문학인축제(제7회째), 천연염색축제(제6회째) 등 다채로운 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통도사는 19개에 달하는 암자가 있으며, 모두 차량으로 접근이 가능하다.

암자의 규모가 큰 편이라 모든 암자를 둘러보기 보다는 암자를 선별해 몇 차례로 나눠 둘러보는 것이 좋다.

통도사는 국지대찰이자 우리나라 3보 사찰 중 하나인 불보종찰로 꼽히는 명찰로, 서운암은 이러한 유서깊은 사찰의 한 암자이다.

통도사의 말사인 서운암은 전통 약된장, 천연염색, 도자삼천불과 장경각 등이 유명하며, 특히 서운암 쪽염은 통도사를

중심으로 계승되어 온 한국의 대표적인 전통 천연염색 방법으로 1990년대 중반 이후 문화강좌를 통해 대중화에 기여했다.

근래에는 잊혀져 가는 야생화를 알리기 위하여 서운암 주변 5만 여평 야산에 100여 종의 야생화 수 만 송이를 심어 ‘야생화 군락지’를 조성하여

시민의 자연학습장으로 활용 중이다. 또한 매년 들꽃축제(제16회째), 문학인축제(제7회째), 천연염색축제(제6회째) 등 다채로운 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금낭화 (Dicentra spectabilis)

금낭화는 풀 전체가 흰 빛이 도는 녹색이며, 잎이 모란잎과 닮았다. 꽃은 담홍색으로 핀다.

황매화 (Kerria japonica)

황매화는 높이 2m 내외로 무더기로 자란다. 꽃은 황색으로 잎과 같이 피고 가지 끝에 달린다.

홍매화 (Prunus glandulosa)

양성꽃으로 꽃이 잎과 같이 피며 적색으로 만첩이며, 열매는 적색 핵과로 6~8월에 성숙한다.

흰매화 (Prunus mume)

만첩흰매실화라고도 하며 나무의 높이 약 5m이다. 꽃은 겹꽃으로서 흰색으로 핀다.

수련 (Nymphaea tetragona)

수중식물로 땅속줄기에서 많은 잎자루가 자라서 물 위에서 잎을 편다. 꽃은 긴 꽃자루 끝에 1개씩 달린다.

능소화 (Campsis grandiflora)

능소화는 낙엽성 덩굴식물로 가지 길이가 10m에 달하며, 꽃은 지름이 6~8cm로 황홍색이다.

통도사는 국지대찰이자 우리나라 3보 사찰 중 하나인 불보종찰로 꼽히는 명찰로, 신라 27대 선덕여왕 15년(646년)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통도사는 사찰 그자체로서 역사적 가치를 가질 뿐 아니라 우리나라 사찰 중 가장 많은 44종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국보 제290호인 통도사 대웅전 및 금강계단을 비롯한 813점의 문화재가 보관되고 있으며,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유물 또한 통도사내

성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어 우리민족의 역사적, 문화적 향토 발자취를 탐구하기 위한 불교문화 탐방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우리네 옛집의 품격

우리네 옛집의 품격

우리네 옛집의 품격

충주 미륵대원지 옛길에서 만나는 아주 오래된 절터

만석지기, 청송 심부자댁

청송(靑松)이다. 고장의 이름이 푸른 소나무다. 그 의미만으로 울림이 있다.

청송 사람들은 이를 ‘동쪽에 있는 불로장생의 신선 세계’라고도 받아들인다. 청송에 들어서면 그 말이 이해가 간다.

주왕산 아래 생명력이 넘치는 자연이다. 파천면 덕천리에 다다를 때 즈음에는 머물러 살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이 생겨난다. 파천면은 우리나라의 열 번째 슬로시티다.

자연과 역사를 존중하며 느리게 살아가는 마을이다. 여러 씨족이 집성촌을 이루어 살지만 덕천리의 청송 심씨 집안이 가장 잘 알려졌다.

파천이 슬로시티가 된 가장 큰 원동력 역시 청송 심씨 집안의 송소고택과 무관하지 않다. 송소고택은 청송 심씨 집안의 심호택이 지었다.

1880년경 호박골에서 조상의 본거지인 덕천리로 이전하면서다. 그의 호를 따 송소고택이라 부른다.

그는 조선 영조 때 만석지기였던 심처대의 7대손이다. 청송 심씨는 무려 9대에 걸쳐 만석의 부를 누렸던 집안으로 경주 최부자와 함께 영남의 양대 부호였다.

