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대첩과 논개로 유명한 호국충절의 성지

진주대첩과 논개로 유명한 호국충절의 성지

진주대첩과 논개로 유명한 호국충절의 성지

대전광역시 맨발로 걸어요 계족산 황톳길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성 앞으로 흐르는 남강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곳이 과거 치열하고 처절했던 전투의 현장이었다는 사실을 잊게 된다.

지금은 푸르고 아름다운 경관과 멋진 야경을 자랑하는 장소이지만, 430여 년 전에는 진주 목사 김시민과 7만의 민군관이 순절했던 장소,

진주성. 이제는 아이들이 뛰어놀 공간이자 시민들의 휴식처이자,

경상남도가 추천하고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안심관광지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3대첩 중 하나인 진주대첩이 벌어진 곳

사적 제118호인 진주성은 본래 토성이던 것을 고려 우왕 때 석성으로 수축한 것이다.

진주성이 호국충절의 성지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임진왜란 3대첩 중 하나인 진주대첩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 때문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10월, 왜군 3만여 명이 침공하자 진주 목사 김시민은 3,800여 명의 군사, 성민과 함께 왜군을 상대로 크게 이겼다.

이것이 진주대첩이다.

그러나 그 다음 해, 왜군이 설욕을 노려 9만 여 명을 이끌고 재침을 하였고 7만의 민군관이 순절했다.

적장을 껴안고 남강에 몸을 던진 논개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 바로 진주성이다.

논개는 왜의 재침으로 성이 무너지자 촉석루 아래 의암으로 왜장을 유인하여 강물에 몸을 던져 충절을 다했다.

진주성 정문에는 공북문이라는 적힌 현판이 달려 있다.

공북문은 ‘북쪽에 계시는 임금님을 향해 두 손을 모아 공경의 뜻을 표한다’라는 의미가 담긴 문이다.

진주성의 실질적인 정문으로 주 출입문이다.

공북문을 지나 성 안으로 들어가면 높고 푸른 나무와 잔디가 눈을 시원하게 해준다.

양쪽으로 갈라지는 길 초입에는 안내 표지판이 서 있다.

왼쪽 방향으로 촉석루, 임진대첩계사순의단 등이 적혀 있고, 오른쪽 방향으로 국립진주박물관, 창렬사 등이 적혀 있다.

가장 먼저 봐야 할 곳으로 촉석루를 정하고 왔기에 왼쪽으로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진주성은 내부가 넓어서 전부 둘러보려면 시간이 꽤 걸린다.

촉석루로 가는 길에 김시민 장군 전공비를 만나 발걸음을 멈췄다.

진주대첩을 이끈 김시민 장군의 공로를 돌에 새겨 기록한 것으로 ‘고목사김후시민전성각적비’라고도 부른다.

전공비 앞에서 잠시 머물다 다시 촉석루로 향한다.

진주성의 남쪽 벼랑 위에 장엄하게 우뚝 솟은 촉석루는 영남 제일의 아름다운 누각이다.

고려 고종 28년에 진주목사 김지대가 창건한 후 몇 차례 불타 없어졌고, 여러 차례 고쳐지었다.

전시에는 진주성을 지키는 지휘본부였고, 평화로운 시절에는 시인묵객들이 풍류를 즐기던 명소로, 또 과거를 치르는 고사장으로 쓰이기도 했다.

촉석루와 촉석문 사이 즈음 논개가 뛰어내렸다는 의암이 보인다.

조선 선조 때 임진왜란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성이 함락되고 성안의 민군관이 모두 순절할 때

논개도 의암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순국했다.

논개의 의로운 행동을 기리고자 이 바위를 의암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진주성 이곳저곳을 돌아보는 발걸음이 바빠진다.

진주의 역사와 문화가 모두 담긴 곳이면서 풍경이 아름다운 곳이기도 해서 가족이 함께 온 팀들이 눈에 자주 띈다.

호국사와 창렬사를 거쳐 한참을 걸으니 국립진주박물관이 나온다.

국립진주박물관은 1984년 가야문화 연구를 위하여 경상남도 첫 국립박물관으로서 문을 열었다.

천자총통, 지자총통, 중완구, 비격진천뢰 등 임진왜란 무기를 비롯해 경남의 역사 문화와 관련된 다양한 유물을 보존, 연구, 전시하고 있다.