청송에서 대구를 가려면 심부자의 땅을 밟지 않고는 갈 수가 없을 정도였다.

또 조선왕조 500년 동안 세종대왕의 비인 소헌왕후를 비롯해 4명의 왕비와 4명의 부마(임금의 사위), 13명의 정승을 배출했다.

13년에 걸쳐 지은 99칸 송소고택이 그 위세를 짐작케 한다.

99칸 대부호의 집

신흥천을 지나 고택에 다다르자 먼저 솟을대문이 맞이한다. 좌우에 정면 7칸, 측면 1칸의 행랑채를 가진 대문간채다.

솟을대문에는 홍살을 설치했고, 위에는 ‘송소세장(松韶世莊)’이란 현판이 걸렸다. 이 또한 송소고택의 부(富)를 부연한다.

그 아래를 지나 고택으로 들어선다. 경내에는 10채의 건물이 자리한다. 대문채, 안채, 큰사랑채와 작은사랑채, 사당, 별채 등이 다.

하지만 제일 먼저 마주하는 건 집이 아니라 ‘ㄱ’자형의 헛담이다.

내외담이라고도 부르는데, 사랑채에 기거하는 남자들과 안채를 오가는 여자들 사이를 가른다.

조선 유교사회의 전통을 엿보게 한다. 헛담 주변으로는 아담한 정원을 꾸몄다. 화초들이 어울려 정감 있다.

마당에 선 향나무 고목도 고택의 풍모를 더한다. 헛담 뒤편에는 큰사랑채와 작은사랑채가 ‘ㅡ’자로 길게 자리한다.

큰사랑채는 집안의 가장 큰 어른이 머물던 공간이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위엄이 느껴진다.

누마루방에서는 바깥 정원의 풍경이 일품이다. 그 옆은 대청마루다. 대문간채 너머로 안산의 풍경이 시원스럽다.

대청 건너에는 책방이 있다. 사랑방은 정면 2칸에 측면이 1칸 반이다. 미닫이 창살문을 들여 반 칸의 작은 방(반침)을 뒀다.

작은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중문을 포함해 사랑 2칸과 대청 1칸 등으로 이뤄졌다.

여자들의 공간인 안채는 큰사랑채와 작은사랑채 사이 중문으로 들어간다. 전형적인 ‘ㅁ’자 구조로 전면에 사랑채가 있고 후면에 안채다.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특히 대청마루의 세살문 위에 빗살무늬 횡창을 달아 시선을 끈다. 마당에는 화단과 우물이 옛 정취를 느끼게 한다.

동쪽에는 3칸짜리 큰 부엌이 있는데, 그 너머 후원에 따로 방앗간까지 두었을 정도로 부유했다.

서쪽 담장의 솟을삼문을 지나면 별채로 이어진다. 가묘가 아니라 정자를 둔 게 독특하다.

송소고택은 단순히 유서 깊은 고택에 그치지 않는다. 2002년부터 일찌감치 고택 체험 시설로 개방해 일반인의 숙박이 가능하다.

큰사랑과 작은사랑, 안사랑과 행랑채 등 14개의 방을 개방한다. 큰사랑채의 누마루방이나 별채 등이 인기가 좋다.

화장실과 샤워실은 신발을 신고 나가야 하지만 수세식으로 꾸며 깔끔하다. 해마다 열리는 고택음악회도 빼놓을 수 없다.

한옥 처마 아래 울리는 소리가 은은하다. 다채로운 체험 프로그램이 있지만, 실은 별도의 체험을 하지 않아도 충분하다.

충주 미륵대원지 옛길에서 만나는 아주 오래된 절터

충주 미륵대원지 옛길에서 만나는 아주 오래된 절터

충주 미륵대원지 옛길에서 만나는 아주 오래된 절터

낭만 가득 재미 가득 한옥에서의 하룻밤 경북 청송 송소고택

하늘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옛길이다. 하늘재가 열리면서 수많은 사람과 문물이 넘나들었고, 길 위에는 사찰 터와 원터 등 오래된 역사의 흔적이 숱하게 남았다.

하늘재 입구의 충주 미륵대원지라 불리는 사찰 터도 그 중 하나다.

충주 미륵대원지는 드라마 <무신>의 첫 회에 등장한 배경지다.

<무신>은 고려시대 무신정권을 종식시키는 김준이라는 인물을 통해 급변하는 고려의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드라마다.

충주 미륵대원지는 노비 신분에서 고려의 최고권력자에 오른 김준의 파란만장한 인생의 시작점이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은 고려 왕건에게 신라의 모든 것을 넘겨주었다.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몸서리치며 반대했지만, 결국 모든 것을 체념하고 금강산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마의태자가 망국의 설움을 달래며 넘었던 길이 하늘재이고, 신라를 등지고 북녘 땅을 바라보는 미륵불을 세운 곳이 바로 충주 미륵대원지다.

충주 미륵대원지는 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에 창건되었고, 대몽항쟁기 때 충주산성 등 충주 인근에서 몽고군과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 점으로 미루어 이때 불탄 것으로 여겨진다.

우연이었을까? 드라마 <무신>의 배경은 고려시대 무인정권시대부터 대몽항쟁이 펼쳐지는 시기와 일치한다.

더구나 드라마 <무신>의 첫 회 촬영지가 바로 충주 미륵대원지다.

<무신>의 주인공 김준은 노비 출신으로서 최충헌-최우-최항-최의에 이르는 60년간의 최씨 무신정권을

무너뜨리고 최고의 지위인 문하시중에 올랐다.

그야말로 드라마틱하고 영화 같은 삶을 살다간 인물이다.

고려시대 거란군과의 전쟁에 무리하게 동원된 승려들이 난을 일으키자, 무신정권은 승려들의 대대적인 숙청으로 화답했다.

갓난아이 때 축령사에 맡겨진 김준은 무상이라는 법명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축령사로 설정된 충주 미륵대원지는 승려들에 대한 탄압이 자행되는 공간으로 등장한다.

무신정권의 친위군이 승려들과 백성들을 잔인하게 공격하는 가운데 김준도 결국 붙잡혀 개경으로 압송된다.

충주 미륵대원지는 단 한 번 촬영이지만 스님들이 봉술과 수박 등 무술을 연마하는 장면, 김준과 월아의 애틋한 감정이 살아나는 장면 등이 촬영되었고

우뚝 솟은 석조여래입상 등 절터의 독특한 전경이 뚜렷한 인상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드라마 <무신>은 고려의 무신정권을 배경으로 30년에 걸친 대몽항쟁뿐 아니라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팔만대장경에 대한 이야기도 다룬다고 하니 격변하는 고려의 역사를 살짝 음미해볼 만하다.

충주 미륵대원지에 이르면 가장 먼저 쓰러져 있는 당간지주와 거대한 귀부가 눈에 들어온다.

멀리 우뚝 솟은 석가여래입상과 함께 팔각석등, 오층석탑이 일렬로 나란히 서 있다.

오층석탑 옆에는 사각의 독특한 석등이 하나 남아 있다.

충주 미륵대원지는 오래전 고개를 넘나들던 민초들이 간절한 염원을 빌던 곳이었고, 고개를 넘기 전 지친 발길을 쉬어가던 휴식처였지만

전란으로 폐허가 되고 문경새재 길이 열리면서 사람들에게 서서히 잊혀갔다. 그리고 800여 년이란 긴 세월 동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세상의 빛을 다시 보게 된 것은 한국전쟁 이후 현 미륵세계사가 들어서고 1977년 발굴 조사를 시작하면서부터다.

특히 발굴 조사를 통해 <미륵당>, <미륵당초>가 새겨진 기와편이 출토되었는데,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미륵대원으로 여겨진다고 한다.

충주 미륵대원지는 사적 제317호로 지정되었다.

낭만 가득 재미 가득 한옥에서의 하룻밤 경북 청송 송소고택

낭만 가득 재미 가득 한옥에서의 하룻밤 경북 청송 송소고택

낭만 가득 재미 가득 한옥에서의 하룻밤 경북 청송 송소고택

사람이 하나가 되다 충주의 산과 호수 하늘과 땅

이 겨울, 하루 이틀 정도 한옥체험을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달빛이 비치는 환한 창호지 너머로는 먼 마을의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오고 문에는 배롱나무 그림자가 희미하게 어린다.

따뜻한 아랫목에 누워 두툼한 이불을 나눠 덮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겨울밤이 훈훈해진다.

경북 청송군 파천면 덕천마을에 자리한 송소고택에 가면 이런 낭만적인 겨울밤을 보낼 수 있다.

심심산골 덕천마을 한가운데에 자리한 송소고택은 조선 영조 때 만석지기였던 심처대의 7대손 송소 심호택이 1880년경 13년에 걸쳐 지은 99칸짜리 집이다.