국립진주박물관 건물 옆에는 국보 제105호인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이 서 있다.

이층 기단에 삼층의 탑신을 올린 전형적인 통일신라 양식의 석탑이다.

석탑의 국내에서 유일하게 섬장암으로 만들어졌고, 상층 기단에는 신장상이, 1층 탑신에는 보살상이 조각되어 있다.

신장상과 보살상의 조합은 독특한 사례로 9세기 통일신라 석탑 양식의 중요한 지표가 된다.

진주성은 야간에도 개장을 하는데 야경 명소로 유명하다.

촉석문 옆의 달 조형물에 조명이 들어와서 성문 밖으로 환하게 빛나는 달이 얼굴을 빼꼼 내비친다.

누가 봐도 포토존인 야경 명소여서 달을 배경 삼아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았다.

진주성을 관광할 계획을 짠다면 낮의 진주성뿐만 아니라 밤의 진주성도 꼭 보기를 바란다.

진주성 개방 시간은 하절기에는 저녁 11시, 동절기에는 저녁 10시지만, 진주성 안에 있는 촉석루 등은 오후 6시까지만 개방한다.

진주성 개방 시간만 생각하고 갔다가는 성 안을 제대로 둘러보지 못할 수도 있으니 늦지 않게 서둘러야 한다.

진주성 안에서는 퀵보드, 자전거, 반려동물 출입이 제한된다.

대전광역시 맨발로 걸어요 계족산 황톳길

대전광역시 맨발로 걸어요 계족산 황톳길

대전광역시 맨발로 걸어요 계족산 황톳길

삶의 향기 스민 도시 기행 대구 근대골목 투어

교통의 요지이자 카이스트와 대덕연구단지를 품은 과학도시.

꿈돌이공원을 품은 엑스포의 도시 대전. 기차나 고속버스를 타고 대전과 스친 경험 얼마나 많던가.

목적지가 ‘대전’이 아니었을 뿐 다른 여행지로 향하는 길 위에서 우리는 수도 없이 대전땅을 지나갔다.

스쳐 지나간 수많은 소개팅들처럼. 그냥 지나치기만 해서는 알 수가 없다.

지역이건 사람이건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법이다.

문제는 몸과 마음을 쏟는 공이 그냥 절로 되지는 않는다는 것.

이 둘을 움직이게 하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강력한 효과를 지닌 매력적인 볼거리가 필요한 이유다.

그렇다고 해도 볼거리나 외형이 모든 걸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잘 몰랐지만 알아갈수록 매력을 보여주는 이들도 있지 않은가. 대전도 그와 닮았다.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일단 안으로 들어와서 살펴보면 생각보다 알차고 다양하다.

엑스포 과학공원을 시작으로 유성온천 대전오월드 뿌리공원 그리고 대청호반과 계족산 황톳길 등을 갖추고 있다.

수수하고 무뚝뚝하게만 보이던 상대방이 의외로 재미있고 알차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의 기분이랄까.

이 모두를 둘러보려면 하루로는 어림도 없다. 먼저 대전의 힐링(healing) 명소로 떠오르고 있는 계족산 황톳길부터 살펴보자.

계족산(420m)이라. 익숙한 이름, 계룡산(845m)이 떠오른다.

지도를 살펴보니 계족산은 대전 외곽 동쪽에 자리하고 대전 서쪽 경계선으로는 계룡산 자락이 닿는다.

대전을 사이에 두고 서쪽으로는 계룡산이, 동쪽으로는 계족산이 자리하는 셈이다.

모두 이름에 계가 들어간다. ‘닭 계(鷄)’자다. 대전(大田)은 큰 밭을 뜻하니 큰 밭을 사이에 두고 닭들이 에워싼 그림이 그려진다.

어떤 이들은 두 닭산을 이어 계룡산은 닭의 머리, 계족산은 닭의 다리로 풀어내기도 한다.

맞다. 계족(鷄足), 닭의 다리라는 뜻이다. 산 중턱의 순환 임도가 닭의 다리를 닮았다고 닭다리산 또는 닭발산이라고 불렀다.

인근 송촌에 지네가 많아 지네와 천적인 닭을 이름에 붙였다고도 전해진다.

계족산에 황톳길만 있는 것은 아니다. 명품 100리 숲길과 장동산림욕장도 품고 있다.

오늘 걸을 황톳길은 그 일부, 계족산 산중턱 임도를 따라 이어진다. 장동산림욕장 입구가 시작점이다.

마을 주민들에게 사랑받던 계족산이 대전 시민은 물론 전국구로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은 맨발로 걸을 수 있는 황톳길 공이 크다.

건강을 챙기는 이들이 힐링(Healing) 여행지로 황톳길을 찾았기 때문이다.

정상에 오르는 대신 계족산 능선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지는 환형의 길.

MTB코스로도 사랑받고 있는 임도의 일부를 황토로 덮어 만들었다.

비가 오고 난 후에는 황토의 부드럽고 찰진 느낌을 제대로 맛볼 수 있다. 내리막길에서는 미끄러울 수 있으니 주의하자.

황톳길은 장동산림욕장 입구~원점 삼거리~임도 삼거리~절고개 삼거리~원점 삼거리~장동산림욕장 입구로 이어진다.

총 14.5km로 넉넉하게 5시간 정도면 걸을 수 있는 원점회귀 코스이다.

계족산성을 오르지 않는 이상 매끄럽고 부드러운 길이 이어진다.

물이나 간식 등을 챙겨 산책이나 소풍을 가기에도 좋고 운동 삼아 힘차게 걷기에도 좋다.

시원하게 뻗은 나무 사이로 부드러운 황톳길이 이어진다. 맨발로 찰진 황토가 그대로 전해진다.

황토에는 미생물을 품은 효소들이 있는데 그들이 몸의 순환작용을 돕는다고 알려진다.

발가락 사이사이로 파고드는 황토에 부쩍 건강해지는 것 같다. 문득 궁금해진다. 황토, 누가 깔았을까? 왜?

계족산 황톳길은 (주)맥키스컴퍼니의 맨발 걷기 체험에서 출발한다.

맨발 걷기의 효능에 반한 조 회장이 계족산에 황톳길을 조성하기로 한 것.

황톳길은 2006년 시작한 선양마사회 마라톤 대회와 함께 모습을 갖춰간다.

매년 진행해온 마라톤 대회는 지난 2011년 계족산 맨발축제로 이름을 변경, 사람과 자연 그리고 문학과 문화예술 축제로 방향을 잡았다.

2012년 올해에는 오는 10월13일부터 이틀간 펼쳐질 예정이다.

산림욕장 덕분인지 숲에 안겨 걷는 기분이 제법 괜찮다.

신발을 신고 임도를 걷는 것과 맨발로 황톳길을 걷는 차이를 직접 느껴보자.

항상 양말과 신발에 갇혀있던 발바닥이 만세를 외치는 것 같다.

닿을 때마다 발을 쫀쫀하게 감싸주는 황토의 질감은 느껴보지 않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얼마나 걸었을까. 계족산성을 알리는 표지판이 나온다. 여기까지 와서 계족산성을 놓칠 수 없어 오르기로 했다.

길이 제법 가파르다. 지금까지 걸어온 황톳길이 덧셈과 뺄셈이라면 지금부터 계족산성까지 이어진 길은 미적분이다.

계족산성(사적 제355호)은 계족산 정상에서 능선을 따라 축조된 산성이다.

백제가 쌓은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1998년 발굴을 통해 6세기 경 신라에서 쌓았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성안에서 발굴된 토기 조각 대다수가 신라의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길이 1200m에 높이 7~10m. 복원된 일부 성벽만으로도 그 장대한 규모를 엿볼 수 있다.

대전 북동쪽에 자리한 계족산은 넓은 분지를 품은 데다 중부지방과 영남지방을 잇는 길목으로 전략적 요지였음을 알 수 있다.

계족산성이 힘을 더한다.

삶의 향기 스민 도시 기행 대구 근대골목 투어

삶의 향기 스민 도시 기행 대구 근대골목 투어

삶의 향기 스민 도시 기행 대구 근대골목 투어

부산 도심에서 가장 빨리 기장의 바다를 만나는 동해선

최근 몇 년 사이 대구 도심을 찾는 여행자가 부쩍 늘었다.