아들을 넷 두었던 선생은 인근에 또다시 30칸짜리 집 3채를 7년에 걸쳐 지었지만, 한국전쟁 때 2채가 불타버리고 지금은 송소고택과 둘째 아들의 집이었던 송정고택만이 남아 있다.

청송 심씨는 조선 왕조 500년 동안 세종대왕의 비인 소헌왕후를 비롯해 왕비 4명, 부마 4명, 정승 13명을 탄생시킨 명문대가다.

송소고택은 김좌진 장군과 함께 활약했던 이범석 장군,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 독립운동가 조병옥 박사 등 역사 속의 많은 인물들이 하룻밤 묵어간 곳이기도 하다.

2010년에는 대한민국 관광의 최고상인 ‘2011 한국 관광의 별’로 선정됐고, 연간 4~5만 명이 다녀가는 명소로 자리 잡았다.

송소고택은 전형적인 조선시대 부잣집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다. 대문을 밀면 120년이 넘는 오랜 세월을 말해주듯 삐거덕 소리를 내며 열린다.

솟을대문을 여닫을 때마다 요란한 소리가 나도록 한 것은 찾아오는 손님이 많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다.

홍살을 올린 솟을대문은 당시의 부를 말해주는데, 전하는 얘기에 따르면 심 부자의 재력은 9대 2만 석에 이르렀다고 한다.

개화기에 전답을 정리해 화폐로 바꾸니 고을 돈이란 돈은 전부 모였고, 이것을 청송으로 옮기는 행렬의 길이만 10리나 뻗쳤다고 전해진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먼저 눈에 띄는 건 ㄱ자형 헛담이다.

헛담은 안채에 드나드는 여자들이 사랑채에 기거하는 남자들 눈에 띄지 않게 하기 위해 지은 간이 담장으로 일명 내외담이라고도 한다.

헛담을 지나면 사랑채가 나온다. 집안 어른이 기거하던 큰 사랑채와 후계자인 큰아들이 기거했던 작은 사랑채로 나뉘어 있다.

큰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을 얹었는데 못을 쓰지 않고 만들었다고 한다.

여자들의 공간인 안채는 사랑채 뒤편에 살포시 ‘숨어’ 있다. 안채는 전형적인 ‘ㅁ’자형을 이룬다.

문간을 들어서면 동쪽으로 방과 부엌이 이어져 있고 서쪽으로는 두지, 고방 등이 연결되어 있다. 안채의 대청마루에는 세살문 위에 정교한 빗살무늬의 교창을 달았다.

송소고택에서 가장 특징적인 구조물은 사랑채와 안채 사이 담장에 뚫린 구멍이다.

사랑채에서 보면 6개이지만 안채에서 보면 3개뿐이다. 사랑채 손님이 몇 명이나 왔는지 안채에서 엿보는 용도로 쓰였다고 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안채에서는 사랑채가 보이지만 사랑채에서는 안채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

안채 구멍 1개에 사랑채 구멍 2개가 45도 각도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양반가의 엄격함을 엿볼 수 있다.

송소고택은 아이들도 좋아한다. 부드러운 흙이 깔린 널찍한 마당과 정원은 잡기놀이와 비석치기 등 놀이를 즐기기에 좋고 숨바꼭질을 하기도 좋다.

꽃담과 굴뚝, 아궁이, 문고리 등 집 안 구석구석마다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소소하고 신기한 볼거리들로 가득 차 있다.

제기차기, 새총 쏘기, 투호 등 우리 전통놀이도 체험해볼 수 있다.

송소고택에 하루쯤 묵어보는 것은 각별한 체험이다. 120여 년 전의 대청마루와 기둥, 문살이 그대로 남아 있다.

최근 들어 새로 만들어진 한옥체험관과는 느낌이 다르다. 송소고택은 모든 재료가 옛날 자연 그대로다.

기단은 돌을 사용했고, 기둥과 서까래, 대청 바닥 등은 나무로 만들었다. 벽은 볏짚과 흙을 섞은 흙벽이다. 모든 창에는 한지를 발랐다.

밤이면 은은한 문살 사이로 달빛이 새어든다. 소쩍새 소리와 송소고택 앞을 흐르는 개울물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운다. 아침도 좋다.

송소고택에서는 되도록 일찍 일어날 것을 권한다. 새벽안개가 자욱하게 내려앉은 별채 기와의 선이 예쁘다.

송소고택 뒤편에는 후원이 있다. 조그만 대숲과 흙담을 따라가는 산책도 즐겁다. 후원에서는 송소고택의 전경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