대구 근대골목의 매력에 흠뻑 빠진 여행자들이 전하는 입소문에 더해 지난 2012년 ‘한국관광의 별’

장애물 없는 관광자원 부문과 ‘한국관광 100선’에 선정되며 명성까지 얻었기 때문이다.

‘대구에 뭐 볼 게 있나?’ 했던 이들이 도심 한복판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근대문화유산을 직접 둘러보고

그 시절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나며 진정한 감동을 느낀다. 화려하게 단장한 관광지가 아닌,

좁은 골목길과 일상의 공간들을 돌며 소박한 것들이 전하는 삶의 의미를 돌아보게 된다. 여행을 통한 진짜 배움이다.

‘한국관광의 별’ 장애물 없는 관광자원 부문에 선정된 만큼,

급경사로를 통과해야 하는 동산병원 선교사 사택과 계단으로 이루어진 3.1만세운동길을 제외하면,

중구를 중심으로 한 근대골목은 휠체어 이동이 용이하다. 적당한 간격으로 장애인화장실과 쉼터 등도 잘 조성되어 있다.

출입구에 경사로가 설치되어 있거나 단차 없이 접근할 수 있는 식당도 여럿이다.

KTX를 타고 동대구역에 내려 대구지하철 1호선을 타면 반월당역에서 가까운

대구 근대골목까지 수월하게 접근할 수 있어 대중교통을 이용한 여행도 가능하다.

도시의 소음과 질주하는 차량들에 놀라지 말자. 빈틈없는 빌딩 숲 안쪽으로 들어서면 역사와 함께 자리를 지켜온 명소들과 옛집,

이야기를 품은 골목길이 기다리고 있다. 마치 오래전부터 기다려온 듯 다정하게 손을 내밀며 추억 속 어린 시절로 데려다준다.

문화와 향기를 만나는 골목, 계산성당에서 약령시한의약박물관까지

대구지하철 1호선 반월당역에 내려 14번 출구 쪽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지상으로 올라가면 대구 도심 한복판이다.

서울 명동에 해당하는 동성로와 중앙로가 연결되고, 백화점 등 고층 건물들이 도열해 있다.

하지만 오늘 여행의 출발지인 계산성당이 있는 빌딩 숲 안쪽은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오래 묵은 가로수가 도열한 도로를 따라가면 붉은 벽돌로 지어진 계산성당(사적 제290호)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1899년 한옥 성당으로 지어졌으나 화재로 소실된 뒤, 1902년 로베르 신부가 설계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영남 지역에 천주교가 뿌리내리는 데 중심 역할을 했으며, 100년 넘는 세월을 변함없는 모습으로 견뎌낸 견실함이 돋보인다.

성당 왼편에 설치된 경사로를 이용해 개방된 성당 내부를 둘러볼 수 있다.

긴 스테인드글라스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성당 내부의 경건함과 성스러운 분위기를 은은하게 감싸준다.

계산성당에서 나와 오른편 골목으로 접어들면 일제강점기에 저항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를 남긴 시인 이상화 고택과 국채보상운동을 이끌었던 서상돈 고택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함께 자리한 계산예가는 계산동의 옛 모습과 대구에서 활동했던 문인, 예술가 들을 만나는 공간이다.

특히 한옥으로 지어진 전시관은 호출 벨을 누르면 관광안내소 직원이 바로 달려와 휠체어 전용 리프트의 작동을 도와준다.

리프트를 이용해 한옥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특별한 시스템이다.

조선 말기 대구에서 큰 포목점을 운영했던 상인이자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서상돈의 고택은 이상화 고택과 마주보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전국적으로 일어난 국채보상운동이 바로 대구에서 시작되었고,

그 중심에 섰던 인물이 바로 서상돈이다. 고증을 거쳐 복원된 소박한 고택 역시 단차가 없어 휠체어로 이동 가능하다.

서상돈 고택에서 나오면 약령시로 이어진다. 현재 한의약 약재상이 170여 곳이나 몰려 있는 곳으로 조선시대 약령시가 열렸던 거리이다.

경상도의 한약재가 한양으로 올려지기 전 대구 감영으로 먼저 모였고,

자연스럽게 이 거리를 중심으로 약령시가 형성되었다. 거리에 가득한 한약재 냄새만으로도 절로 건강해지는 듯한 느낌이다.